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고양이가 핥던 생선박스 속에 아기가… '베이비박스'는 하나님의 뜻

편견을 넘는 사람들 - 주사랑 공동체 이종락 목사

검토 완료

정현주(chamir)등록 2019.10.18 11:54
지난 10월 7일,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에서 베이비 박스의 벨이 울렸다. 벨이 울리면 공동체는 바빠진다. 유아실에 있는 봉사자는 건물 내부의 베이비박스로 달려가고, 상담실에 있는 봉사자는 아기 엄마를 만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렇게 또 한 아기의 생명을 구했다. 기자가 이종락 목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주사랑공동체에 방문했던 그날, 베이비박스에 도착한 1694번째 아기는 1킬로그램도 안 되는 미숙아였다. '생명을 구했다'는 표현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대로 있으면, 대문 앞에 어린아이 사체가 발견될 지도 모른다
 
2007년 새벽 3시 30분, 주사랑공동체의 정병옥 사모는 잠결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대문 앞에...."
 
막 잠에서 깨어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이종락 목사는 잠자리를 떨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문을 막 여는 순간 고양이가 후닥닥 도망쳤다. 아기는 생선박스 속에 들어있었다. 이 목사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간직했던 그 박스에는, 생선 비린내를 맡은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기를 안아 올린 그의 품에 선뜩한 기운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바깥공기에 노출되어 저체온 증상이 온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기를 데리다 놓고 지켜보다가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교회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던 것이다. 미숙아였고, 다운증후군이었던 그 아기를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며 이 목사는 생각했다.
 
"이러다가 대문 앞에서 어린아이 사체가 발견될 수도 있겠구나."
 
아기에게 응급처치를 한 후, 부부는 의논했다. 교회 앞에 아기들을 데려다 놓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야겠다는 얘기를 나눴다. 부부가 생각해낸 방법은 건물 입구에 작은 방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이 목사는 구청에 건물 증축을 문의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그 집은 이미 용적률이 다 나와 있어서 증축은 불법"이라 했다. 그 후로도 계속 고심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교회 앞에 아기들이 유기되기 시작한 것은 이 목사가 교회에서 장애아들을 돌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였다. 두 달 전인 2019년 8월 14일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목사의 첫째 아들 지원씨는 날 때부터 와상장애로 평생을 누워서 보냈다.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야 했다. 하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이 목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내가 3일 동안 아저씨를 지켜봤습니다. 우리 손녀딸도 당신 아들처럼 전신마비 환자입니다. 내가 늙고 병들어 이 아이를 더 이상 돌볼 수 없어서 어디로든 보내려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니, 아저씨한테 손녀를 맡기면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목사는 기가 막혔다.
 
'내 아이 하나 돌보는 것도 너무나도 큰 짐인데, 똑같은 아이를 또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할머니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이 목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아저씨가 우리 손녀를 맡아준다면, 당신이 믿는 예수님 내가 믿을게요."
 
성직자인 이 목사는, 이 말을 듣고 나서는 할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당연히 아내와 상의한 뒤에 결정해야 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선뜻 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할머니를 위해 주님을 영접하는 축복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기는 힘들었다. 이 목사는 보름 동안 계속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아내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를 데리고 오기로 약속한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그날 이 목사는 아내와 함께 귀가하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란히 걷던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안 된다고 하려는가……. 하나님, 기도했으니 마음을 바꿔주세요.'
 
속으로 주님께 속삭였다. 그때, 아내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면 해야죠."
 
그렇게 이 목사의 집으로 온 할머니의 아이는 3개월 만에 앉을 수 있게 되고, 곧 이어 목을 가눌 수 있었다. 병원에 3년 있으면서도 치료가 안 되어 전신마비로 누워만 있었던 아이가 3개월 만에 휠체어를 타고 정기검사를 갔다. 의사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특별한 부탁을 했다. '우리 병원에 의료사고로 들어와 있는 아이들이 네 명이 있는데, 부모가 잠적해서 연락이 안 되니, 이 아이들을 목사님이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 목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어서 아내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병원차를 타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왔다. 돌봐야 할 아이들이 갑자기 6명이 되었다. 이제 둘이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구청에 전화해서 봉사자를 보내 달라 요청했다. 그러다 보니 장애아들을 돌보는 교회라는 소문이 났다. 그리고 교회 근처에 장애 아기들을 데려다 놓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이 목사는 그 아기들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사랑교회의 장애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7년 새벽, 생선박스에서 발견된 아기는 이 목사를 또 다른 길로 이끌었다. 유독 그 무렵 아기들이 유기되는 사건이 많이 보도됐다. 종종 유기된 아기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목사는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유기되어 울다가 지쳐서 힘없이 죽어가는 아기의 모습, 낙태로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 소리가 이 목사에게는 밤낮으로 들려왔다.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 그 아기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죽어가는 아기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하는 확성기가 되라 하시는구나.'
 
탯줄을 단 채로 베이비박스에 온 첫 번째 아기
 
그러던 중 2008년 7월 그는 체코의 '베이비박스'에 대한 외신 보도를 접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메일로 수차례 연락했다. 베이비 박스를 수입하고 싶으니, 체코에 연락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는 안 되면 설계도라도 보내달라고 했으나 1년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차일피일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2009년에는 주사랑 공동체 교회 주차장에 두 아이, 옆집 주차장에 한 아이가 유기됐다. 더 이상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너무 위험했다.
이 목사는 산부인과에 가서 인큐베이터 사이즈를 쟀다. 넓이 40, 높이 70, 길이 60의 베이비 박스를 만들기로 했다. 신생아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철공일을 하는 집사님께 물으니 제작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교회 바깥 담벼락과 건물 안에 양쪽으로 문이 달린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다. 밖에서 문을 열면 바로 벨이 울리게 제작된 '베이비 박스'는 아기를 10초 안에 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드디어 2009년 12월 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되었다. 3년 동안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던 이 종락 목사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베이비 박스가 설치된 뒤 3 개월간은 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가끔 벨이 울렸는데, 이 목사는 그럴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섰다. 황급히 뛰어가 보면 아기는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궁금해서 열어본 것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 2월 오후 2시 40분에 또 벨이 울렸다. '낮이니까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열어보았겠지.'라고 생각하며 박스의 문을 열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밖에 두고 간 아기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과 박스에서 데려오는 느낌은 또 달랐다. 아기는 탯줄을 그대로 단 채 대중목욕탕에서 쓰는 얇은 수건 한 장에 덮여 있었다. 그때 공동체에는 아내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이 목사가 안고 온 아기를 보자 다섯 명이 동시에 울었다. 그는 아기를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이름을 '모세'라 지어주었다.
 
"죄의 밀물에 떠내려 오는 아기를 갈대상자에 구하듯, 이제 베이비 박스에 떠밀려 온 아이를 구합니다.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세요."
 
그때는 구청에서 생모 확인 없이도 출생신고를 받아줬다. 주민등록증이 나온 뒤 후견인 신청을 했다. 모세를 기르다 보니, 힘든 것도 잊을 정도로 너무 예뻤다. 5개월 쯤 지나 어떤 목사님이 모세를 입양하고 싶어 하셨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지만, 자신보다 더 젊고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아 수속을 밟았다.
 
그 뒤로 베이비 박스에는 간간히 아기가 들어왔다. 1달에 1명꼴로 1년이면 30명 남짓이었다. 베이비박스가 설치된 뒤로는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출산우울증으로 제 정신이 아닌 산모가 죽이려고 목을 눌렀다가 데려온 아기, 3층에서 던지고 자기는 5층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다가 친구가 베이비박스에 데려다 놓으면 된다고 해서 신발도 안 신고 택시타고 데려온 아기, 낳고 바로 구덩이에 파묻으려고 하다가 데려온 흙이 묻은 아기, 화장실에 버리고 문 닫고 나가다가 울음소리에 다시 데려온 아기……. 이 목사는 온갖 처참한 모습을 다 보았다. 그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데려온 엄마는 '아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이라 했다.
 
"그때 그 순간에 그 엄마에게 베이비 박스가 생각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까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1649명의 아기들은 모두 다 죽지 않고 살았다. 기적이었다. 이 목사는 주사랑공동체의 모든 사역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다.
 
2012년 입양특례법 개정이후 베이비 박스에 쏟아지는 아기들
 
그렇게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지고 3~4 년간은 많아야 1년에 28명, 30명 정도 들어오던 아이들이 2013년부터는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들만 보호할 줄 알았지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몰랐던 이 목사는, 나중에야 입양특례법 개정(2012년 8월 개정, 2013년 시행) 소식을 들었다. 법이 바뀌어 입양을 보내기 위해서는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기 이름을 올려야 했다. 이 법 때문에, 출산사실을 숨겨야 하는 미혼모들이 입양기관이 아닌 베이비박스를 찾은 것이다. 그때부터 이 목사는 이 법 개정을 위한 긴 싸움을 시작했다.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궁극적으로 입양보다는 미혼모가 아이들을 기르도록 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미혼모를 보호하고, 그들이 제대로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준비 없이 법만 바꾸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법도 중요하고 인권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이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데, 법이 생명보다 위에 올라가 버린 겁니다. 그 법 때문에 입양기관에 데려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법은 아기를 유기하라는 법이나 마찬가지였죠. 그 전에 비해서 9배나 많이 들어왔어요. 많이 들어올 때는 한 달에 30명 가까이 들어왔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아기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미혼모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법안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이런 뜻을 전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80 명 정도 만났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사랑공동체가 나서서 '성선생명윤리연구소'에 의뢰하여 법안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익명출산제'처럼 미혼모의 비밀출산을 보장하고 익명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이 법안은 지난 해에 발의되어 아직도 국회에 게류중이다.
 
이종락 목사가 품은 것은 아기들만이 아니었다. 베이비박스가 설치된 후 10초 안에 아기를 구할 수 있었고, 또한 그 아기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하혈도 멎지 않은 채로 베이비박스로 달려온 어린 엄마들도 많았다. 그래서 지금 주사랑공동체에는 처음 이 목사 부부가 생각했던 베이비룸도 마련되어 있다. 샤워실과 상담공간이 갖춰진 따뜻한 분위기의 베이비룸은 주사랑공동체의 생명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미혼모들의 사연을 듣고나서 이 목사는 '아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위해 네가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기도를 해라. 눈물만 흘려도 주님이 아신다.'
 
"복음을 전하고 축복기도를 할 때, 아직 어린 미혼모들이 얼마나 우는지 몰라요. 자기 얘기를 하면서 오열을 하죠. 그리고 나면 많이 달라져요. 그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 아이를 정말 포기할래? 만약 포기하면 자책하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울 거다. 혹시 키울 수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때 마음이 바뀌는 미혼모가 있습니다. '학생인데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나요?'라고 하면 1년이든 2년이든 맡아주었어요."
 
그밖에도 주사랑공동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혼모들을 돕는다. 살 집이 없다면 선교관에서 자립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하고, 아기를 기르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쌀, 분유, 생필품 유모차 등 맞춤형 키트를 제공하고 매달 지원금을 주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 회복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방세가 없으면 방세를 내주었다. 돈이 없어서 출산을 못하는 경우 출산비용을 대주기도 한다. 지금도 주사랑공동체는 90여 명 정도의 미혼모들을 후원하고 있다.
 
'베이비 박스' 없어지려면 '아기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사회' 먼저 만들어야
 
지난해 4월 14일과 15일, 일본 쿠마모토에서 열린 '베이비박스 심포지엄'에 참석한 이종락 목사는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만 설치되어 있는 베이비박스를 제 3세계 국가에도 설치할 있도록 돕는 '세계 베이비박스 협력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12개국 베이비박스 운영자들은 모두 이에 동의했다. 아프리카나 인도, 동남아 국가들에 유기되는 아기가 많고, '어린 사체를 동물들이 뜯어먹는 것까지 보았다'는 방글라데시 선교사들의 목격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종락 목사와 베이비박스 이야기는 2014년 미국인 브라이언 아이비 감독에 의해 '드롭박스'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 뒤 영화를 본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베이비 박스를 방문했다. 작년에서는 한 미국인 여성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의 베이비박스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600km를 달려왔다. 그는 지인들로부터 1km에 1달러씩의 후원금을 모금해서 주사랑공동체에 기부했다.
 
"한국은 인구비례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보육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해외입양은 제한하고 있죠. 그동안 장애아들은 주로 해외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걱정입니다. 한국에서 부모가 장애아를 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된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도 장애가 있는 아이 때문에 이혼하겠다는 부부를 6개월간 상담하다가 결국 아이를 공동체에서 맡았습니다. 그 부부는 지금 잘 살고 있어요. 베이비박스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고, 미혼모를 실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아기들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죄 없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은 누구라도 했을 일입니다. 유기로 죽어가는 아기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고, '아, 또 죽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힘없이 죽어가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하고 울음소리를 듣게 했지요.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일을 했을 거예요. 나는 특별히 계획한 적이 없어요. 안 하면 안 되는 일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혼자 울고 있는 아기,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누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요."
 
12년 전 병원에서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 목사의 기도는 오늘의 주사랑공동체를 만들었다. 1694명의 죄 없는 아기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았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속한 우리 모두가 이 목사의 삶에 답할 차례이다.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가 필요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베이비 박스는 죽어가는 아기를 살리기 위한 박스이다. '아기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베이비 박스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이종락 목사와 주사랑공동체의 노력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리고 그 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베이비 박스는 유기되는 아기들의 목숨을 구할  '마지막 희망'이다.
 
지난 10월 7일,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에서 베이비 박스의 벨이 울렸다. 벨이 울리면 공동체는 바빠진다. 유아실에 있는 봉사자는 건물 내부의 베이비박스로 달려가고, 상담실에 있는 봉사자는 아기 엄마를 만나기 위해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렇게 또 한 아기의 생명을 구했다. 기자가 이종락 목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주사랑공동체에 방문했던 그날, 베이비박스에 도착한 1694번째 아기는 1킬로그램도 안 되는 미숙아였다. '생명을 구했다'는 표현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대로 있으면, 대문 앞에 어린아이 사체가 발견될 지도 모른다

2007년 새벽 3시 30분, 주사랑공동체의 정병옥 사모는 잠결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대문 앞에...."

막 잠에서 깨어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이종락 목사는 잠자리를 떨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문을 막 여는 순간 고양이가 후닥닥 도망쳤다. 아기는 생선박스 속에 들어있었다. 이 목사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간직했던 그 박스에는, 생선 비린내를 맡은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기를 안아 올린 그의 품에 선뜩한 기운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바깥공기에 노출되어 저체온 증상이 온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기를 데리다 놓고 지켜보다가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교회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던 것이다. 미숙아였고, 다운증후군이었던 그 아기를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며 이 목사는 생각했다.

"이러다가 대문 앞에서 어린아이 사체가 발견될 수도 있겠구나."

아기에게 응급처치를 한 후, 부부는 의논했다. 교회 앞에 아기들을 데려다 놓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야겠다는 얘기를 나눴다. 부부가 생각해낸 방법은 건물 입구에 작은 방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이 목사는 구청에 건물 증축을 문의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그 집은 이미 용적률이 다 나와 있어서 증축은 불법"이라 했다. 그 후로도 계속 고심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교회 앞에 아기들이 유기되기 시작한 것은 이 목사가 교회에서 장애아들을 돌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였다. 두 달 전인 2019년 8월 14일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목사의 첫째 아들 지원씨는 날 때부터 와상장애로 평생을 누워서 보냈다.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야 했다. 하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이 목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내가 3일 동안 아저씨를 지켜봤습니다. 우리 손녀딸도 당신 아들처럼 전신마비 환자입니다. 내가 늙고 병들어 이 아이를 더 이상 돌볼 수 없어서 어디로든 보내려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아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니, 아저씨한테 손녀를 맡기면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목사는 기가 막혔다.

'내 아이 하나 돌보는 것도 너무나도 큰 짐인데, 똑같은 아이를 또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할머니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이 목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아저씨가 우리 손녀를 맡아준다면, 당신이 믿는 예수님 내가 믿을게요."

성직자인 이 목사는, 이 말을 듣고 나서는 할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당연히 아내와 상의한 뒤에 결정해야 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선뜻 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할머니를 위해 주님을 영접하는 축복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기는 힘들었다. 이 목사는 보름 동안 계속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아내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를 데리고 오기로 약속한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그날 이 목사는 아내와 함께 귀가하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란히 걷던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안 된다고 하려는가……. 하나님, 기도했으니 마음을 바꿔주세요.'

속으로 주님께 속삭였다. 그때, 아내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면 해야죠."

그렇게 이 목사의 집으로 온 할머니의 아이는 3개월 만에 앉을 수 있게 되고, 곧 이어 목을 가눌 수 있었다. 병원에 3년 있으면서도 치료가 안 되어 전신마비로 누워만 있었던 아이가 3개월 만에 휠체어를 타고 정기검사를 갔다. 의사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특별한 부탁을 했다. '우리 병원에 의료사고로 들어와 있는 아이들이 네 명이 있는데, 부모가 잠적해서 연락이 안 되니, 이 아이들을 목사님이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 목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어서 아내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병원차를 타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왔다. 돌봐야 할 아이들이 갑자기 6명이 되었다. 이제 둘이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구청에 전화해서 봉사자를 보내 달라 요청했다. 그러다 보니 장애아들을 돌보는 교회라는 소문이 났다. 그리고 교회 근처에 장애 아기들을 데려다 놓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이 목사는 그 아기들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사랑교회의 장애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7년 새벽, 생선박스에서 발견된 아기는 이 목사를 또 다른 길로 이끌었다. 유독 그 무렵 아기들이 유기되는 사건이 많이 보도됐다. 종종 유기된 아기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목사는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유기되어 울다가 지쳐서 힘없이 죽어가는 아기의 모습, 낙태로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 소리가 이 목사에게는 밤낮으로 들려왔다.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 그 아기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죽어가는 아기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하는 확성기가 되라 하시는구나.'

탯줄을 단 채로 베이비박스에 온 첫 번째 아기

그러던 중 2008년 7월 그는 체코의 '베이비박스'에 대한 외신 보도를 접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메일로 수차례 연락했다. 베이비 박스를 수입하고 싶으니, 체코에 연락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는 안 되면 설계도라도 보내달라고 했으나 1년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차일피일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2009년에는 주사랑 공동체 교회 주차장에 두 아이, 옆집 주차장에 한 아이가 유기됐다. 더 이상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너무 위험했다.
이 목사는 산부인과에 가서 인큐베이터 사이즈를 쟀다. 넓이 40, 높이 70, 길이 60의 베이비 박스를 만들기로 했다. 신생아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철공일을 하는 집사님께 물으니 제작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교회 바깥 담벼락과 건물 안에 양쪽으로 문이 달린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다. 밖에서 문을 열면 바로 벨이 울리게 제작된 '베이비 박스'는 아기를 10초 안에 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드디어 2009년 12월 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되었다. 3년 동안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던 이 종락 목사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베이비 박스가 설치된 뒤 3 개월간은 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가끔 벨이 울렸는데, 이 목사는 그럴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섰다. 황급히 뛰어가 보면 아기는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궁금해서 열어본 것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 2월 오후 2시 40분에 또 벨이 울렸다. '낮이니까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열어보았겠지.'라고 생각하며 박스의 문을 열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밖에 두고 간 아기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과 박스에서 데려오는 느낌은 또 달랐다. 아기는 탯줄을 그대로 단 채 대중목욕탕에서 쓰는 얇은 수건 한 장에 덮여 있었다. 그때 공동체에는 아내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이 목사가 안고 온 아기를 보자 다섯 명이 동시에 울었다. 그는 아기를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이름을 '모세'라 지어주었다.

"죄의 밀물에 떠내려 오는 아기를 갈대상자에 구하듯, 이제 베이비 박스에 떠밀려 온 아이를 구합니다.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세요."

그때는 구청에서 생모 확인 없이도 출생신고를 받아줬다. 주민등록증이 나온 뒤 후견인 신청을 했다. 모세를 기르다 보니, 힘든 것도 잊을 정도로 너무 예뻤다. 5개월 쯤 지나 어떤 목사님이 모세를 입양하고 싶어 하셨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지만, 자신보다 더 젊고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아 수속을 밟았다.

그 뒤로 베이비 박스에는 간간히 아기가 들어왔다. 1달에 1명꼴로 1년이면 30명 남짓이었다. 베이비박스가 설치된 뒤로는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출산우울증으로 제 정신이 아닌 산모가 죽이려고 목을 눌렀다가 데려온 아기, 3층에서 던지고 자기는 5층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다가 친구가 베이비박스에 데려다 놓으면 된다고 해서 신발도 안 신고 택시타고 데려온 아기, 낳고 바로 구덩이에 파묻으려고 하다가 데려온 흙이 묻은 아기, 화장실에 버리고 문 닫고 나가다가 울음소리에 다시 데려온 아기……. 이 목사는 온갖 처참한 모습을 다 보았다. 그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데려온 엄마는 '아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이라 했다.

"그때 그 순간에 그 엄마에게 베이비 박스가 생각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까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1649명의 아기들은 모두 다 죽지 않고 살았다. 기적이었다. 이 목사는 주사랑공동체의 모든 사역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다.

2012년 입양특례법 개정이후 베이비 박스에 쏟아지는 아기들

그렇게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지고 3~4 년간은 많아야 1년에 28명, 30명 정도 들어오던 아이들이 2013년부터는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들만 보호할 줄 알았지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몰랐던 이 목사는, 나중에야 입양특례법 개정(2012년 8월 개정, 2013년 시행) 소식을 들었다. 법이 바뀌어 입양을 보내기 위해서는 미혼모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기 이름을 올려야 했다. 이 법 때문에, 출산사실을 숨겨야 하는 미혼모들이 입양기관이 아닌 베이비박스를 찾은 것이다. 그때부터 이 목사는 이 법 개정을 위한 긴 싸움을 시작했다.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궁극적으로 입양보다는 미혼모가 아이들을 기르도록 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미혼모를 보호하고, 그들이 제대로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준비 없이 법만 바꾸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법도 중요하고 인권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이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데, 법이 생명보다 위에 올라가 버린 겁니다. 그 법 때문에 입양기관에 데려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법은 아기를 유기하라는 법이나 마찬가지였죠. 그 전에 비해서 9배나 많이 들어왔어요. 많이 들어올 때는 한 달에 30명 가까이 들어왔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아기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미혼모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법안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이런 뜻을 전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80 명 정도 만났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사랑공동체가 나서서 '성선생명윤리연구소'에 의뢰하여 법안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익명출산제'처럼 미혼모의 비밀출산을 보장하고 익명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이 법안은 지난 해에 발의되어 아직도 국회에 게류중이다.

이종락 목사가 품은 것은 아기들만이 아니었다. 베이비박스가 설치된 후 10초 안에 아기를 구할 수 있었고, 또한 그 아기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하혈도 멎지 않은 채로 베이비박스로 달려온 어린 엄마들도 많았다. 그래서 지금 주사랑공동체에는 처음 이 목사 부부가 생각했던 베이비룸도 마련되어 있다. 샤워실과 상담공간이 갖춰진 따뜻한 분위기의 베이비룸은 주사랑공동체의 생명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미혼모들의 사연을 듣고나서 이 목사는 '아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위해 네가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기도를 해라. 눈물만 흘려도 주님이 아신다.'

"복음을 전하고 축복기도를 할 때, 아직 어린 미혼모들이 얼마나 우는지 몰라요. 자기 얘기를 하면서 오열을 하죠. 그리고 나면 많이 달라져요. 그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 아이를 정말 포기할래? 만약 포기하면 자책하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울 거다. 혹시 키울 수 없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때 마음이 바뀌는 미혼모가 있습니다. '학생인데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나요?'라고 하면 1년이든 2년이든 맡아주었어요."

그밖에도 주사랑공동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혼모들을 돕는다. 살 집이 없다면 선교관에서 자립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하고, 아기를 기르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쌀, 분유, 생필품 유모차 등 맞춤형 키트를 제공하고 매달 지원금을 주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 회복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방세가 없으면 방세를 내주었다. 돈이 없어서 출산을 못하는 경우 출산비용을 대주기도 한다. 지금도 주사랑공동체는 90여 명 정도의 미혼모들을 후원하고 있다.

'베이비 박스' 없어지려면 '아기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사회' 먼저 만들어야

지난해 4월 14일과 15일, 일본 쿠마모토에서 열린 '베이비박스 심포지엄'에 참석한 이종락 목사는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에만 설치되어 있는 베이비박스를 제 3세계 국가에도 설치할 있도록 돕는 '세계 베이비박스 협력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12개국 베이비박스 운영자들은 모두 이에 동의했다. 아프리카나 인도, 동남아 국가들에 유기되는 아기가 많고, '어린 사체를 동물들이 뜯어먹는 것까지 보았다'는 방글라데시 선교사들의 목격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종락 목사와 베이비박스 이야기는 2014년 미국인 브라이언 아이비 감독에 의해 '드롭박스'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 뒤 영화를 본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베이비 박스를 방문했다. 작년에서는 한 미국인 여성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의 베이비박스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600km를 달려왔다. 그는 지인들로부터 1km에 1달러씩의 후원금을 모금해서 주사랑공동체에 기부했다.

"한국은 인구비례로 세계에서 제일 많은 보육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해외입양은 제한하고 있죠. 그동안 장애아들은 주로 해외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걱정입니다. 한국에서 부모가 장애아를 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된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도 장애가 있는 아이 때문에 이혼하겠다는 부부를 6개월간 상담하다가 결국 아이를 공동체에서 맡았습니다. 그 부부는 지금 잘 살고 있어요. 베이비박스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고, 미혼모를 실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아기들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죄 없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은 누구라도 했을 일입니다. 유기로 죽어가는 아기들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고, '아, 또 죽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힘없이 죽어가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하고 울음소리를 듣게 했지요.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일을 했을 거예요. 나는 특별히 계획한 적이 없어요. 안 하면 안 되는 일이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혼자 울고 있는 아기,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누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요."

12년 전 병원에서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 목사의 기도는 오늘의 주사랑공동체를 만들었다. 1694명의 죄 없는 아기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았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속한 우리 모두가 이 목사의 삶에 답할 차례이다.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가 필요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베이비 박스는 죽어가는 아기를 살리기 위한 박스이다. '아기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베이비 박스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이종락 목사와 주사랑공동체의 노력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리고 그 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베이비 박스는 유기되는 아기들의 목숨을 구할 '마지막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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