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멧돼지와 대치 중

과연 고구마는 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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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석(kshong25)등록 2019.08.19 10:07
우리는 여전히 멧돼지와 대치 중
과연 고구마는 무사할까?
 
숙지원은 비록 빼어나게 아름다운 정원은 아니지만, 겨울이 가기전 홍매로부터 시작한 꽃들은 언어로 묘사하기 어려운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잠시 자랑하다 조용히 지고, 해마다 몸집을 키우는 나무들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과일과 향기를 남기는 작은 공간이다.
또 우리가 일용할 마늘 고추 참깨 양파 더덕 도라지와 계절별로 호박 가지 오이 상추 등 채소들의 텃밭이 우리의 건강한 밥상을 지켜주는 공간이다.
현재 처지를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다독이며 내일을 다짐하는 나만의 공간에 가끔은 멧돼지와 고라니라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넘보기도 한다.
 
소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오직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
농약을 하지 않으니 벌레가 먹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변변한 울타리가 없으니 새나 멧돼지가 와서 먹는다고 해도 막을 길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불청객들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
산과 접한 동편의 철쭉 울타리 사이사이에 패트병을 매달아 보기도 했고, 멧돼지가 다니는 길에 말목을 박아 이중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 봄 철거해버렸다.
주변에 전기 철조망이나 펜스를 설치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보기 좋은 철쭉 생울타리가 있는 터에 다시 돈을 들여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도 아름다운 풍경은 아닐 것 같고,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너그러움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악스럽게 보일 것도 같아 설치하지 않았다.
다만 멧돼지가 다녀간 후에는 읍사무소에 연락하여 피해 사실을 알리는 정도의 조치만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읍사무소에서 연락을 받은 지역의 포수들이 몇 차례 다녀갔으나 이후에도 멧돼지의 출몰은 멈추지 않았다.
지역의 포수들은 정부에서 금렵구역의 사냥 허가를 내줄 때 허가 구역을 시·군단위로 제한하지 말고 도 단위로 넓혀 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몇 개 군이라도 묶어 허가해주기를 바란다는 불만을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지역도 산줄기가 이웃의 화순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멧돼지에게 사람이 정한 경계를 지키라고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사실 멧돼지로 인한 피해는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밭작물뿐 아니라 과수원을 덥치기도 하는데 과일 피해도 그렇지만 과일나무 가지를 꺾거나 뿌리를 파헤쳐 아예 몇 년간 수확이 불가능하게 해를 끼쳐 농민들을 좌절케 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멧돼지 등 유해조수로 인한 피해 보상은 농협에서 실시하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한 정부나 지자체의 보상은 박한 편이다. 현재 정부의 보상은 밭작물의 경우 3백 30제곱미터(약 1마지기)이 되어야 일부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거의 피해를 당한 농가의 책임으로 끝나는 현실이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지난 7월 22일, 금년 들어 멧돼지의 첫 방문이 있었다.
조용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한 판(약100개)의 모종을 두 이랑에 심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데 살짝 덜 여문 옥수수밭을 쓸어버린 것이다.
다 먹지도 않으면서 쓰러뜨린 옥수수까지 세어보니 절반 이상이었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옥수수 차를 만들고, 말린 옥수수 알은 뻥튀기하여 겨울철 간식으로 하겠다는 소박한 꿈이 물거품 된 사실도 그렇지만 옥수수 옆의 익어가는 참깨들이 애꿎게 당한 안타까움도 컸다.

뚜렷하게 남기고 간 발자국이 제법 큰 것으로 봐서 작은 멧돼지는 아니었다.
일단 사진으로 현장 채증을 끝내고 참깨밭에 넘어진 옥수수를 대강 치운 후 읍사무소에 전화를 했더니 이전처럼 포수한테 연락하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그러나 포수가 달려온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멧돼지를 당장 잡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 자력구제의 수단과 방법을 찾아 조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인터넷을 찾았더니 크레졸 냄새를 멧돼지난 고라니가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설치방법이나 설치 비용 면에서도 부담이 적을 것 같아 바로 읍내 약국으로 달려가 구입하여 멧돼지가 이용했던 개구멍은 검은 차광막으로 막고 옥수수와 고구마밭 주변에 지주대를 세워 크레졸 병을 매달았다.
남은 옥수수와 고구마를 지킬 수 있다면 푸른 고구마밭과 붉은 크레졸 병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정취를 따질 일은 아니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다음날 새벽 옥수수밭과 고구마밭부터 살폈더니 의외로 탈이 없었다.
이슬 묻은 잔디 길에 멧돼지 발자국이 보이고 멧돼지가 들어온 길까지 찾을 수 있었음에도 피해가 없다는 사실은 크레졸의 효과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크레졸을 세병 더 구입하여 멧돼지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길에 설치하였다.
읍사무소에서 소개한 포수는 사흘 후에야 도착했는데 크레졸의 효과도 일시적일 뿐이라며 개를 키우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미 칙칙한 녹음속으로 숨어버린 멧돼지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알기에 찾아와준 성의만으로 고맙게 여겼을 뿐이다.
며칠간 멧돼지의 방문이 없어 남은 옥수수도 익어 수확했더니 예년의 3분의 1정도인 60개 정도 거둘 수 있었다. 아내는 몇 번 쪄먹을 양을 남기고 햇볕에 말리겠다고 했다.
또 쓰러진 참깨도 베어 야무지게 깻단을 만들어 널었다.
아내는 아침마다 수확한 가지를 큼직하게 썰어 말리고 빨갛게 익은 첫물 고추도 말리기 시작했다.
잠시 멧돼지 걱정을 잊었던 며칠간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잠깐이었다.
8월 6일 새벽, 아내의 놀라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더니 장독대를 지키는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크레졸 병에 둘러싸인 고구마밭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채 자라지 않은 감을 노린 소행이 분명했다.
독을 깨뜨리지 않은 점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크레졸병을 멧돼지의 길목에 설치하고 다음 날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7일 새벽에는 더 굵은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있고 가지에 달렸던 감은 흔적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감나무에 크레졸 병을 매달았다.
8일 새벽, 멧돼지가 지나간 흔적은 보이는데 피해는 없었다.
9일 새벽에는 눈을 뜨자마자 감나무부터 살폈더니 장독대 아래 진디밭에 빨간 크레졸 병이 뒹굴고, 감나무에는 먹다 둔 감도 보였다.
직접 관찰하지 않는 한 동물의 이야기는 어차피 보고 들은 경험을 참고로 정황에 의지한 소설일 수밖에 없다.
추정컨대, 배가 고팠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크레졸 병이 에워싼 고구마밭에 접근하지 못했던 멧돼지는 눈여겨 둔 감나무를 털기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크레졸 병이 달린 가지를 피해 옆 가지를 흔들었는데 헐거웠던 병이 떨어지면서 크레졸이 쏟아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을 것이다. 단단히 매지 않은 나의 실수가 멧돼지를 놀라게 했던 셈이었다.
씁쓸하게 물러났을 멧돼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고소한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사람 사는 곳까지 내려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했을까 싶은 멧돼지의 처지를 생각하니 당장 이겼다고 웃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소개되는 반려동물들과 사람들의 교감을 보면서 지상의 동물 중에는 희로애락을 표현할 줄 아는 감정을 가진 존재들도 있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산속에 숨은 멧돼지와 친화적인 만남은 기대할 수 없으니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래도 우리 이야기를 듣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내 것의 일부를 나누어 먹겠다는 말을 쉽게 했지만,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는 사람의 포기에 가까운 합리화요 시혜를 베푼다는 오만한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
숙지원 주변의 산에서 멧돼지와 고라니는 물론 담비도 만난 적이 있는데 의외로 동물 친화적인 자연환경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숙지원을 찾는 지인들에게도 이곳의 반디불이와 다양한 야생 조수가 생존하는 환경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나는 특히 멧돼지의 개체수가 너무 많아졌다는 생각을 한다.
늘어난 개체수로 인해 먹이가 부족한 멧돼지들은 수시로 농부들이 가꾼 농작물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데 특히 7월부터 가을 산 열매들이 익기 전까지는 멧돼지들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가 심한 기간이다.
정부는 농작물의 피해를 농민들의 운수소관으로 돌리지 말고, 정부와 지자체가 앞장서 산짐승들의 먹이를 공급해주거나 아니면 멧돼지의 개체 수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리고 멧돼지들의 영역에 들어가 도토리 등 조수들의 먹이를 약탈하는 사람들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5일 새벽에도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비닐하우스 남쪽 감나무를 건드리고 갔는데 큰 피해는 없었으나 오후에 크레졸 병을 추가로 후미진 곳에도 더 설치하였다. 그것 때문인지 16일과 17일 아침에는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18일) 새벽, 장독대의 감나무 밑에는 많지는 않지만, 잎이 제법 흩어져 있었다. 멧돼지는 숨겨진 크레졸 병을 못 본채 가지를 흔들었다가 냄새를 맡고 풋감은 먹지 못하고 퇴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숙지원의 곳곳에 지뢰처럼 설치해놓은 빨간 크레졸병을 본다.
지난해는 고라니들이 새순을 먹어치우는 바람에 밑이 들지 않아 실뿌리 같은 고구마를 보며 허망했는데 금년에는 멧돼지와 먹이를 놓고 다투는 꼴이 되었으니 조금은 맹한 웃음이 나온다.
과연 크레졸의 냄새가 고구마를 지켜줄 수 있을는지?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매달린 크레졸 병이 사람과 멧돼지의 대치 혹은 긴장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보이는, 아무튼 편안한 정원과 어울리지 않은 풍경이다.

참, 관찰 결과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크레졸 병을 설치 후 갑자기 벌들이 줄고 호박과 오이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크레졸 냄새가 벌의 활동을 막은 것 아니냐는 생각인데 경험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2019.8.18.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대직방에도 올릴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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