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팔아' 정교사 꿈 이룬 후배 교사

이 글은 교사들 사이의 불문율을 깬 뒷담화다

등록 2019.07.15 07:44수정 2019.07.1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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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범한' 교사로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생활인'이 됐다.(사진 속 교실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 연합뉴스

 
교사들 사이에선 불문율이 하나 있다. 같은 혈육이라면 모를까, 동료 교사의 교육 방식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의 교육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학교 내에서 일종의 금기다.

개인적으로, 교사들 사이의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야말로 학교 현장의 변화가 더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교원평가 항목 중 동료 교사 상호 평가가 형식적인 것도 그래서다. 만약 상대평가 방식을 적용한다면, 그저 교사들 간 친소 관계를 묻는 평가로 전락할 게 틀림없다.

이 글은 불문율을 깬 '뒷담화'다. 욕먹을 각오로 '변절한' 후배 교사 이야기를 할 참이다. 물론, 그의 이름과 그가 근무하는 학교를 밝힐 수는 없다.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교사로서 그와 같은 노정을 밟아온 이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본다.

'교육이 변해야 나라가 산다' 좌우명 삼은 열혈 청년

그는 또래들 중 누구보다 치열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교육이 변해야 나라가 산다'는 걸 좌우명 삼아, 대학가에 집회 문화가 시들해져가는 세태 속에도 교육 관련 집회라면 부러 찾아다닐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당시 그는 이를 예비 교사로서의 숙명이자 소명이라고 표현했다.

사범대생으로서 교사가 되기 위한 임용시험 준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학과 내에 정기적으로 만나 시험 정보를 공유하는 소모임을 주도적으로 꾸렸고, 분초를 쪼개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변함없이 도종환의 시에 곡을 붙인 '어릴 적 내 꿈은'이었다.

참고로, '어릴 적 내 꿈은'은 교사가 되면 늘 약자의 편에 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보듬으며, 험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에게 기꺼이 징검다리와 지팡이가 되겠다는 내용이다. 교사를 꿈꾼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품었을 다짐이다. 그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무슨 주문처럼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의 교문 밖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4년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건만, 사회는 그를 환대해주지 않았다. 임용시험에 번번이 낙방했고, 예비 교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감은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수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며 열정만으로 교사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인사권자 심기 건드리면 안 된다는 처절한 깨달음

노량진에서의 생활이 길어지자 그는 당장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정과 소신은 경제적 궁핍을 당해내기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는 고향의 한 사립학교에서 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임용시험 준비와 병행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계약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은 교사가 천직임을 새삼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가까워질수록 임용시험 준비에는 그만큼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수업을 준비하는 것과 임용시험은 정확히 반비례 관계였다.

아이들과 만나는 게 마냥 즐거웠고 수업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동료 교사들과의 술자리도 아까워할 만큼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로부터 자상하고 실력 있는 선생님이라는 인정도 받았다. 아이들에겐 최고의 선생님이었지만, 그럴수록 임용시험은 기억 속에서 멀어져만 갔다.

매사 열정적인 그를 아이들은 물론, 여러 동료 교사들도 대견스러워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만, 생사여탈권을 쥔 관리자들은 초임교사인 그의 '올곧은' 교직생활을 탐탁찮게 여겼다. 교무회의 때마다 입바른 소리를 서슴지 않았던 그는 어느새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그의 교직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만에 그는 '잘렸다'. 재계약을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인사권자의 마음에 들도록 눈치껏 처세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순진한' 그는 적어도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재계약 해지 통보에 그는 황망해했다. 수업을 잘하고, 업무에 능숙하며, 아이들에게 인정받으면 정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내심 품었다고 했다. 자신처럼 한두 해 기간제 교사를 하다가 정교사로 임용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그의 재임용 탈락은 함께 근무했던 다른 기간제 교사는 물론, 정교사들에게도 인사권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강력한 신호로 작용했다. 임용시험을 거쳐 공립학교로 갈 게 아니라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교사를 꿈꾸는 이들에겐 희망 고문의 시작이었고, 언감생심 개인적인 소신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정든 학교를 나오며 그는 지난 2년의 삶을 후회했다. 일단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한 것이다. 정교사가 되어 신분이 안정된 후라야 교육자로서의 소신과 철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몸을 철저히 움츠리기로 했다.

운 좋게도 그는 곧장 새로운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었다. 이번에도 지방의 사립학교였고, 첫 출근부터 동료 교사들로부터 희망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정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기회가 있을 거라는 격려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동료 교사들이 조언해준 대로 인사권자는 물론 힘깨나 쓰는 중견 교사들과 그들 가족의 경조사까지 꼼꼼히 챙겼다. 아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다만, 수시로 '위'를 쳐다봐야하는 처지에서, 정작 수업 준비와 생활지도에 '올인'할 여유가 없었다.

또다른 족쇄가 된 정교사라는 '벼슬'

그는 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정교사가 됐다. 비록 '간이고 쓸개고 다 빼야했던'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최소 수천 만 원의 뇌물 없이는 교사로 발령받기 어렵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위안 삼았다. 마음의 짐으로 남은 게 있다면, 인사권자를 향한 헌신은 원래 아이들에게 가야 할 것이었다는 점이다.

가슴 속 깊이 감춰두었던 꿈을 펼칠 기회가 왔는데도, 움츠렸던 몸이 쉬이 펴지지 않았다. 정교사가 됐으니 이른바 '문턱세'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인사권자에게 감사의 표시도 하고, 선배 동료 교사들 앞에서 '신고식'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지만,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정교사라는 '벼슬'은 기간제 교사 때와는 다른 의미의 족쇄가 됐다. 비록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누구 덕에 됐느냐'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인사권자는 물론,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정교사가 됐지만, 기간제 교사 때와는 또 다른 처세가 요구됐다. 조직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대한민국 교육 현실의 모순은 지적하긴 쉬워도, 학교 내의 비일비재한 비리는 알고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기간제 교사는 계약 해지의 위험 때문에, 정교사는 조직의 배신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침묵을 강요당한 셈이다.

'40대에도 혁명을 꿈꾸는 자는 바보'라는 한때 열혈청년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는 어느새 교직 경력이 두 자릿수인 중견 교사가 되었다. 기간제 교사 시절 그가 보여준 기백과 패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나 혼자 떠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다.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도 흥겨운 요즘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평범한' 교사로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생활인'이 됐다.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로부터 나름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살아가고 있다. 사범대생 시절 지치고 힘들 때마다 불렀다는 '어릴 적 내 꿈은'의 노랫말을 과연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며칠 전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20대에 혁명을 꿈꾸지 않은 자는 바보고, 40대에도 혁명을 꿈꾸는 자 또한 바보다.' 모르긴 해도, 대학 시절 그였다면 가장 혐오했을 금언인데, 마치 자신의 소신인 양 말하는 게 무척 낯설고 서글펐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대학 시절의 이상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주식과 부동산 시세에 쏠려 있었고, 큰아이를 자사고에 보내야하는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명색이 부모가 교사인데,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는 게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대꾸했더니, 되레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눈을 흘기기도 했다.

얼마 전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시험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가르치는 과목도 아니고 학년도 달라,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그가 사건에 연루됐을 리는 없다. 하지만, 학교 내에서 버젓이 일어난 범죄 행위를 과연 그는 몰랐을까. 그의 무뎌진 정의감이 '침묵의 카르텔'을 방조한 건 아니었을까.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요즘, 누구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외쳤다지만, 천신만고 끝에 취직한 곳이 불의가 판치는 소굴이라면? 그와 술자리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는 있어도, 같은 교사로서 나눌 수 있는 고민거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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