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세상의 '법정'에 선 현직 판사... "내가 증거다"

[리뷰] 판사에 대한 편견을 깨는 책,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등록 2019.09.06 08:41수정 2019.09.0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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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갈비뼈가 13개라고 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그렇게 마구 때렸고,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둬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동거남과 함께 지냈다는 사연도 알려졌다. 목격자도 넘쳐났다고 한다. 2006년 1월, 이 소식을 접한 세상은 그를 '패륜 며느리'로 지칭했다.

수많은 손가락질을 받던 그가 법정에 나타났다. 행색이 초라했고, 말투가 어눌했으며, 한쪽 다리를 절었다고 했다. 게다가 평소 퉁명스러워 주변 이웃들이 다 그를 싫어했다고 하니 "패륜 며느리 역에 이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이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이 사건의 1심을 맡았던 박주영 판사의 회고다.

그는 무죄를 선고했다. 변호인 도움으로 선입견에 가려 있던 증거들이 모습을 나타냈고, 이웃들 진술에도 편견이 작용했음이 드러났다. 울산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박주영 판사가 최근 내놓은 <어떤 양형 이유>(김영사)의 한 대목이다. 당시 무죄를 판결한 이유를 밝히면서 그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건은 대부분 기록이 얇다"고 적었다.

분노... "부도덕한 기업에게는 징벌적 책임 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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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 ⓒ 김영사

 
속된 말로 '깨는' 책이다. 권위주의로 상징되는 판사에 대한 편견 혹은 선입견을 여지없이 깬다.

"포청천을 연상시키는 어감이라 카리스마도 있다"며 스스로를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으로 소개한다. 법정을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도축장"에 비유하며 법관을 "발골사"라고 표현하거나, "석공, 용접공, 미장공이나 미싱공, 시계공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단정하는 문장도 인상적이다. 베토벤은 숲 속을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렸다는데, "나는 (산책하며) 바바리맨이나 조희팔 꿈나무들이나 생각한다"는 대목은 '웃프다'.

분노 또한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상대는 '조희팔 꿈나무'들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각종 산재사고, 환경오염, 식품범죄, 제조물로 인한 소비자 피해 등이 무한반복 되는 이유는, 아무리 많은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아무리 많은 살인 가습기살균제를 팔아도, 아무리 차에서 불이 나도, 아무리 많은 배가 침몰해도 형벌과 손해배상이 언제나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회사가 가장 값싼 사람을 가장 위험한 일에 투입하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강자와 주류는 아무리 떠밀어도 법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다"까지 읽다 보면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해진다. 그건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의 죽음을 용인하며 이윤만을 추구하는 연 매출 수 조 원의 대기업에 가해지는 형벌이 고작 벌금 1000만원이 전부인 이 나라"다. 결론 또한 명징했다. "부도덕한 기업에게는 손해배상과 더불어 징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교수의 성추행 재판 과정을 전하면서 "'이런 모습이 피해자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폭력적 은유"라거나 "'(피해자가) 내가 증거다'라고 말하는 건 레토릭(수사)이 아니다"고 확언하는 대목에서도 분노가 읽힌다. 심지어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시하며 판사인 자신이 "증거"라고 밝히기도 한다. 소년부 판사로 근무했던 시절을 돌아봤을 때다.

슬픔... "누군가의 천국이 공고해질수록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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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판사가 최근 내놓은 책 <어떤 양형 이유> ⓒ 김영사


"인사철마다 두 박스 가득 옮겨다니는 메모가 있다. 소년 재판 메모다. 내가 이 메모를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의 비행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른들의 악행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중략)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어른들과 우리 사회의 악행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내 분노를 그 메모에 잘 재워두었다. 적어도 이 사건들에서만큼은 내가 증거다."

그리고 소년범 22명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한다. 어릴 때 큰 아빠에게 성폭행당한 아이, 친구를 추행한 아빠에게 충격을 받은 아이, 갑자기 나타나 할머니 기초생활수급금을 가져가 버린 아빠 등 사연이 열 페이지에 걸쳐 소개된다. 아이들의 비행, 나이, 가명, 그리고 그들의 사연과 재판 결과 등 사실 관계만 짤막짤막하게 전하고 있기에 오히려 저자의 분노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슬픔 또한 짙게 나타난다. 저자는 "누군가의 천국이 공고해질수록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되어갈 때,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되어 가는데 누군가의 천국은 더욱 공고해질 때, 그런 결과에 부역해야 할 때" "나는 슬펐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책에 분노나 슬픔만 흐르는 건 아니다. <더 헌트>,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공각 기동대>, <스포트라이트>, <노트북> 등 저자가 자신의 양형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영화가 꽤 많이 등장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마무리투수가 9회말에 5점을 날려버려 역전패"를 하는 경우에 가끔 이성을 잃는다고 전하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 판사로 욕먹느니"
  
이렇게 책에서는 저자의 분노, 슬픔, 즐거움 등이 비교적 잘 읽힌다. 다만 '희(喜, 기쁨)'라는 감정은 잘 안 드러나는 편이다. 재판의 부실화를 초래하는 구조적 원인을 상술하며 "우리는 덫에 걸렸다"고 확언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오늘도 5분 재판을 하며 자책감에 시달리는 많은 판사가 있다"면서 이렇게 적어나간다.

"우리는 덫에 걸렸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재판의 부실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덫이다. 물론 불신의 주된 책임은 법원에 있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으면 법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안타깝다."

판사는 재판을 한다. 그 재판을 두고 또 사람들은 판사를 '재판'한다. 그의 표현대로 "판사에 대한 다양한 욕을 졸이고 졸인다면", 그건 "결국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로 귀결된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라고 확언했다. "판사로 욕먹느니 재판공으로 칭찬 받고 싶다"는 그의 바람 또한 "정의의 원래 주인이자 이 글의 최종심인 독자들께 감사드린다"는 마지막 문장과 온전히 통한다.

책을 덮으면서 '판사 박주영'을 세상의 '재판정'에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이 책 전체가 저자 스스로 최종적으로 정리한 '(자신의)양형 이유'가 되는 셈이다.

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은이),
김영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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