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교안의 삭발이 두렵다

없는 자들의 저항 수단마저 빼앗기는 불안감... 싸움이 절박한 이들은 무얼 더 내놓아야 할까

등록 2019.09.19 13:29수정 2019.09.1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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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시위와 단식 농성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뭘 고를 거야?"

2011년 여름, 팀장이 내게 물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217일째 되는 날이었다. 원외 정치인이었던 노회찬과 심상정이 힘을 보태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29일째 단식 농성을 하던 중이기도 했다.

당시 <오마이뉴스> 인턴기자였던 나는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을 동행취재하며 하루 동안 함께 단식했다.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기사에 담겠다는 취지였지만, 점심시간이 되자 결기 대신 지독한 허기만 남아 있었다. 지나가는 직장인의 옷에 밴 찌개 냄새에도 침샘이 돌았다. 취재를 지휘하던 팀장은 그런 후배를 지켜보다 못해 분위기 전환 삼아 가볍게 물은 것이었다. 나는 단식 농성을 하겠다고 답했다.

머리카락은 내 자존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대로 기르고, 볶고, 물들일 수 있는 자율의 영역이었다. 노력해도 자꾸 좌절하던 취업준비생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진 게 얼마 안 되는 내 것들이 소중했다. 배가 고픈 걸 참을지언정 머리카락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때의 대답을 번복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황교안의 삭발, 세월호 유가족의 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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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 이희훈

 
2019년 가을, 낙엽이 지기도 전에 보수 야당 정치인들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이언주 무소속 의원이, 11일에는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머리를 밀었다. 둘 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저항'하는 시위였다.

닷새 뒤인 16일,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삭발을 했다. 감색 셔츠에 회색 슬랙스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온 그는 "제1야당의 대표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며 "저의 뜻과 의지를 삭발로 다짐하고자 왔다"라고 말했다.

그의 두상이 훤히 드러나는 동안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같은 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황교안"을 연호했다. 온라인에서는 때아닌 가발 논쟁이 벌어졌다. 크고 작은 소란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깎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항거'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삭발에 나선 황 대표를 보면서, 그가 지난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자 국무총리였던 4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황 대표가 박근혜 정부에서 일한 건 2013년 3월부터 2017년 5월까지다. 청와대가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고, 급기야 국정농단과 '7시간 의혹'으로 2017년 3월 대통령이 탄핵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분노로 거리에 나와 싸웠고, 정권에 맞서 삭발 시위를 했다. 2013년 통합진보당 의원 5명은 정당 해산 심판 청구에 반발해 집단삭발식을 열었고, 2015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머리카락을 잘랐다. 2016년 경북 김천 시민들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막겠다는 각오로 서울까지 와서 머리를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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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삭발에 눈물 흘리는 시민세월호 유가족들이 2015년 4월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정부가 발표가 배상·보상안에 반대하며 삭발하자,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한 시민이 유가족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이들은 정부의 배상·보상안 발표에 대해 "시행령안 폐기와 세월호 선체인양을 촉구하는 여론을 잠재우고 돈 몇 푼 더 받아내려고 농성하는 유가족으로 호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정부의 형태에 분노한다"며 "정부가 참사 1주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배보상이 아니라 선체인향을 통한 실종자 완전 수습과 철저한 진상규명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들도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아이들의 1주기를 앞둔 2015년 봄이었다.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을 위한 대책 마련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정부가 갑자기 배·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희생 학생 1인당 8억 원이 지급된다는 내용이었다.

희생자·피해자 가족들은 잃어버린 생명에 숫자를 덧입히는 권력의 방식에 분개했다. 그러고는 "왜곡된 뜻을 바로잡고, 진상규명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삭발했다.

떠난 아이들의 증명사진이 담긴 학생증을 목에 건 엄마·아빠들의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졌다. 전동 바리캉이 부모들의 머리를 훑는 동안, 주변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그곳에 선 가족 누구도 아이들의 명예를 그런 식으로 지켜야 할 줄은 몰랐을 거다(관련 기사 : "예은아, 아빠 머리 깎아 웃기지?" 한숨·통곡·눈물, 부모들의 삭발식).

결코 같을 수 없는 머리카락의 무게

황 대표는 국회 의석수 297석 중 110석을 가진 제1야당의 수장이다. 정부·여당을 압박하기 위해 여의도 원내에서 꺼낼 수 있는 카드만 해도 여러 장이다. 발언으로, 법안으로, 협상으로, 또는 가진 힘으로.

삭발은 그의 말마따나 문재인 정부에 맞서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장외에 보여주려는 정치적 수단이다. 언론에서는 정국 주도권을 잡고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행위로도 해석한다. 결국 파워게임에서 더 갖기 위한 싸움이라는 뜻이다.

그는 삭발 시위 말고도 장내·외에서 시도해볼 전략과 전술이 더 있을 것이다. 일상의 공간인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잠을 잔 뒤 다시 일어나 지도부와 머리를 맞대고 다음을 기약했을 테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삭발하는 것밖에 없었다. 입법의 행위도, 사법의 권한도, 행정의 절차도 직접 행사하지 못하는, 철저히 권력 밖 사람들이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을 밝히고 책임의 주어를 찾으려면 국회와 정부가 올바른 법을 만들어야 했지만, 힘 있는 자들의 움직임은 유가족의 눈에 한없이 굼떠 보였다.

힘을 갖지 못한 부모들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기에 머리카락을 내놨다.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서 목이 쉬도록 외치고, 발이 붓도록 걷고, 밥을 굶었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동안 거리에 머물러야 했다.

황 대표가 떨군 머리카락과 세월호 유가족이 잘라낸 머리카락의 무게가 결코 같을 수 없는 이유다. 한 소설가는 크고 좋은 말을 아무 때나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 약탈자'라고 생각한 적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저들이 언어를 약탈하는 것도 모자라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저항 수단마저 빼앗는 것같아 두렵다.

무엇을 더 내놓지 않아도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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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연합노조, 공공연대노조, 한국노총에 소속된 서울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지난 7월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한국도로공사 교통센터 서울톨게이트 일대에서 정규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약 1500명의 해고된 수납원들은 용역회사와 계약만료 후 한국도로공사가 자회사를 설립하여 채용을 전환하려고 하자 직접고용을 요구 했고 그 과정에서 해고 되었다. ⓒ 이희훈

  
황 대표 이후에도 같은 당 소속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효상 의원, 이주영 국회부의장 등으로 삭발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이름이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는 건 전략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뜻이다. 릴레이 삭발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손에 쥔 것이 많은 자들이 더 갖기 위해 머리를 밀 때, 손에 쥔 것이 없는 자들은 더 큰 것을 내놓을 처지에 내몰린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곡기를 끊던 이들은 이제 송전탑에 오르거나 전광판에 매달린다.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는 25m 철탑 위에서 100일 넘도록 고공농성 중이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서울요금소 지붕 위에서 추석 연휴를 보냈다.

나는 8년 전 내뱉은 말을 번복한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삭발 말고 단식하겠다는 식의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고, 식당에서 메뉴 정하듯 손쉽게 고를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절박하게 싸우는 사람들의 창과 칼을 가볍게 다뤄선 안 된다는 걸 최근 야당 의원들의 삭발들을 보며 뉘우쳤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삭발만 해도 기자들이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우르르 몰려와 주지만, 노동자들은 곡예나 다름없는 투쟁을 벌여도 언론에 어쩌다 한 번 비칠까 말까다. 이것마저 무용해지면 무엇을 더 내놓아야 할까. 이들이 자꾸 생존에 가까운 것들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진다.

언론이 정치인들의 머리카락을 비추는 지금도 밖에서 위태롭고 절실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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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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