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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다소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 47회] 신군부 반란세력은 하나같이 피에 굶주린 흡혈귀들이었다

등록 2019.11.09 19:47수정 2019.11.0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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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광주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어도 현장노동자들은 잔업과 철야근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 5.18 기념재단

광주에서 수습위원들과 시민들이 일부의 완강한 반대를 설득하면서 총기를 회수하는 등 사태수습에 노력하고 있을 때, 쿠데타 실세들은 철수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문제 등 강경한 진압책을 모의했다.

"23일 오전 9시경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보, 작전, 군수 및 전략기획 등 참모부장, 계엄사 참모장, 진종채 2군사령관 등이 참석하여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을 본격 논의했다." (주석 4)

전두환 등 핵심은 이미 계엄군을 동원하여 광주에 재진입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육군참모총장실의 모임을 통해 이를 확인하려는, 일종의 통과의례 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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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

 
계엄 수뇌부가 21일의 도청 앞 집단 발포와 광주 시내에서의 계엄군 전면 퇴각이라는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 진압작전의 전열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실세들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을 조속히 진압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린 상태였고, 이 지침에 따라 이희성 사령관이 직접 재진입작전을 검토하기 위한 자리였다.

진종채 제2군사령관은 사태의 장기화를 막기 위해 재진입작전을 조속히 감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이희성 사령관은 '작전 개시'는 시민들의 무기 반납, 시민과 폭도의 분리, 진입작전부대 지휘관의 준비 등에 필요한 시간 등을 감안하여 '5월 25일 새벽 2시 이후' 명에 의하여 하되, 작전계획과 작전 개시 시각은 현지 지휘관인 전교사령관에 맡기도록 결정했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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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에 쌓인 수많은 주검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합천에서 기릴만한 사람이라면 저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인가요?태극기에 쌓인 수많은 주검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합천에서 기릴만한 사람이라면 저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 5.18기념관 자료집에서

 
전두환과 신군부 반란세력은 하나같이 피에 굶주린 흡혈귀들이었다. 광주에서 이미 그만큼 피를 흘렸으면 누군가는 재진입을 만류했을 법도 한데 그런 자는 없었다. 권력이 눈앞에 보이는 데 놓칠 수는 없다는, 그동안 권력 맛에 길들여진 '정치군인들'의 속성이었다.

흡혈귀들의 광주재진입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즈음 광주의 도청 상황실에서는 오후 1시경부터 도청수습대책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계엄사에 대한 몇가지 요구사항이 결정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당국은 일부 불순분자들인 폭도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 광주학생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ㆍ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라. (주석 6)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엄분소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럴 의지도 없거니와 권한이 없었다. 모든 지침은 신군부 수뇌부에서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23일 오후 전두환은 특전사령관 정호용에게 '자필 메모'를 써서 주면서 광주에 내려가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광주 재진입 작전과 관련해서 "다소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당부한다는 메시지였다. 이 메모에는 또한 "공수부대를 너무 기죽이지 마십시오"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황영시 참모차장도 전교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방침은 확고했다.

시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시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조속한 '유혈진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신군부가 이렇듯 강경 일변도로 나간 이유는 광주의 시위가 서울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최종 목표인 '집권'은 어그러지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7)


주석
4>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엮음, 『12ㆍ12, 5ㆍ18실록』, 300쪽, 1997.
5> 황석영 외, 앞의 책, 319~320쪽.
6> 윤재걸, 앞의 책, 123쪽.
7> 황석영, 앞의 책, 32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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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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