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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십니까? 이 책갈피 소녀

[책, 갈피에서 찾은 물건] 버려지고 또 잊힌 존재, 책갈피

등록 2020.01.09 07:47수정 2020.01.09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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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들어온 책과 책 속에서 들어있던 물건들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책, 갈피에 든 채로 버려진, 누군가에겐 잊혔으나 함부로 할 수 없었던 헌책방 책방지기가 수집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할 글들은 K선배에게 선물로 받은 2011년 출간된 마이클 포펙의 <잃어버린 책갈피들>(원제 : Forgotten Bookmarks)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미리 밝힌다.[기자말]

책 속에 들어있던 책갈피는 바구니에 따로 모은다. 헌책방 책방지기가 가장 아끼는 수집품. ⓒ 조경국

 
책은 보기보다 넉넉한 품을 가졌다. 그 속에 얼마나 다양한 물건이 들었는지! 책 어느 갈피에 끼워두었다 잊힌 물건들을 책방에 들어온 책을 살피며 발견하곤 한다. 갈피에 들어 있던 '잊힌 물건'을 찾아내는 재미는 헌책방 책방지기의 몇 안 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헌책방까지 들어온 책들은 대부분 폐지 처리되기 전 겨우 목숨을 구한 것이다. 책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은 버려진 속에 또 한 번 잊힌 존재다. 흔한 책갈피부터, 편지, 엽서, 영수증, 신문이나 잡지 기사 스크랩, 껌종이, 메모지, 마른 나뭇잎과 꽃… 드물지만 비상금으로 넣어둔 지폐가 나오기도 한다(책방지기로 일하는 지난 6년 동안 딱 한 번 5천 원짜리 구권 지폐를 발견한 적 있다). '잊힌 존재'를 발견하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무슨 사연이 있을까 더듬어본다. 
 
어떤 때는 눌러 말린 꽃으로 만든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책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오래전에 이미 희미해진 그 꽃 냄새를 맡으며 이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여기에 끼워놓았을까, 하고 상념에 빠졌다. 세월을 뛰어넘는 만남은 헌책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미다.

야기사와 사토시의 소설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에 나오는 주인공 다카코의 독백이다. 낡은 책, 다른 이의 인생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마주할 때면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 일곤 한다. 그 감정에 맛이 있다면 쓴맛 깔린 단맛이랄까. 그 맛을 음미하며 책갈피가 떨어져 나온 쪽을 살핀다.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책갈피가 있던 쪽 사이에 담겨 있지 않을까 하고.

이 책은 어디서 왔을까. 이 책을 읽었던, 혹은 가졌던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갈피에 끼워둔 이 물건들은 왜, 무엇때문에 넣어둔 것일까. 이 잊힌 물건들을 다시 기억하고 찾으려할 때가 있을까. 

문 닫은 곳이 더 많은, 책갈피 속 서점들
 

책갈피는 서점에서 흔히 나눠주던 홍보물이었다. 서점 주소와 연락처가 들어있는 책갈피들. ⓒ 조경국

 
책 속에 가장 흔하게 들어있는 건 책갈피. 책갈피의 역할은 단순하다.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 책을 모두 읽고나면 책갈피는 쓸모를 잃지만 책 속에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다. 각각의 존재이나 결국 하나인 것이 책과 책갈피의 관계다. '책 갈피'에 남아 있는 물건들 대부분은 어쩌면 '책갈피'로 썼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이야기는 실제 책갈피에 대한 것이다.

책방을 열기 전부터 모으기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정확하게 헤아리진 않았지만 200개는 넘지 않을까.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점에서 책을 사면 책갈피를 끼워주고 책싸개를 해주는 곳이 많았다. 지금도 책갈피를 주는 곳이 많지만 당시 비닐 코팅된 책갈피는 서점 정보를 담은 가장 흔한 홍보물이었다. 서점 연락처와 주소가 담긴 옛 책갈피를 책에서 발견할 때면 습관처럼 서점 이름을 검색해본다.

안타깝지만 책갈피에 적힌, 책갈피를 만든 서점들 대부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과 서점의 전성기는 20세기까지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점도 책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조금씩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고, 책을 읽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서점연합회가 조사해 발표하는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전국 서점수는 1559곳이었다. 가장 많았던 1996년 5378곳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최근 독립서점, 동네서점이 조금씩 늘고 있다지만 옛 영화를 다시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구니 속에 든(책갈피가 나오면 바구니 속에 넣어둔다) 책갈피들 대부분은 모두 서점이 성업하고 있던 시절에 만든 것들이다. 책갈피에 적인 서점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할 때면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길 바란다. 하지만 원래 그 서점이 있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20년 사이 절반 넘는 서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책갈피로 본 것은 그보다 더 하다. 오랜 세월 동네 주민들의 친구 같았던 서점들도 기억조차 되살릴 수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 그곳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라진 서점들이 얼마나 될까. 17년 동안 창원 명서동 시장 골목에 있던  큰 고모의 '시민서점'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은 책갈피 하나가 어쩌면 사라진 서점들이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일 수도.

서정윤의 '홀로서기'부터 오오타 케이분의 미소녀 그림까지
 

서정윤, 유안진 시인의 시는 책갈피에 들어가는 문구로 인기 있었다. 오오타 케이분의 미소녀 그림이 들어 있는 책갈피도 흔히 볼 수 있었다. ⓒ 조경국

 
어쨌거나 이 작은 증거들에도 유행이 존재했다.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이 남는 책갈피를 발견할 때면 "그래 이 책갈피는 인기 있었지"라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다양한 책갈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은 자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무료로 나눠주는 책갈피였지만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시집의 문구를 옮기거나 유행했던 그림을 넣기도 했다.

300만부 이상 팔렸던 시집이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 시리즈는 1987년에 첫 번째 권이 나온 이후 책갈피에 단골로 쓰였다. 시인에 대한 평가는 이 글에선 접어두자. 당시 대중들의 감성을 제대로 건드렸던 이 시집의 시들은 끊임없이  책이 아닌 다른 물건들에 실려 재생산되었다. 특히 책갈피뿐만 아니라 온갖 문구류에 '홀로서기'는 복제되고 쓰였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도 단골소재였다.

오오타 케이분의 미소녀 책갈피도 그랬다. 그때는 누구의 작품인지도 누구를 그린 것인지도 몰랐다. 더는 이 책갈피를 보기 힘들 무렵 문득 원작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책방일지를 찾아보니 '미소녀 책갈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 것이 2014년 12월 18일. 이 미소녀들은 일본 작가인 오오타 케이분이 그린 것이었다. 1951년생, 인테리어 회사 직원이었던 그는 홀로 그림을 공부하고 자신만의 미소녀 그림체를 완성했다. 

이 그림들의 주인공은 '판타지'가 아닌 실제 인물이었다. 오가와 노리코, 고토 쿠니모 등 당시 인기 있던 아이돌 가수와 아역 배우들을 모델로 그렸다고. 쉽게 뿌려지는 물건들은 당대를 적극 반영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담아야 선택받고 버려지지 않을 테니까. 그의 그림이 든 책갈피는 이제 더는 나오지도 구하기도 힘들지만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홈페이지(keibun.info)를 보니 2020년 달력을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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