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 코스프레'가 내 삶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

[내가 퇴근 후에 하는 것들] 요리, 가장 중요한 것들을 미루지 않기 위한 각오

등록 2019.07.03 08:55수정 2019.07.0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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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만큼 노동하고 남은 시간, 코바늘을 뜨거나 불어를 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주거나 당장 쓸모가 되지 않는데도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를 품고 열정을 키워갑니다. 오늘의 퇴근과 내일의 출근, 그 사이에서 나의 시간을 치열하게 붙잡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편집자말]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8시였다.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곧장 향해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궁리하며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점점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사적으로 시선은 싱크대 하부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5분 대기조처럼 출격 준비 중인 인스턴트 라면이 있다. 물 끓이는 데 1분, 익히는 데 4분 정도면 되니 편리하게 배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어 면이 별로 당기진 않은 데다, 며칠 전에 제철이라며 사둔 양배추가 아른거렸다. 처음 살 때보다 색이 선명하지 않은 걸 보니 오늘 지나면 못 먹고 버릴 공산이 크다.
   
고민을 멈추고 냉장고 채소 칸을 열었다. '나 이제 한계야' 하며 손을 흔드는 양배추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가늘게 썰고, 한쪽으로는 전날 삶아둔 달걀을 까서 으깼다. 마요네즈, 홀그레인머스타드, 파르메산 치즈 가루, 후추를 넣고, 채 썬 양배추와 으깬 달걀을 함께 버무린 뒤 오븐에 구운 식빵에 얹었다. 그렇게 양배추 샌드위치가 뚝딱 완성됐다. 다 먹은 그릇을 씻고 소파에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도 잘 해 먹었다.

퇴근 후 주방 앞에 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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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극중 김태리가 만들어 먹은 양배추 샌드위치(사진은 영화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퇴근 후에 별일이 없으면 주방 앞에 선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야심 차게 요식업계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는 아니다. 하루 한 끼는 직접 만들어 먹기를 실천 중이다. 빠르고 강렬하게 허기진 배와 미각을 만족시키지만 그릇을 비우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혼곤해지는 즉석식품은 제외다.

번거롭고 느리더라고 제철 채소를 쓰고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 비타민과 미네랄까지 고려해 조리하려 노력한다. 최근 저녁에 자주 만들어 먹은 요리는 들깻가루를 뿌린 시금치 무침, 명란아보카도비빔밥, 병아리콩 샐러드, 감자 수제비, 콩국수. 먹고 나면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보람을 주는 음식들이다. 양배추 샌드위치도 그중 하나다.

하루 세끼에 식구들 먹을 밑반찬과 주전부리까지 매일 쉼 없이 준비하는 주부들이 들으면 소꿉놀이하냐고 코웃음 치실지도 모른다. 남편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김태리 코프스레' 하냐며 놀리곤 한다. 부끄럽지만 내겐 혁명적인 변화이자, 매번 귀찮음과 무기력에 맞서며 도전해야 하는 과제다.
 
사전은 요리를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음식을 직접 해 먹어야 할 때면 식재료에 걸맞은 조리법을 거의 생략하거나 제멋대로 변형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외식으로만 연명한 결과, 3개월 만에 몸무게가 12kg이나 불었다. 균형 잡힌 식사를 위해 집밥을 만들어 먹자고 각오하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몸에 좋은 단백질과 오메가3를 함유한 생선을 먹어보기로 했다. 문제는 생선을 굽거나 튀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토막 낸 연어를 끓는 물에 데쳤다. 강렬한 비린내가 수증기를 타고 공기 중에 퍼졌다. 생선의 미끌미끌한 표면을 한 번쯤은 씻어내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날 나는 물에 불어 흐물거리는 연어 살코기를 간장에 찍어 즉석밥에 얹어 먹었다. 펄떡거리는 연어 한 마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것 같은 비릿한 냄새가 입안 전체에 진동했다. 갓 잡은 물고기를 뜯어먹는 북극곰을 바라보듯 뒤에서 조용히 나를 응시하던 홈메이트 언니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파괴적인 레시피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후에도 계속됐다. 한 번은 회사 부서 엠티 때 고기와 함께 구워먹을 새송이버섯을 자를 일이 있었다.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길쭉한 버섯을 가로로 놓고 오이를 어슷썰기 하듯 동그랗게 자르기 시작했는데, 요리 좀 한다는 남자 선배가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구워먹을 버섯을 이렇게 썰면 어떡해! 넓고 평평하게 썰어야지. 너 버섯 한 번도 안 썰어봤어?"
"네."
 

선배는 재앙을 마주한 표정으로 칼과 도마를 내게서 뺏어가더니 나머지 버섯을 손질했다. 지금 와서 변명하자면 그때는 요리가 애써 배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끼 음식을 차려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꼭 필요하지만 쉽게 밀려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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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커피 원두를 직접 갈아 드립 커피도 내려 마시고, 요리책 레시피를 응용해 인절미바나나샐러드 같은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 이주영


중·고등학교 가정 과목 시간에 깍뚝썰기 같은 재료 다듬는 법을 교과서로 배운 기억은 있지만, 그마저도 시험을 대비해 벼락치기로 외웠지 실제로 부엌에서 실습해본 적은 거의 없다. 직접 식칼을 들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이 입시가 지상과제인 대한민국 학생의 덕목이었다.

그 시절 나는 엄마와 여성 급식노동자들이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더 나은 대학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교실 책상에서 보냈다. 딸의 아침 식사는 물론이고 주말마다 교복까지 손수 빨아 다려주던 엄마는 내가 어쩌다 설거지라도 하려고 팔을 걷으면 손사래치곤 했다.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말고 살아."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취업이라는 당면 과제로 주방에 설 생각을 못했다. 날 생선의 비린 맛을 봤다면 한번쯤은 요리를 배워야 하나 고민할 법도 하지만, 그만큼의 여유도 마음에 허락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번에는 더 나은 직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여전히 시간을 더 생산적이고 중요한 데 써야 했다.

직장에 들어가 결혼하고 출산한 후에는 일하고 애 키우고 부족한 잠을 채우기 바빠 하루에 한 끼조차 차려 먹기 어려워졌다.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 뒤늦게 요리를 하게 된 건 약 2년 전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직장맘인 나는 그무렵 친정 옆으로 이사했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하원 도움을 받는다는 명분이었다. 당신 집 살림에 딸 집 살림까지 돌보던 엄마는 결국 병이 났다. 병원에서는 암일 수 있으니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먹고사는 일을 더는 엄마에게 의존할 수 없었다.

나는 퇴근 후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가기 시작했다. 요리책을 보며 본격적으로 칼을 다루고 불을 쓰는 법을 익혀갔고, 나보다 요리에 능숙한 남편에게 음식을 만들 때 지켜야 할 기본 수칙을 배웠다.

처음에는 아이 먹을 음식만 겨우 만들고 어른 밥은 거의 외식으로 때웠지만 익숙해질수록 점점 집밥을 차려먹는 횟수가 늘어갔다. 최근 육고기를 끊기로 결심하면서부터는 주 서너 번 하던 외식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급격히 줄었다.
  
이제는 냉장고 속 식재료를 보면 어떤 국과 반찬을 만들 수 있는지 떠올릴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커피 원두를 직접 갈아 드립 커피도 내려 마시고, 요리책 레시피를 응용해 인절미바나나샐러드 같은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생선을 물에 데쳐 먹던 시절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킬 줄 아는 삶을 위하여

처음에는 단지 엄마 없이도 먹고살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게 목표였다. 지금은 엄마의 건강이 호전됐지만 나는 더 자주 요리하려 노력한다. 삶은 유명한 대학이나 큰 회사 같은 거창한 성공으로 완성되는 게 아님을, 먹고 자고 생활하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의식주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하루에 한 끼도 제 손으로 차려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랬다. 먹는 건 살기 위해 필요한 일임에도,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일들로 인해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야 만다.

회사 일이 고된 날에는 자기 전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곤 한다. 시골의 낭만이 탐나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극중에서 귀촌한 김태리의 여유가 아니라 삼시 세끼를 차려 먹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김태리의 용기가 부러운 것이었다.

더 많은 돈, 더 안정적인 직장이 곧 정답인 세상에서 책상이 아닌 부엌 앞에 서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100세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걸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냉장고 문을 연다.

더는 미래가 불투명한 자기계발과 성공신화를 위해 삶의 기본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싶진 않다. 요리는 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변두리로 미뤄두지 않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다.

아이에게 딱 하나 가르쳐줄 수 있다면 나는 고민 없이 요리를 택하겠다. 자신의 삶이 하찮아지는 느낌이 들 때 주방 앞에 서서 가스 불을 켜고 도마를 꺼내 끓이고 썰고 볶아 한 끼를 차려낼 수 있는 능력이 내 딸에게 있기를,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곁에 두고 지킬 줄 아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고, 나의 공간을 깔끔히 정돈하고, 따뜻한 밥 한 끼 지어먹는 일상. 내가 퇴근 후에 굳이 의지를 벼리며 주방 앞에 서는 이유다. 나의 오늘을, 시시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오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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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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