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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택시기사의 넋두리 "각하가 잘 나갈 때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32)]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②

등록 2020.05.01 11:44수정 2020.05.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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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현역시절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함께 ⓒ 자료사진


박정희를 사로잡다

지난 4월 25일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오후 5시 20분에 승객 대여섯 명을 태우고 출발한 시외버스는 신록이 한창 물드는 산하를 아주 매끄럽게 달렸다. 이즈음은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아스팔트길들이 사통오달로 거미줄처럼 잘 이어졌다.

텅 빈 버스 안이 무료했는지 좌석 건너편 자리의 임오생(79세) 승객은 오랜만에 임자를 만난 듯, 전두환에 대한 촌평을 신나게 늘어놨다. 얘기는 들어주는 사람이 경청할 때 신명이 나기 마련이다.

"숭악(흉악)한 합천 촌놈 두환이가 정말 난 사람은 난 사람이야. 합천 골째기 황강에서 뺄가벗고 멱 감던 새까만 촌 아이가, 서울로 가서 이화 출신 가시나 꼬여 갖고 지 마누라 삼고, 5.16 일어나자 육사 후배들 시가행진 시켜 박정희를 사로잡았다지. 나중에 박정희 죽자 대통령까지 꿰어 찬 걸 보면 아주 보통 놈은 아닌 겨."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이순자씨는 이화 출신이 아니고, 경기여고 출신이라고 정정해줬다.

"아, 그래요? 아무튼 이화여고나 경기여고나 그 시절 대구공고 출신이 상대가 되오? 하여간 두환이는 마누라 하나는 잘 얻었지 뭐요. 그 이순자라카는 그 사람 아주 열부 중에 열부라요. 요샌 이순자가 전두환이 변호사에, 경호원 노릇까지 하더만. 영부인까지 된 걸 보면 그 여자도 아무튼 난 사람이오."

순천에 산다는 그는 그날 진주로 간 뒤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고교(중동고) 시절을 되새겼다. 당시 우리 반에 경남 거창 출신의 한 친구가 있었다. 거창은 바로 합천 이웃 고을이다. 그 친구의 억센 사투리와 촌놈 행세는 서울 아이들의 얘깃거리로 날마다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서울 온다고 김천역에서 난생처음 기차를 타봤다고 했다. 나도 경상도 촌놈이었지만 내 고향 구미는 그래도 기차는 다녔다.

또 한 친구는 날마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만난 이화여고 학생을 짝사랑한 나머지 종례를 빼먹고 도망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담임에게 걸려 이실직고했다. 

"뭐여, 네 놈이 옆 학교 숙명도 아닌, 이화여고생을 쳐다 봐. 야, 인마! 찬물 먹고 속 차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어!"
 

전두환 내외가 방미에 앞서 화동에게 꽃다발을 전해 받고 있다(1985. 4. 25.) ⓒ 국가기록원

 
각하가 합천사람은 맞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경기여고나 이화여고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대단했다. 아무튼 합천 촌놈 대구공고생이 경기여고생을 사로잡았다면 흔하지 않은 이야기렷다.

"좌우당간 두환이는 산천초목도 떨게 한 무지막지 불한당으로 대통령까지 했으니 대도(大盜)로 난 사람이오."

그 시절을 온몸으로 겪은 나는 듣고 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보위' '광주민주화운동' '사회정화위원회' '최루탄' 등등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옆 승객의 입담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사이 버스는 합천 정류장에 닿았다.

"사진 많이 찍으시오."
"덕분에 심심찮게 왔습니다. 댁까지 잘 가십시오."

  

전두환 생가 본채 ⓒ 박도

   

전두환 생가 헛간 ⓒ 박도

 
나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매표소로 가서 대구로 돌아가는 버스시각을 물었다. 매표원은 그날 버스는 벌써 끊어졌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하루 묵어야 할 처지였다.

바깥 택시정류장으로 가자 열 대 남짓한 택시들이 일렬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늙수그레한 기사에게 물었다.

"전두환 생가까지 왕복으로 얼마요?"
"메다(미터기)로 3만 원 나오는데 2만 원만 주이소."


나는 군말없이 택시에 올랐다. 그때 해는 서산과 두어 발 떨어져 기울고 있었다. 그날 합천 일몰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7시 7분이었다. 그때 시각은 오후 6시 반. 

"각하(전두환)가 합천사람은 맞지만 고향을 위해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심더."
"네에?"

"이후락이 같은 친구는 대통령 비서실장 노릇을 해도 지 고향에 공장을 수십 개도 더 만들어 놓았다 아임니까? 대통령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예."
"그래서 합천은 공기도 좋고 공해가 없지 않소."

"하긴 손님 말이 맞네 예. 하지만 우리 합천 사람들은 마이(많이) 섭섭해 합니다.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공장 하나 유치했으면 땅값 많이 올랐을 긴데."
"좀 더 세월이 지나면 이곳은 청정지역으로 살기좋은 고장이 될 겁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여의도 "국풍81" 행사 준비장에 시찰을 가서 이원홍 KBS 사장과 악수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적막강산인 생가마을

택시기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새 택시는 황강에서 조금 떨어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마을 전두환 생가 앞에 섰다. 늦은 시각 탓이었는지 적막강산이다.

"각하가 잘 나갈 때는 생가 마을 앞산 조상무덤 옆에 헬기 착륙장도 만든 뒤 군인들이 지켰다는데..."

택시기사는 혼잣말처럼 뱉었다.

그게 세상인심이다. 그래서 '염량세태'(炎涼世態) '오동지 설한풍'(雪寒風)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앞에 것은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세상인심을 말함이요, 뒤에 것은 눈과 함께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을 말한다.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뒤 정신없이 생가 구석구석 안팎을 담았다. 생가 대문 옆 안내판의 글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2-3(내천리 263)의 이 가옥은 전두환 대한민국 제 12대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생가 안내판 ⓒ 박도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라는 외진 시골마을이다.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마을 앞을 황강이 감싸고 있어 읍내로 나가려면 강을 건너 10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강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을 땐 바람골재라는 이름의 험한 산을 넘는 30리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이 내천리에서 보냈다. 외진 산골마을에서 가난은 숙명과도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황강변 모래밭에서 형이나 덩치 큰 동네 아이들과 씨름하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씨름판이 벌어지면 지는 것이 싫어 모래밭에서 연상 자빠지면서도 내가 이길 때까지 계속하자고 상대편을 졸라대곤 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화목하게 살아가던 우리 집안에 풍파가 닥친 것은 내가 아홉 살이던 1939년 가을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일본 순사부장을 강둑 아래로 내던져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우리 가족은 대대로 살아오던 내천리를 떠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만주 땅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 <전두환 회고록> 제3권 '황야에 서다' 16~18쪽 정리
  

전두환 생가 앞 황강 ⓒ 박도

 
(* 다음 기사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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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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