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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에서 물이 샌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

돈만 생각하느라 아랫집의 불편은 눈감고 싶었던 나

등록 2019.11.10 13:33수정 2019.11.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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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토요일 아침, 10시가 훌쩍 지났어도 잠자리에서 뭉개고 있던 우리를 깨운 건 초인종 소리였다. 누구지? 벨을 누를 사람이 없는데. 잘못 누른 건가. 잘못 누른 거면 곧 가겠지. 다시 눈을 감았지만, 초인종은 시끄럽게 또 울렸다.

택배가 와도 벨을 누르지 않고 문 앞에 두고 가기 때문에, 신경질적인 초인종이 연속으로 울릴 때는 뭔가 심각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남편이 누구시냐 물었더니, 아랫집 201호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번쯤은 생각해 본 적 있으나, '설마 일어나겠어?' 하고 생각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고, 201호 아주머니는 흥분해서 말씀하셨다.

"저희 집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서요. 확인을 좀 해주셔야겠는데요."

현관에서 들려오는 그 이야기를 침대에서 설핏 듣고 있던 나는, 잠이 확 깼다. 뭐? 물이 샌다고?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어떤 사람이 홧김에 불을 질러 주택 한 채가 잿더미가 됐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바로 화재보험에 가입했다. 그러나 나는 누수가 생길 시 이를 보장해주는 보험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보험을 특약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친 건 '나 보험 안 들었는데, 어쩌지?' 였다. 내가 첫 번 째로 떠올린 건, 돈이었다.

201호에 남편이 내려가 물이 떨어지는 곳을 확인하고 왔다. 거실 천장 가운데쯤 도배지가 젖어 있고, 거기서 물이 뚝뚝, 그나마 다행히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어디에서 물이 새는 걸까.
 

아파트만 생각하느라 배달원의 불편은 못 본 척 하는 사람들, 돈만 생각하느라 아랫집의 불편은 눈감고 싶은 나. ⓒ Pixabay

 
부엌 싱크대 밑을 확인해 봤지만 물이 샌 흔적은 없었다. 욕실에 벗겨진 실리콘 사이로 물이 들어가 아랫집에 물이 새기도 한다는데, 욕실 어디에도 실리콘이 벗겨진 곳이 없었다. 두 집 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201호 아주머니가 누수업체에 연락을 할 테니, 월요일 집에 있어 달라고 했다.

월요일엔 하루 종일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기다렸다. 마음이 어지럽고, 차분히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창문 밖에서 트럭 소리만 들려도, 혹시 누수업체에서 온 건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업체에서 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누수체크를 하고 수리를 하는 게 맞는 건데, 왜 미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걸까. 그건 꼭 어떤 선고를 받는 것 같았다. 누수공사를 하게 되면 내가 얼마만큼의 돈을, 그리고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포기해야 하는지 선고 받는 일.

"저번에 피아노 학원을 다니려고 수강료를 알아봤죠? 한달에 13만 원이라고 했었죠? 자, 이제 그 열달치에 해당하는 돈을, 누수 공사비로 내 놓으세요. 땅!땅!땅"
"저번에 여행가려고 패키지 요금을 알아봤죠? 혼자서 가게 되면 싱글룸 비용이 50만원, 선택관광 요금이 다 합해서 50만원, 그 여행비를 누수 공사비로 내 놓으세요. 땅!땅!땅!"
"저번에 어떤 공연을 보려고 했었죠? 저번에 뭘 사고 싶어 했었죠? 저번에, 저번에...땅!땅!땅!"

돈 생각이 가득했다. 누수업체에서 일단 방문을 하면 15만 원을 지급해야 하고, 간단한 누수공사일 경우에는 60만 원에 처리가 되며, 마루를 뜯어야 할 경우에는 마루업체를 따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마루업체를 부르면, 돈은 이백만 원을 훌쩍 넘을 수 있다고 했다. 돈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답답했다. 물이 새고 있는 아랫집이 스트레스가 더 심할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또 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업체 방문이 일주일 늦춰졌다. 돈 생각은 잠시 뒤로 미루고 나는 이기호의 단편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를 읽고 있었다. '아파트먼트 셰르파'라는 단편을 읽다가,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시원비를 벌기 위해 '나'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치킨집은, 상가 앞에 있는 25층 '행복아파트'에 배달을 하는데, 이 아파트는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배달사원들로 인해 승강기 유지관리비가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12층으로, 9층으로, 4층에서 21층으로 뛰고 또 뛰고 오른다. 두 달 뒤, 마지막 배달을 간다. 17층에서 온 주문이었는데,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주문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자기집 배달은 1층에서 자기가 직접 받겠다고 말을 하면서. '나'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왜...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파트만 생각하느라 배달원의 불편은 못 본 척 하는 사람들, 돈만 생각하느라 아랫집의 불편은 눈감고 싶은 나. 다를 게 뭔가.

오늘, 누수 탐지 업체에서 방문을 했다. 수도 계량기를 잠그고, 냉온수관 압력을 체크한다고 했다. 각각 압력을 걸고, 10분 뒤 압력 변화가 없으면 누수가 없는 거고, 압력이 떨어지면 어딘가에서 누수가 생기는 거라고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압력에 변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난방을 체크해야 한다. 보일러에서 어떤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결론을 말하자면, 업체 직원분은 보일러를 확인하지 못하고, 즉 누수를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이 집에 4년 전 이사 오면서,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가스 건조기'를 설치비용까지 들여서 세탁기 위에 직렬로 놓았다. 그랬는데.......... ⓒ Pixabay

 
우리집은 발코니가 하나밖에 없다. 이 발코니도 엄청 좁아서, 보일러 앞에 세탁기를 설치하게 되어 있다. 이 상황이라면 사실 세탁기를 조금 옮기고 작업을 하면 되니까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집에 4년 전 이사 오면서,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가스 건조기'를 설치비용까지 들여서 세탁기 위에 직렬로 놓았다. 즉, 보일러를 가로막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설치한 것이다. 누수업체 직원은, 건조기를 내린 다음 연락을 달라고 했다.

나는 건조기를 내려야 한다. 가스 건조기여서, 가스 담당자가 한 명, 건조기 담당자가 한 명씩 와야 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돈이 또 들게 된다. 201호는 기약도 없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말이다. 나는 돈 생각은 20%만 하고 아랫집 불편을 80%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빨리 건조기 회사에 전화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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