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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이해찬, 김부겸, 우원식... 그들의 도서관 활용법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도서관 앞 광장 ②

등록 2020.02.20 11:56수정 2020.02.2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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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앞 광장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시위와 집회가 자주 이어지던 시절, 대학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 쓴 것처럼, 그 시대는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였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행정관 사이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집회 공간으로 애용된 곳이다. 이곳은 왜 '아크로폴리스'라 불릴까? 1975년 3월 24일 비상 학생총회를 시작으로, 이곳은 서울대학교 주요 집회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집회 현장을 취재한 서울대 학보사 기자 신봉길은 '관악의 아크로폴리스'라는 기사를 썼다. 이를 계기로 중앙도서관 앞 광장은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의 탄생
 

서울대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사진 왼편의 행정관과 오른편 중앙도서관 사이 공간이 ‘아크로폴리스’다. 서울대학교의 집회, 시위 공간으로 가장 ‘애용’된 공간이다. ⓒ 백창민

 
관악캠퍼스 이전 후 서울대학교 첫 번째 입학생은 '75학번'이다. 서울대 75학번은 관악의 첫 세대이자, 함께 모여 입학식을 치른 첫 학번이다. 이들이 '새내기'였던 1975년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긴급조치의 결정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 발동 열흘 만에 서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터진 시위였다.

시위 학생보다 경찰이 훨씬 많아 시위대는 형편없이 당하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한 신입생이 이 광경을 보다 못해 뛰쳐나갔다. 도서관을 뛰쳐나간 학생은 다시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석 달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판검사를 꿈꾸던 그는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서울대 '중도'를 뛰쳐나가 도서관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는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의 길을 걷다가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 신입생의 이름은 박원순이다. 박원순은 하버드대학 객원연구원 시절 중앙도서관인 와이드너(Widener)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한 걸로 알려져 있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하버드대학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더라도 와이드너만 건재하다면 하버드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버드의 심장 같은 존재다.

참여연대 시절 그가 제기한 내부고발자보호법, 돈세탁방지법 같은 수많은 이슈와 아름다운재단 구상은 하버드에서 가져온 '와이드너 보따리'로부터 나왔다. 도서관을 뛰쳐나가면서 인생의 진로가 바뀌어서일까? 박원순의 서재는 '도서관'을 방불케할 만큼 어마어마한 장서와 자료를 자랑한다.

한편 박원순의 인생을 바꾼 서울대학교 '오둘둘 시위' 주모자 중 이호웅과 정성현은 형성사와 청년사라는 출판사를 각각 운영했다. 오둘둘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김근태는 민주화 운동가를 거쳐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도봉구는 2021년 개관을 목표로 '김근태기념도서관'을 건립하고 있다.

1976년 12월 8일에는 서울 법대 졸업을 앞둔 4학년 박석운, 백계문, 이범영 3명이 중앙도서관 앞에서 '민주구국선언문' 400여 부를 배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이범영은 민청련을 비롯한 청년운동을 전개하다 1994년 8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직업운동가'로 운동이 전부였던 이범영은 이런 말을 남겼다.

"참다운 투사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전에 죽을 권리가 없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자체가 시위 현장이 된 사례도 있다. 1977년 11월 11일 시위는 도서관 점거 농성 시위였다. 수백 명의 학생이 기관원과 경찰의 감시를 뚫고 도서관 열람실을 점거한 후 시위를 벌였다. 도서관장이 학생의 진입을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시위대는 관장을 밀치고 도서관에 진입했다.

당시 도서관장은 사회학과 이만갑 교수였다. 그의 관장 재임 시절, 서울대는 단과대 별로 흩어져 있던 도서관 체계를 중앙도서관 중심으로 통합했다. 도서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앙도서관 4층 열람실 점거에 성공한 학생들은 철문을 잠그고 농성을 시작했다. 오후 1시부터 7시간 가까이 '버틴' 이날 시위는 경찰이 열람실 철문을 용접기로 해체할 때까지 이어졌다.

유신 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학 강의실과 도서관, 학생식당에는 경찰과 기관 정보원이 상주했다. 시위 시간이 5분을 넘기기 어려웠던 긴급조치 시대, 7시간 가까이 이어진 11.11 중앙도서관 점거 농성은 전무후무한 시위 기록으로 남았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11.11 점거 농성을 기획하고 주도한 국사학과 74학번 김경택은 출판사 그레이트북스를 창업해서 이끌고 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점거 시위의 주동자는 아니지만 시위 과정에서 구속된 학생이 있다. 보수의 아성인 대구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된 김부겸이다. 다른 한 명은 영화감독이 된 여균동이다. 김부겸은 서울대 정치학과 76번이고, 여균동은 철학과 77학번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김부겸은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뛰어난 대중 연설가로 유명했다.

서울대 민주열사 추모비가 '중도' 주변에 있는 이유
 

박종철 열사의 흉상과 추모비 서울대학교 교정에 박종철의 흉상과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가 함께 서 있다. 흉상에는 박종철 열사의 약력이, 추모비에는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박종철 군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되는 해인 1997년 6월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세웠다. ⓒ 백창민

 
경찰이 캠퍼스에 상주하는 상황에서 도서관은 경찰의 접근이 가장 어려운 공간이어서, 시위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다. 일상적으로 학생이 많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기 전인 문리대 시절에도 도서관은 시위에 '활용'되곤 했다. 1973년 10월 2일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도서관 안팎이 시끄러워졌다.

"불이야! 도서관에 불이 났다!"

다급한 외침과 웅성거림이 퍼졌다. 실제 불이 난 게 아니라 도서관과 강의실에 있는 학생을 끌어내기 위한 거짓 외침이었다. 이렇게 모인 서울대생은 4.19탑에서 비상총회를 갖고 시위를 이어갔다. 2천 명이 안 되는 문리대생의 1/4이 넘는 500여 명이 참여한 시위였다.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선포한 후 첫 시위가 도서관에서 터졌다.

이 시위를 주도한 나병식, 정문화, 정찬용, 강영원, 김효순은 9월 15일에 모여 시위를 준비했다. 이들이 모인 장소는 남산시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서 거사를 모의해서 도서관을 무대로 시위를 벌인 셈이다.

서울대학교 10월 2일 시위를 주도한 나병식은 아내 김순진과 함께 1979년 풀빛출판사를 만들어 출판운동을 이어갔다. 광주민중항쟁을 세상에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풀빛을 통해 출간되었다.

나병식은 <한국민중사>를 출간했다가 1987년 2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0월 2일 시위에 함께 참여한 이해찬은 책방 '광장서적'과 출판사 '돌베개'를 창업했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정동영은 MBC 기자와 앵커를 거쳐 2007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80년대 김세진, 이재호, 박종철 열사의 장례식도 모두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렸다. 그래서일까. 6월 민주항쟁의 발화점이 된 박종철 군 추모비와 흉상도 1997년 6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옆에 세워졌다.

박종철 군 추모비가 세워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80년 12월 11일 학생들이 <반파쇼학우 투쟁선언문>을 뿌리며 교내 시위를 진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도서관과 학생식당에 유인물을 배포한 이 사건으로 78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10명이 구속되었다. 이것이 '무림 사건'이다. 안개처럼 종잡을 수 없는 조직 사건이라는 이유로 '무림(霧林) 사건'이라 불렸다.

무림 사건 구속자 중 상당수는 훗날 '출판' 분야에 몸담았다. 김명인은 풀빛출판사 편집위원을 거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1980년 4.19 스무 해를 맞아 총학생회 명의로 '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명문으로 유명했다. '4.19 선언문'과 '반파쇼학우 투쟁선언문'을 쓴 사람은 김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고세현은 창비 대표를 지냈고, 현무환도 웅진출판을 거쳐 웅진미디어 대표를 맡았다. 남명수도 출판사를 운영한 걸로 알려졌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1981년 5월 27일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후 투신한 장소이기도 하다. 광주민주항쟁 1주기 희생자 위령제를 경찰이 막자, 김태훈은 중앙도서관 6층에서 투신해서 사망했다.

다음날인 5월 28일 도서관 벽에 붉은색 페인트로 "파쇼 타도" "전두환 타도"라는 글이 쓰이고, 2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김태훈이 사망하자 학생들의 추가 시위를 우려한 서울대학교 측은 5월 29일부터 6월 14일까지 중앙도서관을 17일 동안 폐쇄하기도 했다.

1981년 10월 23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3층 난간에서 '반파쇼 민주투쟁 만세'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도서관과 학생회관을 돌며 시위한 혐의로 학생 5명이 구속되었다. 1981년 11월 25일에는 중앙도서관 5층 난간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횃불과 메가폰을 활용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3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11월 8일에는 도시공학과 4학년 황정하가 중앙도서관 6층 창문에 밧줄을 매달고 시위를 했다. 시위 도중 황정하는 사복경찰과 기관원의 제지를 받아 바닥으로 추락했고, 16일 사망했다. 다가오면 뛰어내리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경찰이 접근해 시위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법학과 이수성 교수는 이 사건을 '사실상의 살인'이라고 표현했다. 영화 <밀정>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 경부의 실제 모델은 황옥 경부다. 황정하 열사는 황옥 경부의 친손자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된 것은 이들 사건 이후다. 학교 측은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에 장미 화단을 조성하기도 했다. 도서관 시설물은 도서관 서비스의 변화뿐 아니라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서울대가 중앙도서관에 설치한 쇠창살은 1984년 4월 10일 서울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가 3일 동안 벌인 도서관 점거 농성 과정에서 뜯겨 나가기도 했다.

중앙도서관 입구에 서있는 황정하 열사의 추모비는 서울대학교 안에 세워진 첫 민주열사 추모비다. 서울대 출신 열사 추모비가 중도 주변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은 중앙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가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 무대였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는 '민주화의 길'을 조성해서, 서울대 출신 민주열사의 추모비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집회와 시위의 주요 무대, 대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은 개교 30주년을 맞아 1937년 9월에 문을 열었다. 보성전문 시절부터 도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박동진이다. 화강석을 재료로, 고딕양식으로 지은 중앙도서관 구관은 박동진의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보성전문 시절부터 도서관을 비롯한 본관(1934), 서관(1955), 농과대학(1956), 신관(지금의 대강당, 1956), 여학생회관(1958) 같은 고려대학교 주요 건물을 설계했다. 고려대학교는 개교 70주년을 맞은 1978년 3월 중앙도서관 ‘신관’을 개관했다. ⓒ 백창민

 
대학도서관이 집회와 시위 무대로 활용된 것은 서울대뿐만이 아니다. 1975년 4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이어갔다. 학생들은 교문 밖 진출을 막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에 막혀 밤 9시까지 대치한 학생들은 7일 밤 교내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500여 명의 고대생이 철야농성을 벌인 공간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이었다.

시위 이틀째인 4월 8일 오후 5시를 기해 유신 정권은 고려대에만 적용되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한 대학을 대상으로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도 전무후무했지만, 긴급조치 7호 발동과 함께 고려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캠퍼스에 군부대가 진주했다.

무장 군인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한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긴급조치 7호 발동 10년 전인 1965년 8월 25일, 무장한 군인들이 "한일협정 무효"를 외치는 고대생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고려대 중앙도서관 유리창을 깬 후 자유열람실 안에 최루탄을 난사하기도 했다.

1981년 3월 23일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반체제 동요를 수록한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문예창작과 박문수는 훗날 실천문학사 편집주간을 지냈다.

1981년 4월 14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에 반정부 유인물 3백여 장이 배포되었다.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사학과 이규태를 비롯한 학생 4명이 구속되었다. 1981년 4월 17일에는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이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형사에게 맞아 이가 부러졌다.

1981년 5월 7일 중앙대학교 도서관 3층 열람실과 경영대에 '반파쇼 민주선언'과 '병든 대학에 고하는 양심선언문'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박영권(국문 4)과 이상(사학 4)이 구속되었다. 1981년 5월 11일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책가방을 불사르는 시위로 국문학과 4학년 김진모가 구속되었다.

1981년 5월 20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옥상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유인물 500여 장을 배포한 혐의로 강창선(경영 4)을 비롯한 학생 7명이 구속되었다. 1981년 5월 27일 동국대학교 도서관 3층에서 창밖으로 유인물을 뿌리고 경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메가폰과 칼을 들고 시위하다가 임영태(행정 4)와 이남호(토목 4)가 구속되었다. 졸업 후 임영태는 출판사 푸른나무의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김태훈이 투신해서 사망한 1981년 5월 27일, 한국외국어대 도서관 2층 베란다에서 유인물 3백 장을 배포한 혐의로 이재현(영어 4)이 구속되었다. 1981년 9월 20일 서강대학교 도서관과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유인물을 배포한 사건으로 이득재(영문 3)와 문병우(문과 1)가 구속되었다.

1981년 10월 29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10.29 반파쇼투쟁선언' 유인물을 배포하며 300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곽내혁(철학 3), 조석현(법학 3)이 구속되었다. 1981년 11월 3일 숙명여대 도서관 4층 옥상에서 "전두환은 자폭하라"는 내용이 담긴 '민족생존권을 위한 최후통첩안' 유인물을 배포하는 시위가 벌어져 박성진(정외 3)과 김경순(경제 4)이 구속되었다.

1982년 3월 24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1981년 11월 '문무대 사건'으로 제적된 학생들이 횃불과 메가폰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주은경(교육 4)을 비롯한 4명이 구속되었다. 같은 날 연세대학교 도서관 열람실과 화장실에서 시위를 벌이려다가 붙잡힌 사건이 벌어졌다. '시위 미수' 사건으로 조호걸(경제 4)을 비롯한 5명이 구속되었다. 1982년 3월 25일 동국대학교 도서관 베란다에서 플래카드를 내걸고 유인물을 뿌리면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는 사건이 터져 이시정(인도철학 4)을 비롯한 3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4월 7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도서관 2층 베란다에서 '학원민주화투쟁'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유인물 5백여 장을 배포했다. 이 시위로 정문자(국문 4)를 비롯한 3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4월 12일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도서관 4층 베란다에서 유인물 3백 장을 뿌리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이은숙(정외 4)과 홍정이(국문 4)가 구속되었다.

1983년 5월 18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 3백여 명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우리는 분노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 7백여 장을 뿌리며 시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임현주(정외 4)와 공계진(화학 4)이 구속되었다. 1983년 6월 21일 한국외국어대학교 도서관 2층과 본관에서 반정부 유인물 2백 장을 배포한 시위로 이병호(경제 4), 이용관(경제 4)이 구속되었다.

1983년 11월 2일 고려대학교 교양관 근처에서 시작된 시위가 중앙도서관으로 이어졌다. 고려대에 진입한 경찰 페퍼포그 차량이 도서관 앞에서 최루탄을 쏴대면서 열람실 안까지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이 시위로 도서관 6층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한 사회학과 신수현이 구속되었다.

1985년 9월 5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민중민주화운동추진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를 주도한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회는 경찰이 투입될 경우 분신하겠다며 2리터 가량의 휘발유를 자기 몸에 붓기도 했다.

긴급조치가 2159일 동안 이어진 1970년대와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대는 도서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만으로도 구속과 제적을 각오해야 했다.

'도서관 타잔'의 출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북측면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서울대학교는 ‘북향’ 건물이 많다. 중앙도서관 역시 북서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1978년 11월 13일 김용흠은 나일론 끈으로 몸을 묶고, 중앙도서관 북측면에 매달렸다. 도서관 건물에 매달린 그는 인문관을 바라보며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 백창민

 
캠퍼스에 상주하는 기관원과 사복경찰을 피해 시위를 하려다 보니,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1978년 11월 13일 서울대 국사학과 3학년 김용흠은 중앙도서관 5층 열람실 난방기에 나일론 끈을 고정했다. 몸에도 끈을 묶은 그는 도서관 창문 난간에 매달려 메가폰으로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렸다. 사복형사가 잡으려 하자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가 지지부진해지면서 붙잡히긴 했으나 끈에 의지해 도서관 난간에 매달린 김용흠은 '관악산 타잔'이라 불렸다.

'관악산 타잔'을 필두로 수많은 '도서관 타잔'이 출현했다. 1982년 5월 27일 동국대학교 도서관 베란다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전두환 타도"와 같은 구호를 외치자 2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도서관 4층에서 떨어진 농업생물학과 3학년 김창환은 다리가 부러졌고, 그를 포함한 학생 4명이 구속되었다.

1982년 9월 23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이근원이 중앙도서관 옥상에 로프를 걸고 매달려 유인물 300여 장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근원은 오른팔 20여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고 구속되었다.

1983년 4월 15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벽에 페인트로 "반파쇼"라는 글씨를 쓰고 도서관 시계탑 건물에 매달려 유인물을 뿌리며 500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2명이 구속되었다. 이 시위를 주도한 여학생이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상의가 뜯겨 젖가슴이 드러난 채 끌려가 학생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83년 5월 11일 전남대학교 도서관 4층에서 등산용 줄에 몸을 매달고 내려오던 학생이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추락하는 사건이 있었다. 부상당한 경제학과 4학년 이수영은 구속되었다. 1983년 6월 3일 연세대 중앙도서관 5층에서 학생이 줄을 타고 내려와 플래카드를 펼치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이강진(사학 4)을 비롯한 3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6월 23일 동국대학교 도서관 3층에서 유리창을 깨고 베란다로 나간 학생이 유인물 1백여 장을 배포하고 9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2명이 구속되었고, 경제학과 4학년 유재건은 동맥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시위로 구속되고 제적당한 유재건은 훗날 그린비 출판사를 창업했다.

1983년 11월 2일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도서관에서 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던 한덕권(금속 3)이 추락해서 실신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시위로 3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11월 10일 서강대학교 도서관 3층에서 로프를 매달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로 김영수(정외 4)가 구속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은 도서관 건물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 과정에서 황정하처럼 목숨을 잃거나 떨어져 부상을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조선대학교'가 될 뻔한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설립자인 원두우(Horace. G. Underwood)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관’이라 명명했다. 아펜젤러관과 함께 1924년 완공되었다. ‘학관’이라 불린 언더우드관은 연희전문 시절 ‘도서관’이 있던 곳이다. 연희전문 시절 동주와 몽규가 도서관으로 이용한 곳이 이 건물이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 백창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은 1915년 3월 5일 YMCA에서 '조선기독대학'으로 출발했다. 연희전문은 1917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의 30만 평 부지를 매입하며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연세대학교의 중심 건물은 '학관'이라 불린 '언더우드관'이다. 1924년 완공된 언더우드관 3층에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의 '도서관'이 있었다. 연희전문 도서관은 1924년 12월 개관 시점에 설립자인 원두우(Horace G. Underwood)가 기증한 230권을 포함, 5,797권의 장서로 출발했다.

연희전문 도서관장은 화학과 밀러(E. H. Miller) 교수의 부인, 제임스 피셔(James. E. Fisher), 유경상, 이묘묵, 일본인 교수 니카이도 마스(二階堂眞壽)가 차례로 맡았다. 연희전문 38학번 윤동주와 송몽규가 입학하던 시점의 도서관장은 조선인 최초로 해외에서 '도서관학' 학위를 받은 이묘묵이다. 이묘묵은 시라큐스대학(Syracuse University)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1934년 4월부터 1940년까지 연희전문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이묘묵 관장 시절 연희전문 도서관은 듀이 십진분류법을 도입하고, 열람목록을 카드로 작성해서 비치했다. 1940년 당시 연희전문 도서관에는 신한철, 김병서, 한상희 3명이 직원으로 일했다. 당시 연희전문 전체 교직원이 18명이었는데, 1/6이 도서관 직원이었다. 1941년 연희전문 예산은 16만 7천402원이었고, 도서관 예산은 10,910원으로 전체 예산의 1/16 수준이었다.

연희전문 도서관장 이묘묵은 미군정 때 사령관 하지의 통역관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 정부 때 주영대사를 지냈다. 미국 유학파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했던 이묘묵이 미군정에 발탁된 배경에는 영어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미 24군단은 한반도 상륙을 앞두고 한국어에 능통한 미군을 찾았다. 이때 발탁된 인물이 조지 윌리엄스(Geroge Williams)다. 조지의 아버지인 프랭크 윌리엄스(Frank Williams)는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프랭크는 충청도 공주에 '영명학교'(지금의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세우고 선교를 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통역이자 측근으로 인사 정책을 주도한 조지 윌리엄스는 공주 영명학교 출신을 집중적으로 발탁했다. 이 과정에서 발탁된 영명학교 교목 출신 이묘묵과 졸업생 조병옥(2회)은 미군정 시대를 주름잡는 인물이 되었다. 이묘묵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남조선 땅덩어리의 절반을 먹을 정도로 막강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도서관장 출신으로 '권세'를 떨친 사람을 꼽으라면 이묘묵이 첫 손에 꼽힐 것이다. 경무국장을 역임한 조병옥도 미군정 시대 경찰 총수로 큰 권력을 행사했다.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 출신이다.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말 일제에 의해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뀐 연희전문은 도서관과 학과 연구실 책을 포함해서 7만5144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연희전문은 1946년 8월 15일 부로 미군정청의 인가를 얻어 '연희대학교'로 승격했다. 종합대학교 출범 과정에서 학교명을 '조선대학교'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옛 이름을 살려 '연희대학교'로 정했다. 종합대학 전환과 함께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며 남녀공학을 시행했다.

이즈음부터 개신교 고등교육기관인 연희대, 세브란스의대, 이화여대의 통합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도서관, 실험실, 강당, 대학원을 함께 사용하고, 점진적으로 세 학교를 통합하자는 안이었다. 여성 교육의 독자성을 주장한 이화여대가 통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이 구체화되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연희대학교 캠퍼스는 '격전지'였다.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도서관이 있던 언더우드관은 포격으로 지붕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장서가 빗물에 침수되거나 도난, 파손되었다. 전후 연희대학교는 도서관 장서 피해 수량을 5만 권으로 집계했다. 세브란스의전은 150평 규모 도서관에 1만 5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전쟁 과정에서 모든 책이 소실되고 도서관도 파괴되었다.

연희전문 시절 언더우드관 3층에 있던 도서관은 1957년 11월 23일 지금의 '경영관' 자리에 건물을 지어 옮겼다. 바로 '용재관'(庸齋館)이다. 용재관은 연세대학교가 독립건물로 지은 첫 도서관이다. 도서관을 완공한 1957년은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통합한 해다. 통합 출범한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에 연희대학 초대 총장을 맡았던 백낙준이 취임했다.

용재관 개관 한 해 전인 1956년 12월, 연희대학교는 국내 대학 중 최초로 '도서관학과'(지금의 문헌정보학과)를 신설하고, 1957년 20명의 신입생을 뽑았다. 같은 해 4월부터 1964년 9월까지 도서관 인력 양성을 위한 '도서관학교'를 개설해서 163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연세대에 개설된 도서관학교는 초기 한국 도서관 인력 양성에 기여했다.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공동 도서관'을 추진한 사연
 

연세대학교 용재관 ‘용재관’은 연세대학교가 개교 이래 처음으로 독립 건물로 지은 도서관이다. 1957년 11월 23일 개관한 건물을 연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을 기려 ‘용재관’이라 명명했다. 지금은 철거되었고 용재관 자리에 경영관이 건립되었다. ⓒ 백창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대의 통합 과정에서 학교 이름을 두고 갈등이 일기도 했다. 기독교대학교, 한국기독교대학교, 동명대학교, 태백대학교, 한경대학교, 신민대학교 6개 후보 중 이사회에서 높은 지지를 받은 이름은 '기독교대학교'와 '신민대학교'였다. 연희대 교수와 동문회가 두 학교의 앞글자를 딴 이름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연세대학교'라는 교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뻔했다.

용재관 자리는 초기부터 도서관 자리로 계획된 곳이다. 머피 앤 다나 건축사무소(Murphy & Dana Architects)가 작성한 '캠퍼스 마스터플랜'(Revised General Plan Chosen Christian College, Seoul Korea)을 살펴보면, 용재관 자리에 Library를 짓는다는 계획이 담겨 있다. '용재'(庸齋)는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백낙준의 호다. 그를 기리기 위해 '용재관'이라고 명명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졌지만 '용재관'은 이화여자대학교 '헬렌관'(Helen Hall)과 함께 '친일파'에게 헌정된 도서관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김활란 총장을 기려 도서관 이름을 '헬렌관'이라고 명명했다. '헬렌'(Helen)은 김활란의 세례명이다. 도서관이었던 헬렌관은 지금도 이화여대 교정에 남아 간호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다. 

기독교계 명문사학이자 친일파 총장을 기념하여 도서관 이름을 명명한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1954년 '공동 도서관' 건립을 추진한 '인연'이 있다. 1954년 연희대와 이화여대는 두 학교가 공동으로 사용할 '연합 도서관' 건립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도서관 건립 위치는 두 학교의 중간 지점으로, 지금의 연세대 총장 공관 동쪽 부지였다. 2천 평 부지에 장서 30만 권, 좌석 1200석을 갖춘 도서관을 공사비 50만 달러를 들여 1956년부터 짓자는 계획을 세웠다. 공동 도서관 계획이 백지화되지 않았다면, 연세와 이화 두 학교 경계선에 공동 도서관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공동 도서관 건립이 무산되면서 연세대학교는 지상 3층, 1천 평이 넘는 연면적에, 3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단독 도서관을 지었다. 용재관이 문을 연 1957년 3월 시점에 연세대학교 장서는 12만 5300권이었다. 1961년 15만 3000여 권이던 장서는 1965년 18만 1509권, 1971년에는 25만 7281권이 되었다.

용재관이 철거된 후 경영관이 지어졌지만, 용재 백낙준 동상은 지금도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자리하고 있다. 김활란의 동상이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연세대학교는 연희전문 시절부터 단과대 별로 도서관을 따로 두었다. 단과대 도서관이 시위 현장으로 바뀐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1973년 11월 14일 상대 도서관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 구호가 터지면서 시위가 발생했다. 300여 명의 학생은 백양로를 거쳐 신촌 로터리까지 진출했다. 이 시위를 주도한 경제학과 김학민은 훗날 한길사 편집부장을 거쳐, 자기 이름을 딴 '학민사'라는 출판사를 열었다.

연세대학교는 개교 85주년을 맞이한 1970년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마스터플랜>에는 핀슨홀과 한경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도서관을 짓는다는 계획이 담겼다. 이 계획대로 도서관을 지었다면 윤동주와 송몽규의 흔적이 배어있는 핀슨홀은 사라졌을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옛 야구장 자리에 1977년 5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1979년 4월 '중앙도서관'을 개관했다.

공사비는 25억 4천7백여만 원이 들었고, 시공은 대우개발주식회사가 맡았다. 새로 지은 중앙도서관은 철근콘크리트조로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였다. 외벽에는 화강석을 둘렀다. 1974년 31만 5천198권이었던 장서량은 새 도서관이 문을 연 1979년 41만 2천212권이 되었다. 용재관은 연면적 1344평에 800여 좌석이었는데, 새 중앙도서관은 연면적 5322평에 2612석을 갖췄다. 새 도서관 규모는 용재관 시절보다 3배 이상 커졌다.

연세대는 중앙도서관을 학생회관과 마주 보는 위치에 지었다. 학생회관과 중앙도서관은 연세대학교 김정수 교수가 설계했다. 1968년 완공된 학생회관 3층은 이념서클이라 불린 언더서클의 아지트였다. 이한열이 활동한 '만화사랑' 동아리방도 이곳에 있었다.

건축가 김정수는 천재 건축가 이천승과 함께 1953년부터 '종합건축연구소'(종합건축)를 운영했다. 둘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 선후배였다. 경성고공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하는데, 이천승은 경성고공을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날개>를 쓴 이상 역시 경성고공 수석 졸업자인데, 그는 전교 수석이 아닌 건축과 수석이었다).

종합건축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같은 대한민국 주요 도서관을 설계한 곳이다. 화재로 철거된 시민회관(1956년), YMCA 본관(1960년), 장충체육관(1963년), 한국증권거래소(1975년), 국립중앙박물관(1982년), 한국조폐공사(1985년) 같은 굵직한 건축물이 종합건축의 작품이다.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도서관 앞 광장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민주광장 학생회관에서 바라본 중앙도서관의 모습이다.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광장이 바로 ‘민주광장’이다. 중앙도서관 오른편으로 보이는 동상은 용재 백낙준의 동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부 독재 시절 학생들은 도서관보다 맞은 편 학생회관 서클룸에서 책을 탐독하며 사회 변혁을 위한 공부를 했다. 그 시절 학생들에게 진짜 ‘도서관’은 어디였을까? ⓒ 백창민

 
이한열 군의 모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광장은 '민주광장'이라 불렸다. 군사정부 시절 수많은 학생의 시위와 집회가 이곳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중앙도서관은 건립 공사 현장이 시위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77년 10월 25일 연세대 시위에서 전경이 페퍼포그 차량을 앞세워 교내로 진입하자,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공사 현장에 쌓인 돌과 각목, 비계를 활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날 시위대는 이화여대 캠퍼스와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강대학교까지 진출했다.

1980년 11월 18일에는 학생들이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2층과 상경대, 식당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문교부는 연세대학교 측에 경고장을 보냈고, 3일 후인 11월 21일 연세대학교 안세희 총장과 박기혁 부총장이 사표를 냈다가 반려받는 소동이 있었다. 안세희 총장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동생이다.

1981년 5월 6일 신군부의 '국풍 81'을 반대하는 '81 연세대 반파쇼 구국투쟁선언' 유인물 5백 장이 중앙도서관 앞에서 배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토목공학과 우원식은 훗날 국회의원이 되어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우원식은 1977년 4월 19일 도서관 앞에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연행된 적도 있다.

1981년 11월 25일에는 채플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을 대상으로 중앙도서관 4층에서 양경희(아동 3)가 '반파쇼 구국투쟁선언문'이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뛰어내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이고 2명이 구속되었다. 1982년 6월 8일 중앙도서관 앞에서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고 500-600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이다가 일부 학생이 신촌역까지 진출했다. 이 사건으로 윤평호(사회 4)를 비롯한 4명이 구속되었다.

1983년 4월 20일 학도호국단 주최 기념행사를 마친 학생 1천5백 여 명이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윤동주 시비 앞에 모여 스크럼 짜고 시위하던 7백여 명의 학생을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서 해산시켰다. 1983년 11월 9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백양로에서 벌어진 시위로 이상성(전기 3)을 비롯한 5명이 구속되었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 시위가 이어질 때 광장에 모인 학생뿐 아니라 도서관에 있던 학생인들 책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학생들은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닌 거리에서 진실과 진리를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는 이런 선언문을 남기고 불꽃처럼 스러졌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 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전의 결의로 진격하자."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거리를 메운 수많은 학생과 시민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우리 민주주의는 조금씩 전진했다. 그런 맥락에서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 광장은 '민주'와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도서관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었던 시절
 

연세대 교정에 자리한 한열동산 ‘한열동산’은 연세대 학생회관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한열동산이 위치한 곳은 이한열이 공부한 도서관, 동아리 활동을 한 학생회관, 싸우다 쓰러진 교문 앞, 그가 거닌 백양로, 마지막으로 실려간 세브란스병원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자리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1988년 세운 이한열 추모비의 훼손이 심하자, 조형물을 다시 마련해 2015년 6월 9일 제막식을 열었다. ⓒ 백창민

 
'68년' 이후 많은 나라에서 학생운동이 퇴조한 것과 달리, 한국 학생운동은 어떻게 1990년대 중반까지 '장기 지속'할 수 있었을까? '시민은 있었으나 시민사회는 형성되지 않은' 그 시절, 학생운동은 시민사회 역할을 대신하며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다.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뿐 아니라 수많은 대학도서관이 투쟁의 현장으로, 민주화의 무대로 기능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도서관이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시절을 꼽으라면 단연 이 시대가 꼽힐 것이다. 흥미로운 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가 '보루'를 지키는 '전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도서관인이나 사서는 자료 제공이나 모임,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 대학도서관은 학생이라는 '이용자'에 의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 되었다.

그 시절 대학도서관이 언더서클이나 사회과학출판사, 인문사회과학서점처럼 사회 변혁의 지식과 사상을 제공한 공간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는 전자 복사기 보급 같은 인쇄 제본 기술의 발달로, 학생들은 도서관이 아닌 곳에서도 쉽게 책과 문건을 구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학도서관이 한국 민주화 투쟁의 주요 '무대'로 기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된 대학도서관에 대한 불만은 캠퍼스 '생활도서관'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0년 5월 17일 김규환의 주도로 고려대학교에서 개관한 생활도서관은 이화여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88년 9월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남쪽 동산에 이한열 추모비를 세웠다. 이후 이곳은 '한열 동산'이라 불리게 됐다. 2015년 6월 한열 동산에 새로운 기념비가 다시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198769757922라는 12개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 숫자들은 이한열이 직격탄에 맞고 쓰러진 1987년 6월 9일과 그가 숨을 거둔 7월 5일, 그의 노제가 치러진 7월 9일, 그리고 꽃다운 그의 나이 22살을 의미한다.

서울대학교에 세운 박종철 열사 흉상은 중앙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고 있다. 흉상 근처 기념석에는 그가 숨진 후 그의 벗들이 바친 추모시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수많은 희생과 그 희생을 헛되지 않도록 '기억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 민주주의는 여기까지 왔다. 도서관이 기억하고 전승할 또 하나의 자료는 도서관을 무대로 싸운 이름 모를 사람의 헌신과 희생 아닐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운, 그들 말이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 이용시간 : 소담샘 / 24시열람실 / 가온마루 / 6층 1, 2열람실 : 24시간, 인문자료실 / 사회.과학기술자료실 / 인문사회참고자료실(평일 09:00 - 22:00, 토요일 09:00 - 17:00, 일요일 휴실), 국학자료실 (평일 09:00 - 17:00, 토일요일 휴실), 대학원열람실(06:00 - 23:00)
- 휴관일 : 매주 일요일, 법정 공휴일(24시간 개방 공간은 연중 무휴)
- 이용자격 : 자격 제한 없음. 대출은 재학생만 가능. 무료
- 홈페이지 : http://library.yonsei.ac.kr/
- 전화 : 02-2123-6100
- 운영기관 :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 주소 :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
- 이용시간 : 단행본자료실 / 신문자료실 / 신착연속간행물실 / 연속간행물자료실 / 참고자료실 / 정보검색실 / 중앙대출실(평일 09:00 - 21:00, 토요일 09:00 - 17:00, 일요일 13:00 - 17:00), 국제기구자료실 / 시진핑자료실(평일 09:00 - 17:30), 고문헌자료실(평일 09:00 - 18:00), 1, 2, 3자료실(06:00 - 23:00)
- 휴관일 : 설연휴, 추석연휴, 기타 관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 이용자격 : 재학생과 졸업생, 관악구민, 도서관회원, 19세 이상의 시민. 대출은 재학생과 교직원만 가능. 무료
- 홈페이지 : http://library.snu.ac.kr/
- 전화 : 02-880-8001
- 운영기관 : 서울대학교
덧붙이는 글 '도서관 앞 광장'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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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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