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제사' 선언한 시어머니의 속마음, 듣고 놀랐다

명절 문화 바꾸려는 여성들을 옥죄는 감정 '죄책감'

등록 2019.09.15 20:22수정 2019.09.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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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러는데 이번 추석부터 차례를 안 하기로 하셨다는데?"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지난 월요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시가에서 명절 때 지내는 차례와 두 번의 제사는 지난 결혼 생활 13년간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본인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으시지만, 늘 "제사는 정성이 젤 중요하다"고 조언하던 시아버지. "제사를 푸짐하게 잘 해야 자식이 잘 된다"며 철썩 같이 믿고 계시던 시어머니. 두 분에게 명절 차례는 무척이나 중요한 행사였다.

시어머니는 매년 명절 때마다 '푸짐함'과 '정성'을 몸과 마음을 다해 실천하셨다. 가장 크고 예쁘게 생긴 과일들만 차례 상에 올렸고, 전, 탕, 나물, 고기 등 모든 음식들은 식구 수보다 훨씬 넉넉하게 준비하셨다. 목기에 음식을 담을 때도 늘 "수북하고 예쁘게 담아라" 하시던 분이었다.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추석 전날. 시가에 도착해서야 시어머니의 선언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었다. 정말로 예전과는 주방 분위기가 달랐다. 매 명절마다 주방 한쪽에 꺼내두시는 제수용품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 가족들이 좋아하는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몇 가지 밑반찬을 꺼내 점심을 먹었고, 오후엔 전을 부치는 대신 온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했고, 저녁은 외식을 했다.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던 시간은 이야기로 채워졌다. 연휴 동안 시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시작해야 변할 수 있다


"어머니, 정말로 이번 추석부터 차례 안 지내는 거예요? 2주 전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만 해도 그런 말씀 안 하셨는데 갑자기 결정하신 이유가 뭔가요?"
"언젠간 제사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은 늘 하고 있었어. 이게 너무 품도 많이 들고, 여자들만 고생하는 것도 맞고. 나까지만 하고 너희들은 하지 말아라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요?"
"근데 내가 안 해야지 너희들도 안 하게 된다고 하더라고. 주변에서 보니까 시어머니가 결단을 내려야 자식들이 제사를 안 이어받는다고들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언제쯤 그만하자고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 시누네도 제사를 안 하기로 했다는 거야. 거기도 시아버지가 엄청 보수적이거든. 근데도 이번부터 안 하고, 가족끼리 다 같이 밖에서 밥 사먹고 민속촌에 놀러가기로 했대. 나한테도 네 시누가 '엄마도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는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

"아버님이 쉽게 수긍하신 것도 신기해요."
"너희 아버지도 텔레비전 많이 보니까 요즘은 명절 때 차례 안하고 가족끼리 재밌게 보내는 집이 많다는 걸 알았던 게지. 또 나이 드시면서 내 뜻을 많이 존중해 줘. 예전하고 달라지셨어. 이번에도 '내가 무슨 힘이 있나. 당신이 알아서 해' 이러시더라고."


시어머니는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을 잘 읽고 계셨다. 전통적인 명절 문화가 여성들에게 과도한 압박이 되어왔던 것도, 그런 압박을 후세에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변화를 미루기보다 스스로 '실천'하기로 하신 거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닌가?
 

추석날 아침. 탕국을 끓이는 대신 시어머니랑 커피를 마셨다. 시어머니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에 연민이 느껴졌다. ⓒ Pixabay

 
추석 날 아침. 차례상을 차릴 필요는 없었지만, 시어머니와 나는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 시간. 우리는 나물을 무치고, 탕을 끓이고, 생선과 고기를 굽는 대신 거실 소파에 커피 한 잔을 들고 마주 앉아 조용조용 대화를 나눴다.

"어머님 추석 아침인데 우리 차례 안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좋죠? 저는 편하고 좋은데 어머님은 기분이 어떠세요?"
"사실, 난 좀 기분이 이상해. 몸은 편한데 며칠 전부터 마음이 좀 그렇긴 하더라고. 명절 때 이것저것 안 하니까 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허전하기도 하고. 지금도 좀 이상해."

"정말요?"
"어른들이 예전부터 그랬잖아. 조상을 잘 모셔야 자식들이 잘 된다고. 내 시어머니도 늘 '네가 제사를 잘 모셔야 자식들이 잘 된다' 그러셨거든. 결혼하고 42년 동안 제사를 모셨는데 그때마다 사실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안 힘드셨다고요?"
"자식들 잘 된다니까. 그 생각에 더 열심히 했지. 42년을 하던 걸 갑자기 안 하니까 막상 편하기 보단 마음이 불편해. 지금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차례 안 한다고 자식들이 잘못되는 것도 아닐 텐데. 와서 편안하고 즐겁게 있다 가는 게 더 좋은 걸 알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죄송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시어머니도 나처럼 홀가분할 것이라 믿었던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시어머니에게 제사문화는 모성으로 연결됐다. '모성'과 연결시킬 수 있었기에 시어머니는 가부장제의 불평등이 모두 녹아 있는 제사를 힘들다 생각하지 않으셨던 거다.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오셨고, 이제 자식들을 위해 제사중단을 선언하신 시어머니. 하지만,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해왔던 것을 해 오셨던 것을 그만 둔 시어머니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만히 그 마음을 헤아려보니 충분히 공감이 됐다. 내가 억울하면서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해왔던 독박 가사를 내려놓고 남편과 분담하기 시작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바로 '죄책감'이었다.

내가 도맡아야 할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사고는 보다 평등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때 자꾸만 죄책감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가부장적 불평등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중인데  42년간 제사를 모신 시어머니야 오죽할까. 시어머니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에 연민이 느껴졌다.

불편해도 이게 나은 방향이야

추석 아침. 가족이 둘러 앉아 아침 식사를 했고, 우리 가족은 친정식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향했다. 그 사이 시어머니는 근처 성당에서 합동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조상들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서울에서 하룻밤 묵은 나는 추석 다음 날 대구인 우리 집으로 내려가면서 시가인 대전에 다시 한 번 들러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시어머니는 다시 입을 여셨다.

"어제 보니 차례 안 지내는 집들 진짜 많더라고. 처음엔 막 가슴이 뛰고 이상한 거야. 내가 또 잘못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너희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나 이런 걱정도 되고. 근데 사람들이 괜찮다고. 무조건 옛날식으로 따르는 거 보다 음식 낭비도 안 하고 가족들이 더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고 이야기 많이 해주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내 마음이 좀 불편해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 게 맞는 거 같아."

차례 없는 추석. 42년간 지켜왔던 가부장적 전통을 내려놓는다는 게 시어머니께는 마냥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가부장제의 불합리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나를 비롯한 여성들이 느끼는 그 감정, '죄책감'을 나의 시어머니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다. "처음이어서 그런 걸 거야. 익숙해지면 이런 기분도 나아질 거고 너희들이 더 편하고 즐거우니 좋지 뭐"라고 결론 지으셨으니 말이다.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처음엔 쉽지 않다. 아무리 부당한 것이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져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들을 변화시켜 간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씩 바꿔가다 보면, 변화를 실천하는 여성들을 옥죄고 있는 죄책감은 옅어질 것이고, 일상은 보다 평등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용기 내 변화를 실천하는 대열에 합류하신 시어머니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인사를 드리며 시가를 떠나왔다.

'어머니, 제사 안 지낸다고 저희가 잘못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저희가 더 열심히 재미나게 살아서 마음 편하게 해드릴게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명절 #시어머니 #며느리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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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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