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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남원에서 재봉기 준비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52회] 남원성에 포진한 김개남은 혁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 2020.02.01 14:09수정 2020.02.0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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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김개남은 1894년 7월 2일 백마를 타고 동학농민군 3,000여 명을 인솔하여 남주공을 선봉대장, 김중화를 중견대장으로 삼아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도망치던 부사 김용헌을 생포하고, 이로부터 100여일 동안 남원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 폐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남원에 입성하자 탐관오리들을 정치하고 교룡산성을 증축하여 남원 외곽을 튼튼히 하는 한편 구례 화엄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재차 농민운동을 위한 기병에 대비하였다.

그는 남원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인근 금산ㆍ무주ㆍ진안ㆍ장수ㆍ용담ㆍ임실ㆍ순창ㆍ구례ㆍ곡성ㆍ담양을 총괄하는 대접주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정세는 1894년 5월 6, 7일에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고, 5월 8일에 일본군이 인천 해안에 상륙하여 있어 양국군의 충돌과 양국의 내정간섭이 장애없이 진행되던 때이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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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을 에워쌓은 산성이다 ⓒ 하주성

 
남원성에 포진한 김개남은 혁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산이 풍부하고 동학정신이 살아 꿈틀대는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사회를 바꾸는, 천지개벽의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김기범이란 자가 개남왕(開南王)이라 참칭하고 남원부를 분할하여 점거하였다고 한다." (주석 2) 라는 기록이 전한다.

김개남은 남원에 거점을 정한 직후부터 적극 세력을 확장하였다. 남원 인근의 7~8개 읍을 휩쓸었고, 도의 경계를 넘어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들어갔다. 비록 안의에서는 현감 조원식이 민보군을 결성하고 반격을 해서 커다란 피해를 입고 후퇴하기도 했지만 경상도까지 세력 확대를 시도할만큼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다. (주석 3)

김개남이 남원에서 조선혁명의 꿈을 키운 것은 최제우와의 각별한 연고성과 더불어 고향인 태인지역 동학도들의 지원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한 도강 김씨 문중을 비롯하여 긴 세월 수탈에 시달려온 호남인들의 비원이 서렸다고 할 것이다. 또한 초토사 홍계훈이 김개남과 가까웠던 전 영장(營將) 김시풍(金始豊) 등 12명을 죽인데 대한 원한도 크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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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성 성벽 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 서부원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성의 고위 간부 가운데 동학군과 내통하는 자가 전주감영의 정보를 동학군에게 제공하여 동학군이 일방적으로 승전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평소 동학군과 가깝게 지내는 감영군을 캐물었다.

곧 김개남이 전주감영을 자주 드나들며 김개남과 평소 제일 가깝게 지내는 다정한 자가 일가친척으로 그의 족숙이 되는 전 영장 김시풍이고 영내 간부 김영배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임을 알게 된 초토사 홍계훈은 감영수교(監營首校) 정석희와 그 외 김용하ㆍ김동근 등 김개남과 친한 자 12명을 동학군 밀정으로 가려 전주 풍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군과 내통한 죄로 4월 10일 일제히 효수시켰다.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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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교룡산성. 계곡으로 흘르는 몰의 양이 많다 ⓒ 하주성

 
조선혁명이라는 거대한 꿈을 안은 김개남은 우선 역량을 키우는데 노력하였다. 남원의 유생 김재홍은 『영상일기』에서 재봉기를 준비하는 김개남 부대를 이렇게 기술한다.

본부(本府,남원부) 부동(釜洞)의 동학적도 강감역(姜監役),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고장의 동학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본부에 와서 병장기와 활, 총, 화약을 도둑질하여 빼앗아서 말에 싣고 부동으로 갔다. 망가진 활과 남겨진 철조각은 모두 길거리 아이들의 장남감이 되었다.

성안이 텅 비었다. 적당이 날마다 모여들어, 교룡산성에 근거한 자가 수만 명이고 남원부 성안에 근거한 자 역시 수만 명이었다. 잔학한 행동이 매우 심하였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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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개남장(開南丈)'의 일부 혁명가 김개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가 부족하고 잘못돼 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서부원

 
전국의 유생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동학농민혁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반도ㆍ비도ㆍ적당 등 도적의 무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동학지도자들은 관군과 외군(일본군)과 그리고 유생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해야했다.


주석
1> 김호성, 앞의 책, 259쪽.
2> 『세장년록』 1894년 12월, 여기서는 신영우, 앞의 논문, 54쪽 재인용. 
3> 신영우, 앞의 논문과 같음.
4> 김기전, 앞의 책, 106쪽.
5> 신영우, 앞의 논문, 재인용.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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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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