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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밀지 받았으나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58회] 김개남이 대원군의 밀지를 받고 재봉기와 '한양북진'을 시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등록 2020.02.07 16:48수정 2020.02.0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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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에 전시된 흥선대원군 영정.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 김종성


김개남이 남원에서 재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9월 8일 대원군의 밀사가 찾아왔다.

전봉준에게도 두 사람의 밀사가 왔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7월 23일 다시 복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9월에 「효유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질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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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효유문. 크기 가로 27cm×세로 117㎝ ⓒ 안병기



「효유문」은 "도처에서 소란함을 일으키고 기강과 본분을 해치며 관(官)으로 하여금 시정(施政)을 이룰 수 없게 하고 조정으로 하여금 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이 편안히 생업을 유지할 수 없게 한다"고 동학농민의 봉기를 꾸짖고, "이제까지 잘못된 폐단은 일일이 뜯어 고치어 화평과 복을 돈독히 하고 있으니 위태로움을 자초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노회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의 개혁의지와 반외세의 성향에 공감하면서도 일본군을 의식하여 「효유문」을 발표하고, 비밀리에 김개남과 전봉준 등 지휘부에 밀사를 보내 밀지를 전하였다.

대원군의 사신들과 함께 김개남에게 효유문을 전달한 정석모는 자신이 남긴 『갑오약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태공은 정진사를 보내 동도(東徒)의 귀순을 효유하는 한편 국태공의 손자 이준용은 은밀히 이건영을 보내 국태공의 명이라 칭하여 김개남에게 기병하여 상경하라고 전했는데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나 소위 <효유문> 등은 외부에서 강요한 것이므로 공언에 불과하니 믿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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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 박도



김개남이 대원군의 밀지를 받고 재봉기와 '한양북진'을 시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줄곧 "한양으로 쳐들어가서 권세가들을 소탕할 것" 등 1차 봉기의 4대강령에 충실하고자 했다.

'밀사'와 관련 한 연구가는 대원군의 '이중플레이'와 전봉준의 '특정한 의도' 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대원군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능란한 솜씨로 무마하는 한편 농민군의 봉기를 진정시키겠다는 일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도록 남원에 있는 김개남에게 정석모를 통하여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전달하고는, 다시 뒤로 이건영을 통하여 북상하라는 밀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김개남은 정석모를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9월 8일) 김개남에게 금구 원평에 있던 전봉준으로부터 "우리의 재봉기는 '진격만 있고 후퇴는 없다.' 만약 대원군의 효유문을 따르게 되면 만사는 끝장이다. 정석모 일행을 죽임으로써 대원군의 바람을 거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전봉준은 청일전쟁과 중앙 정치의 동향을 주시하다가 더 이상 관망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김개남의 결단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은 전봉준이 모든 화근을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것으로 여겨 정석모를 죽이려는 처음의 계획을 취소하였다. (주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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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성 성벽 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 서부원



남원대회 후 김개남은 남원의 동학농민군을 각 군ㆍ현으로 배치하고 정예 100명과 함께 임실의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과의 약속을 지키며 농번기가 끝나는 9월 이후를 기다리면서 정세를 관망하기 위해서였다.

김개남이 남원을 떠난 후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안의사건(安義事件)으로 "안의사건이라는 것은 남원의 동학군이 운봉을 거쳐 함양군 지곡면의 부자 정씨로부터 많은 식량을 얻어내고 7월 10일 안의현까지 가서 현감 조원식에게 군량미 지원을 요구한다. 조원식 현감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많은 술과 음식으로 농민군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자 숨겨두었던 장정들이 불시에 습격하여 농민군은 대척해 보지도 못한 채 수십 명(혹은 300여 명)이 죽고 몇 십 명(혹은 10여 명)만 살아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다." (주석 11)

다른 하나는 운봉 출신 박봉양의 배신이다. 박봉양은 장수의 황내문 접주를 통해 동학에 입도하고도 작당하여 반기를 들었다. 안의사건으로 영남지방에 집강소 설치 등이 좌절되면서 동학농민군 조직이 확대되지 못하고, 박봉양의 배신으로 동학조직에 균열이 생겼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김개남은 8월 25일 서둘러 남원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데 7만 여 명의 대부대였다고 한다.


주석
9> 김은정 외, 『동학농민혁명 100년』, 290쪽, 재인용.
10> 우윤, 앞의 책, 232쪽.
11> 『남원의 동학 운동과 동학농민혁명』, 41~4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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