다리 힘만 믿고 찾은 북한산 우왕좌왕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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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JONGIN(elliec)등록 2019.06.17 14:10
일요일 저녁 거실에 앉아 있는데 창밖에서 빛이 번쩍였다. 일기예보대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시작되었다. 월요일 오전까지 비가 계속된다니 화요일은 미세먼지도 없고 쾌청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북한산을 갈까?' 놓치기 아까운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예상대로 화요일 아침의 공기는 보통 수준을 넘는 '좋음'으로 상쾌했다. 나는 산에서 마실 커피를 끓이고 냉동실에서 얼어있는 떡을 꺼내어 물과 함께 배낭을 꾸렸다. 집 앞의 김밥집에서 점심거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서 구기동은 멀지 않았다. 지난주 갔던 칼바위 능선의 시작점이었던 수유리에 비하면 30분 이상 절약한 셈이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빛과 잘 어우러져 있었고 바람이 불어 끈적임도 없었다.

향로봉을 거쳐 비봉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탕춘대 매표소 방향으로 가는데 등산로 입구는 그냥 동네 마을 길이다. 산 위에서도 동네 길을 지나가는 트럭 장사의 외침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서울은 산과 더불어 형성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은 촉촉하였다. 예전에 간 것 같지만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향로봉 팻말을 보고 가면서도 윗길인지 아랫길인지 자꾸 헷갈렸다. 우리 수준에 맞추려면 팻말이 두 배로 자주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앞서가는 일행이 있어 우리는 그들을 따라갔다.

향로봉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향로봉을 찍고 비봉을 향해 가려니 바위가 있는 윗길로는 갈 수가 없어 다시 내려가야 했다. 나는 '이곳이 향로봉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가지며 능선을 조금 따라가는데 눈앞에 멋진 봉우리들이 펼쳐졌다. 옆에서 이게 비봉, 저게 사모바위라며 나름 아는 체를 했다.

"아닌데? 멀리 보이는 게 비봉이 틀림없어. 진흥왕 순수비가 보이잖아."
"그럼 가까이 있는 것이 사모바위인가?"


우리는 사모바위라 점 찍은 봉우리에 올라섰다. 북한산을 삼각산이라 일컫게 하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한눈에 보이고 다른 방향으로 서울의 내사산인 북악산, 인왕산, 그 사이에 남산이 귀엽게 보였다.

인왕산 옆의 안산도 보이고 남산 멀리 이름이 확실치 않은 다른 많은 산이 보였다. 정말 최근에 보기 드문 쾌청한 날씨였다. 이런 날 집에 있는 것은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는 오늘의 산행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자부했다.

비봉에 도착했다. 표지판을 보니 우리가 사모바위라 생각한 것은 사모바위가 아니었다. 사모바위는 앞으로 더 가야 한단다. 그럼 그건 향로봉이었나?(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점심을 먹은 곳이 향로봉이었고 향로봉은 위험지역이라 출입금지였다.) 비봉은 과연 이름값을 하였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는 중간 지점 이상을 올라갈 수 없었다.

나에게 하늘이 트인 능선 길을 걷는 것은 가슴이 떨릴 만큼 매력적이나 우뚝 솟은 바위를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은 허공의 밧줄을 타는 느낌으로 다리가 후들거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조상들은 무슨 재주와 용기를 가졌기에 그 시대의 신발을 신고 저곳에 비석을 세우고 또 탁본을 떴을까?

비봉 꼭대기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진짜 사모바위로 갔다. 조선 시대 관리가 쓰던 사모를 닮았다 하여 이름이 사모바위인데, 이 같은 작명의 연유를 몰랐던 우리는 계속 오발탄을 던졌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사람들 틈에 끼어 바위를 올라가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대남문만 가면 산행이 끝난다는 생각에 물만 남기고 남은 먹거리로 속을 채웠다.

대남문으로 간다고 하는데 계속 오르막길이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청수동 암문을 지나서 가야 한단다. 도중에 좁은 골짜기에 바위로 지붕을 얹은 듯한 자연 석문을 통과했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승가문이었다. 승가봉을 옆에 두고 놓친 셈이다. 청수동 암문까지의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는데 엘에이의 지그재그 산길 경험의 덕인지 아파트 16층까지를 발로 오르는 습관 덕인지 나에게는 크게 힘든 길이 아니었다.

돌로 만든 청수동 암문에 도착해서 증명사진을 찍고 드디어 대남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산길은 계속 오름 길이다. 다시 바위를 타고 도착해보니 문수봉이란다. 문수봉은 우리 계획에 없는 봉우리였다. 한심한 생각에 문수봉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공사 중인 대남문이 보였다.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대남문에 도착해보니 구기동 계곡 매표소까지 2.5km란다. 다 온 줄 알았던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장난 아니었다. 끝없는 내리막길이면서 바닥은 온통 울퉁불퉁 바위에 가까운 까다로운 돌길이었다. 가끔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곳을 어찌 올라가나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비가 온 뒤라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여기저기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긴 산행과 예상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능선 길과 최고의 날씨 속에서 우왕좌왕 산행을 끝내니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갔다.

미국 엘에이에 살다 본격적으로 한국에 살기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못 되는 시점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사람들에게 좋다는 말만 들었지 아직 못 가본 곳, 전에는 몰랐던 전혀 새롭게 개발된 곳, 예전의 추억으로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 등 아직 가야하고 보고 싶은 곳이 넘쳐난다. 북한산은 예전에 제법 다녔던 추억이 어린 곳에 속했지만 막상 가 보니 기억과 실제가 전혀 다른 새로운 곳이었다.

산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국 사람들은 엘에이에서도 산에 많이 다닌다. 그러나 적어도 30~40km를 운전해 가야 하는 메마른 엘에이 산에 비하면 산 이름을 가진 지하철역이 많을 정도로 서울의 산들은 시민들에게 편하게 다가온다. "다리 떨리기 전, 가슴 떨릴 때"라는 어느 여행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아직 힘이 있을 때 그리고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우왕좌왕 헤매면서 계속 산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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