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길목의 가을 풍경

계절이 주는 작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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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석(kshong25)등록 2019.11.12 09:09
겨울로 가는 길목의 가을 풍경
계절이 주는 작은 느낌
 
 
11월 9일.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본 아내는 대문에서 들어오는 길가에 줄지어 심었던 노란 멜란포디움이 갈색으로 변한 모습에 놀라 "벌써…?"라며 가벼운 탄식을 쏟았다.
예고된 일이지만 막상 닥치고 보면 놀라움이 되는가 보다.
밖으로 나갔더니 멜란포디움만이 아니라 어제 오후까지도 선명하던 달리아와 자하라도 불에 덴 듯 허리를 꺾고 있었다.
아침 7시, 기온은 영하 1℃도였고 살얼음도 보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산을 끼고 있는 숙지원의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광주에 비해 봄날은 더디고 추위는 빨리 오는 곳이다.
그날 광주 최저 기온은 4℃라고 했다.
 
현상만 보면 색깔을 잃은 꽃들이 쓰러진 꽃밭의 풍경은 이별의 노래 가득한 패전의 상흔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나는 아직!"이라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본원을 찾아가야 할 필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침묵의 아우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때가 되면 조용히 가는 것이 인생임을 알려주는 꽃들의 잠언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멜란포디움 잔디밭 가장자리 등에 심으면 여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리에 약한 점이 있다. ⓒ 홍광석

 

땅을 밀고 나오는 싹만 보고도 꽃 이름을 알아맞히는 아내는 싹이 자라 모종이 되면 꽃의 키와 색상과 사람들에게 보이게 될 위치를 고려하여 옮겨 심었고 거름을 주며 깊은 정을 쏟았다.
이른 봄에 피는 수선화 패랭이 튤립 등 키가 작은 꽃 뒤쪽에 키가 큰 달리아 부용화 등은 철쭉 사이에 자리를 잡아주어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더 큰 접시꽃은 그런 꽃들 사이에 고명으로 배치하고 스카렛이라는 작고 귀여운 붉은 장미는 울타리에 올린 사람도 아내였다.
아마 그런 노력으로 인해 수선화 지면 꽃 양귀비 산들거리더니 패랭이 무스카리 흑종초 백합에 이어 장미가 여름을 장식했고, 가을에는 추명국 상사화 꽃무릇 용담 자하라 철포나리 구절초…, 그렇게 숙지원을 다녀간 꽃들은 100여 종류에 몇만 송이를 헤아리게 되었을 것이다.
 
 

감나무는 가을나무다. ⓒ 홍광석

 

꽃밭과 함께 우리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었던 텃밭의 농사였는데 금년 농사는 며칠 전 생강 수확으로 마무리했다.
초여름에 쏟아지는 오디를 쓸어 담았던 일, 주렁주렁 달린 호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을 아주머니들과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눔을 했던 일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또 멧돼지와 고라니로부터 고구마를 지키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나 효과가 없었기에 크레졸비누액이 산짐승 퇴치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시험삼아 고구마밭 주변에 지지대를 세우고 크레졸이 담긴 병을 줄줄이 매달았는데, 어떻든 크레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노심초사했던 내 마음이 멧돼지와 고라니에게 통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금년에 고구마는 손실 없이 거두어들였으니 새로운 경험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밖에도 벌레와 새가 먹다 남긴 감을 우리가 한철을 먹을 만큼 땄으니 그런 일도 한편의 삽화로 남을 것이다.
소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 농사는 일이었고 놀이였으며 건강을 지키는 운동이었다고 여긴다. 굳이 이익을 따진다면 내가 얻은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봄에 피는 꽃을 보며 지난해 꽃이 또 피었다고 하지만 그건 한 번 진 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말이다.
하지만 금년에 피었던 꽃들의 잔치는 끝났지만 지는 꽃에서 영근 작은 씨앗들이 찬바람을 피해 보드라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찬란한 봄에 화려하게 피어난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는다.
이제 겨울의 대지는 태양과 달의 기운을 받아 자신의 품에 든 씨앗을 키우고 씨앗은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날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무언가 기다리고 비축하는 일은 가까운 미래의 시점에도 내가 건재하리라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 다가올 겨울에는 조금은 여유롭게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며 군고구마에 생강차를 마시며 잎이 진 나무들과 함께 봄날의 꽃들을 기다린다면 겨울은 결코 멈춤의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숙지원의 나무들을 둘러본다.
매 끼니를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나무들, 추위를 춥다고 피하지 않은 그런 나무들을 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심상(心象)을 그린다.
울타리에 자리한 남천은 눈 속에서 겨울꽃처럼 빛날 것이고 푸르른 소나무와 호랑가시와 동백은 추위에 굴하지 않겠다는 기상을 보여줄 것이다.
붉은 매화는 동지를 넘기면 꽃눈을 만들고 라일락과 자목련은 입춘만 기다릴 것이다.
다시 봄이 오면 보리수를 시작으로 오디를 모으고 술을 담글 매실과 개복숭아를 딸 것이다.
묘목을 주었던 친구의 이름으로 남은 아로니아는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여길 것이고, 내년 가을에도 주황색 감은 한 폭의 수채화로 보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몸이 아픈 사람의 감정을 기복이 심하고 더불어 이성적인 판단도 흐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 역시 자기중심적인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또 내가 하는 일에 자신감도 없었고 심지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존감의 상실로 인해 벼랑에 서성이던 시간은 길었다.
그런 시간, 상추 가지와 오이 등 여리게 보이는 씨앗이 싹을 티우고 또 고추 모종이 자라 붉은 열매를 키우는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았고 태풍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며 사는 법을 배웠다.

 

동목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꽃이 피며 향기가 진하다. ⓒ 홍광석

 

마음의 평화를 가로막는 헛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높은 도를 가르치는 곳이나 고귀한 사람들의 언어에만 담겨있는 진리는 아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다가 서리가 내리면 잎에 낀 묵은 먼지를 시원하게 씻으면서 황금빛 꽃을 피우고, 첫눈이 올 때까지 짙고 맑은 향기를 차별 없이 전하는 동목서에도 사람이 배워야 할 길은 숨겨져 있다.
한없이 작으면서도 그 정신세계는 우주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지만 이승을 떠나면서 평소에 손가락의 반지 하나 챙겨가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가을은 적당한 시간에 체념하고 포기하면서 정리하는 계절이 아닐까?
늦은 가을날 저녁, 꽃과 나무들을 보며 그런 생각도 해본다. 2019.11.11.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대직방에도 올릴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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