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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한마디에 후계자 박탈, 그는 '비운의 황태자'인가

[한국 기업인 열전 5]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장남 이맹희

등록 2020.02.22 12:14수정 2020.02.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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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장남 이맹희, 3남 이건희(왼쪽부터). ⓒ .

 
재벌 주식회사, 기업인가 왕실인가

주식회사는 주주 전체의 것이지, 대주주 1인이나 경영자의 것이 아니다. 최대 주주나 경영자가 회삿돈을 임의로 쓰거나 불법적 방법으로 회사에 손실을 끼치면, 횡령죄나 배임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설령 지분 100%을 가진 '1인 주주'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대법원은 처음에는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1983년 12월 13일 전원합의체 판결(사건번호 83도2330)을 통해 "1인 회사에 있어서도 행위의 주체(1인 주주)와 그 본인(회사)은 분명히 별개의 인격"이라는 이유로 유죄를 인정했다.

돈이 1인 주주의 소유 하에 있을 때와 회사의 소유 하에 있을 때는 법적 효과가 많이 달라진다. 어느 쪽에 소유권이 있느냐에 따라 세금도 달라지고 채권자들의 이해관계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1인 주주가 회삿돈을 자기 통장에 임의로 넣은 경우에도 횡령죄나 배임죄를 적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1인 주주도 회사를 남의 것처럼 소중히 다뤄야 한다면, 최대 주주의 지분이 50% 미만인 경우에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개미군단으로 불리는 수많은 주식 투자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정부로부터 특혜 지원이나 세제 지원 등을 받았다면,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도 함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 재벌기업 상당수는 이제껏 최대 주주의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됐다. 마치 왕실이나 귀족 가문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최대 주주의 가족들이 회사 경영과 재정에 임의로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영권 승계도 그들 내부의 세습에 의해 진행됐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마치 내 것인 양 다뤄왔던 것이다.

순탄하게 그룹 2인자 오른 이맹희

그런 부조리를 반영하는 수많은 사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를 들라면,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후계자 선정 문제를 들 수 있다. 이건희 현 회장이 지명되기 전에, 그의 큰형인 이맹희 전 삼성물산 부사장이 후계자가 됐다가 교체된 일이 있었다. 이맹희가 지명됐다가 탈락하는 과정을 보면, 한국 재벌기업들의 경영권 승계가 얼마나 전근대적인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맹희와 이건희 중 누가 적절한 후계자였는가'가 아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국가적 지원을 받았으므로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한국 최대 기업집단의 경영권이 어떤 방식으로 세습됐는가 하는 점이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임의로 취급하는 재벌기업들의 실태를 파헤치는 것이 이 글의 주안점이다.

영화 <기생충>이 새로운 역사를 쓴 지난 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검정색 옷을 입고 등장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이맹희 전 부사장의 첫째 자녀이자 장녀다. 이재현 회장은 둘째 자녀이자 장남이다. 이맹희 전 부사장의 자녀들은 이미경·이재현·이재환·이재휘다.

이맹희는 1931년 6월 20일 경남 의령에서 어머니 박두을과 아버지 이병철의 둘째 자녀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아버지 이병철(당시 21세)은 와세다대학 정경과(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이맹희가 태어난 지 3개월 뒤 이병철은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2학기 말이 되자 심한 각기에 걸리고 말았다"면서 각기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학습 의욕 저하 등으로 1931년 9월 귀국했다고 회고했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귀국한 아들 이병철을 향해 아버지 이찬우(1879년 생)는 <기생충>에 나오는 "넌 다 계획이 있구나"와 비슷한 말을 던졌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이찬우는 "너도 무슨 요량이 있었겠지"라며 아들의 무단 귀국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귀국한 이병철은 3년 뒤인 1934년부터 집안 자금을 투입해 사업가로 변신한다.

사업가의 아들로 성장하게 된 이맹희는 서울 수송국민학교(초등학교)를 거쳐 대구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6년제 경북중학교를 다녔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노태우·정호용·김복동이 그의 경북중학교 동기였다. 전두환은 학교는 다르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1950년(19세)에 경북중학을 졸업한 이맹희는 육군사관학교나 군대로 간 친구들과 달리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도쿄농업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57년(26세)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 입학해 2년 뒤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친 뒤 한일은행(훗날 한빛은행으로 통합) 창구담당 직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대주주로 있는 은행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안국화재(지금의 삼성화재)와 제일제당·제일모직 등의 직원을 거쳐 17개 계열사의 부사장(지금의 그룹 부회장)이 되면서 삼성그룹 2인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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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은 자신이 지휘했다고 밝혔다.(한겨레, 1993. 6. 29) ⓒ 한겨레 지면 캡처

 
급기야 '대리청정'... 아버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 상태에서, 조선시대로 치면 대리청정 같은 일이 그에게 생겼다. 1966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이병철이 경영 일선을 지킬 수 없게 된 결과였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자금을 만들 목적으로,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건설 자금을 만들 목적으로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을 비롯해 변기·냉장고·에어컨·전화기·스테인레스판 등을 밀수하는 데 합작했다. 하지만 밀수가 들통 나고 국민적 공분이 일어나자, 박 정권은 공범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삼성을 대했다.

박 정권은 위기에 봉착한 이병철을 압박해 1967년 10월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삼성 지원 때문에 재벌 순위가 떨어진 삼양그룹과 모태를 함께하는 <동아일보>가 '한국비료 국가 헌납' 여론을 조성하며 삼성을 압박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병철은 경영권을 아들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섰다. 이때 이병철은 57세, 이맹희는 36세였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주들뿐 아니라 국민적 이해관계까지 뒤얽힌 삼성 경영권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한테 점포를 맡기고 뒷방으로 물러앉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병철이 만든 <중앙일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이병철 일가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이용우의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에 따르면, 이병철은 사장단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경영권을 넘겼다.

"내는 당분간 삼성의 일을 모두 맹희 부사장한테 맡기고 경영 일선에서 떠나 있을라 캅니더. 맹희 부사장이 아직 젊고 경륜도 짧은 편이지만, 여러분들이 잘 좀 도와 주이소. 내도 출근은 계속 하겠지만, 예전처럼 일을 챙기는 것은 모두 맹희 부사장이 맡아서 할 낍니다. 실제적인 일은 맹희 부사장과 의논해 주시기 바랍니다."

왕들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2선으로 물러나거나, 아예 왕권을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앉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위 책 저자인 이용우는 이맹희를 사도세자에 비유했지만, 이 시기의 이맹희는 사도세자뿐 아니라 양녕대군과도 많이 비슷했다.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와 달리, 이맹희는 후계자 직에서 쫓겨난 뒤에도 양녕대군처럼 오랫동안 생존했다. 이건희가 충녕대군(세종)은 아니지만, 이맹희가 쫓겨난 뒤 동생 이건희가 뒤를 이은 것을 봐도 그렇다.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맹희는 이용우의 글에 따르면 일벌레처럼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과도한 의욕을 보인 탓에 임원들과도 충돌하고 직원들로부터도 원성을 샀다. 리더가 직원들 보는 앞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솔선수범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이 됐던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때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은 아들이 보수파인 노론당 신하들을 잘 이끌어가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도세자가 10대 초반부터 노론당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진보적 성향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노론당의 미움을 샀고, 이는 그가 아버지의 신임을 잃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병철도 아들을 바라보면서 영조와 비슷한 우려를 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맹희는 아버지와는 충돌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우려를 자아낼 만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가 계획한 것과 약간 다른 방향으로 그룹을 이끌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전자 및 중화학 쪽으로 삼성을 이끌어가고자 한 반면, 그는 전자 및 자동차 쪽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1969년 1월 6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이맹희의 모습. ⓒ 매일경제

 
총수 맘대로 후계자 정했다가 빼앗았다가

결국 이맹희는 아버지의 불신임을 받았다. 아버지가 경영권을 회수해 갔고, 뒤이어 동생 이건희가 후계자로 떠올랐다. 이 과정 역시 왕실이나 귀족 가문의 가장이 권력을 회수하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이병철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삼성에 대한 박 정권의 견제도 어느 정도 약해진 뒤였다. 이용우의 책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아버지가 갑자기 아들을 부르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니, 미국에서 무신 공부를 했노?"라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부지! 저, 경영학 박사학위 안 받았십니꺼"라고 답하자, 아버지는 아들이 그간 보여준 몇몇 실수를 거론하면서 "한심한 놈!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카는 그릇이 고작 그거밖에 안 되나?"라고 쏘아붙였다.

아버지는 "니, 지금 삼성의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라고 물었다. 아들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 열댓 개는 되는 것 같십니더"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니, 그거 혼자서 다 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일일이 다 잘 할 수는 없십니더"라는 답이 나오자, 아버지는 "그라모, 니가 할 수 있는 거만 해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는 며칠 뒤 아들을 다시 불러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아들이 부사장 직함을 갖고 있는 17개 계열사의 명단을 적은 종이였다. 아버지는 메모지를 보여주더니, 그중 14개 회사명에 죽죽 줄을 그었다. 삼성물산·삼성전자·제일제당만 남기고 나머지에서 손을 떼라는 뜻이었다. 그룹 전반에 대한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맹희의 그룹 경영은 갑자기 종결됐다. 나머지 3개 기업에 대한 경영권도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병철의 경영 복귀가 이렇게 이뤄졌던 것이다. 주주들뿐 아니라 국민들의 이해관계까지 걸린 대한민국 최대 기업집단의 경영권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처럼 사적으로 오고간 것이다. 왕실이나 귀족 가문처럼 경영되는 한국 재벌기업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영권이 사적으로 오고갔다는 점은 이병철의 주장에서 한층 더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경영권을 회수한 뒤로 이병철은 이맹희의 대리청정 기간이 6개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호암자전>에서 "후계자의 선정에는 덕망과 관리 능력이 기준이 안 될 수 없다"고 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하여 물러났다."

이맹희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이 일한 기간이 6개월이 아니라 7년이라고 말했다. 이용우도 7년이라고 썼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는 이맹희가 삼성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은 양쪽 주장을 입증할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양측이 주장하는 기간이 한두 달이나 일이 년도 아니고 '6개월 대 7년'이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점과 더불어 어느 쪽의 주장도 입증할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점은, 경영권 승계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68년 7월 16일자 <매일경제> 기사 '제2의 탄생 ··· 삼성재벌 (5)이맹희씨 어제 오늘'은 이맹희를 "새 총수"라고 부르면서 "부사장 직함의 그를 감히 총수라고 이르는 것은 이병철 회장이 그의 후계자로 책봉(?), 현재 수습총수 과정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1968년 7월에도 이맹희가 '수습총수'로 불리며 그룹을 경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보도다.

1970년 3월 25일자 <매일경제> 1면 하단에 '축하해주신 분들'이란 코너가 보인다. 이 신문의 창간 4주년을 기념해 축하 화분을 보낸 사람들의 명단이 실린 코너다. 여기에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사장 이맹희"가 등장한다. 삼성을 대표해 이맹희가 선물을 보냈으니, 이 시점에도 그가 경영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맹희가 삼성 경영에서 손을 뗀 것 같다는 보도는 1975년에 나온다. 그해 3월 5일자 <경향신문> '삼성그룹 약간의 변동, 3남·사위 부각 ··· 장남은 후퇴'라는 기사는 3남 이건희와 사위 구자학이 도약한 데 반해 "이 회장의 장남인 맹희 씨는 이번 주총을 계기로 전주제지 이사직에서도 물러나 삼성 경영진에서 완전 소외된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고 보도했다.

이런 보도들을 보면. 이맹희의 경영권 행사 기간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이병철보다는 이맹희의 진술이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들에게 경영권을 줬다가 도로 회수한 것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인해 아버지가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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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지병인 암으로 별세한 고 이맹희의 시신이 지난 2015년 8월 17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 화물청사를 통해 운구되고 있다. ⓒ 연합뉴스

 
진짜 '비운의 황태자'는 누구인가

중요한 것은, 이병철이 6개월이라고 주장해도 괜찮을 정도로 확실한 물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당시의 언론보도들을 근거로 이맹희의 경영권 행사 기간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공공의 것을 개인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한국 재벌의 문제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재벌기업의 공공화를 위해 한국 사회가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맹희는 비운의 세자로도 불리고 비운의 황태자로도 불린다. 하지만 진짜로 비운을 겪은 쪽은 이맹희도 아니고 이병철도 아니다. 세제 지원이나 주식투자 등을 통해 재벌기업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나 채권자로서 고도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공공의 것인 재벌기업이 사적으로 운용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수많은 대중이야말로 진짜로 비운의 세자이며 비운의 황태자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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