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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는 '깜깜이 기간'에 만들어진다는 역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9일부터 시작된 여론조사 공표금지

등록 2020.04.09 12:19수정 2020.04.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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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0시부터 선거 여론조사 공표 금지가 시작됐다. ⓒ 오마이뉴스

 
4월 15일 치러지는 21대 총선의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이 9일 0시부터 시작됐다. 공직선거법 제108조 제1항에 따라 "누구든지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선거에 관하여 정당에 대한 지지도나 당선인을 예상하게 하는 여론조사(모의투표나 인기투표에 의한 경우 포함)의 경위와 그 결과를 인용해 보도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최종 결정이나 선택이 임박하면 평소 예측하지 못한 의외의 변수가 튀어나오기 쉽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뜻밖의 변수로 판세가 뒤바뀌는 일이 있다. 후보자나 정당은 물론이고 적극 유권자들도 극도로 긴장돼 있다 보니,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선거일이 임박할수록 선거정보의 중요성이 한층 더 커진다. 그런데도 공직선거법은 이 시기에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된 상태에서 깜깜이 선거를 초래한다는 비판도 내놓는다.

김기춘, 정몽준, 진박공천 논란... 선거 결과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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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0일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 출석해 답변도중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 남소연

 
김대중·김영삼·정주영 후보가 격돌했던 1992년 대통령선거 때는 대통령선거법 제65조에 따라 선거일 공고일인 11월 20일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됐다. 그러다가 선거일 7일 전인 12월 11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부산시장·부산경찰청장·부산교육감·부산지검장·부산상공회의소장 및 안기부 부산지부장과 함께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 감정을 부추겨 선거 판세를 바꾸는 논의를 했던 것이다.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돕고자 벌어진 이 사건은, 언뜻 봐선 민자당이 비판의 화살을 받는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 사건은 오히려 민자당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그 기간에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가 허용됐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장담할 수 없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초원복국 모임이 민자당 지지층의 경각심을 촉구하기는커녕 되레 이들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면, 이것이 투표일 당일에 유권자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002년 대선 전날에는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파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무현 후보를 곤경에 빠트릴 것 같았던 이 사건은 오히려 노무현에게 표가 몰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깜깜이 선거' 기간이 얼마나 극적이고 역동적인 시기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2016년 20대 총선 때도 막판에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4월 4~6일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새누리당이 39%, 더불어민주당이 21%, 국민의당이 14%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선거일이 임박해 새누리당에서 벌어진 '진박 공천 논란'이 상황을 바꿔놨다. 이로 인해 중도층 표심이 민주당으로 옮겨가면서 민주당이 123석, 새누리당이 122석을 얻었다. 이 결과는 그해 겨울의 촛불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고 하지만, 선거에 관한 역사는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에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총력이 집중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기간에 유권자들은 깜깜이로 지내야 한다. 정보를 많이 얻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정보가 차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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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7일 저녁 경기도 일산 뉴코아백화점앞에서 공동유세를 벌이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대표. ⓒ 장철영

  
공표금지 옹호론 : 선거 공정성

그렇고 해서 여론조사 공표금지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금지기간 중 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보도되면 자칫 선거인의 진의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고, 불공정하거나 부정확한 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될 경우 선거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우려가 있다"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선관위의 당부를 자세히 풀이하면, 여론조사 공표로 1위 후보자에게 표가 쏠리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나, 약세 후보에게 동정표가 쏠리는 열세자 효과(Underdog Effect) 등으로 인해 표심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밴드왜건은 악단을 태우고 서커스 행렬을 선도하는 마차나 차량을 말한다. 밴드왜건이 풍악을 울리며 행진하면 행인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다니는 현상에 착안해,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투표 의사결정을 밴드왜건 효과라 부르게 됐다.

밴드왜건 및 열세자 효과를 차단하는 규정이 한국의 법령에 도입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다. 1958년 1월 25일 제정된 '참의원선거법'에 "누구든지 선거에 관하여 당선 또는 낙선을 예상하는 인기투표를 할 수 없다"는 제68조 규정이 등장했다. 같은 날 제정된 민의원선거법 제78조에도 동일한 규정이 들어갔다.

우리나라에서 공표금지 조항의 기원

오늘날의 선관위는 유권자 표심의 왜곡을 막기 위한 제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사람들의 의도는 그런 데 있지 않았다. 2008년에 <공법연구> 제36집 제3호에 실린 이희훈 선문대 교수의 논문 '선거 여론조사의 결과 공표 금지규정에 대한 헌법적 고찰 - 알 권리의 침해를 중심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 10년 장기집권과 갖가지 실정으로 국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게 되자, 인기투표를 허용하게 되면 많은 소속 의원들의 인기도가 선거일 전에 백일하에 드러남으로써 사기 저하 등 선거전략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었고, 인기투표의 결과와 부정선거로 나타난 득표수에 현저한 차이가 있을 때 큰 낭패를 볼 우려가 있어 인기투표를 금지하려고 했다."
 
자유당의 불법 개헌 및 장기집권과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자유당 후보들의 저조한 인기가 드러나고 부정선거의 실상이 폭로되는 것을 막고자 공표금지 조항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야당이 그런 제도의 도입에 합의해준 것은 야당은 야당대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당이 자금력을 동원해 거짓 여론조사를 벌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랬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야당은 자금 면에서 여당에 열세였으므로 인기투표가 금력이나 권력의 개입으로 불공정하게 실시되어 그 결과가 발표될 경우 피해를 입을 수 있었으므로, 당시 일본의 공직선거법 제138조의 3항에 '누구든지 선거에 관하여, 공직에 취임하는 자를 예상하는 인기투표의 경과 또는 결과를 공포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정을 그대로 본떠서 삽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등장한 여론조사 공표금지 규정이 그간의 변화 과정을 거쳐 지금은 '선거일 전 6일부터 공표 금지'로 정착됐다. 그동안 이 규정이 끼친 영향은 한둘이 아니다. 단순히 국민의 알 권리를 저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87년 양김 단일화 실패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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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총선을 7일 남겨둔 지난 8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사거리에서 한 시민이 선거 유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민중항쟁이나 시민혁명이 성공하면, 얼마 안 있어 정권이 무너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4.19 뒤에도 그랬고, 촛불혁명 뒤에도 그랬다. 하지만 6월항쟁이 일어난 1987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보수여당인 민주정의당은 그해 12월 대선에 승리했다. 민정당과 그 계승자 정당은 1998년 2월 24일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된 최대 요인은 이른바 '양김 분열'이다. 정치권에서 민주화투쟁을 이끌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되면서 노태우가 어부지리를 얻은 결과였다. 김대중·김영삼 분열은 전두환 정권의 공작 정치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당시 국민과 재야와 야권이 단일화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 당시 단일화 실패를 부추긴 요인 중 하나가 여론조사 공표 금지다. 2012년 봄호 <관훈저널>에 실린 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팀장의 기고문 '선거 여론조사의 함정'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여론조사로는 양김의 독자 출마는 당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던 반면, 단일화가 성사됐다면 두 사람 중 누구라도 당선됐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두 김씨의 출마선언 며칠 뒤인 11월 15일 갤럽조사에서 노태우 후보(38.2%)에 이어 김영삼 후보(27.7%), 김대중 후보(24.0%) 순이었기 때문이다. 약 한 달 뒤 대선에서도 노태우 후보(36.6%)와 김영삼 후보(28.0%), 김대중 후보(27.0%)의 최종 득표율은 여론조사와 비슷했다.

하지만 당시엔 선거 여론조사의 공표가 전면 금지됐기 때문에 이 같은 족집게 수준의 여론조사를 일반 국민들은 전혀 몰랐다. 당연히 두 김씨를 향한 '각자 출마해선 승산이 없다'는 여론의 압력도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두 김씨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상대방의 포기를 촉구했다. 양김은 각자 출마해도 자신이 승리할 거라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이런 분위기를 1987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 칼럼 '선거 여론조사는 필요한가'는 이렇게 전한다.
 
"지금 일노(一盧)·양김 씨들은 아무도 낙선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가 압도적 당선을 장담하고 있다. 처음엔 전술상 말을 그렇게 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후보자를 위시해서 핵심 측근일수록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진짜 주인공은 정보를 못 얻는 상황

당시 국민들이 여론조사의 결과를 알았다면, 양김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6월항쟁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으므로, 자신들이 이룩한 민주화 투쟁의 결실이 두 김씨에 의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두 후보의 단일화를 압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됐다면 두 후보가 자기 뜻을 고수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승만 정권의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한국에 도입된 여론조사 공표금지 조항은 이처럼 선거 판세는 물론이고 한국 역사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돌발 변수가 빈발하고 판세도 곧잘 바뀌는 선거일 직전의 며칠 동안, 유권자들이 깜깜이로 지내도록 만드는 조항이다.

선거는 '뽑는 행사'이지 '뽑히는 행사'가 아니다. 따라서 선거의 진짜 주역은 '뽑히는 후보'가 아니라 '뽑는 유권자'다. 이것은 유권자들을 대신해 나랏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선출하는 일이다. 따라서 유권자가 후보자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어야 하는데도, '깜깜이 조항' 때문에 유권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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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저서: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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