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적 성희롱 보도는 그 자체로 악마적이다

[촌부가 보는 성범죄] 생물학적 결격이 본질, 정치몰이로 이득 취할 사안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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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husky)등록 2020.07.17 13:57
미국 애틀랜타 주의 시골 마을 플레인즈를 찾아간 건 2006년 가을 즈음이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사저를 찾아 배회하다가 우연찮게 시빌 카터를 만났다. 

시빌은 카터 대통령의 막내 제수인데, "지미는 정말로 말과 행동이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현관 계단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넌지시 던진 질문에 그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인 카터 전 대통령을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맑은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는데 카터도 내겐 그런 유형의 정치인이다. '사람'(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적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론 남들에게 말못할 나의 죄책감을 크게 덜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976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 와중에 "나는 많은 여성들을 정욕을 갖고 바라봤다. 나는 마음 속으로 수 없이 간음을 저질렀다" (I've looked on a lot of women with lust. I've committed adultery in my heart many times.)고 말했다.    

길을 걷다가 멀리서 마주오는 여자가 보이면, 나는 땅바닥이나 하늘을 보곤 한다. 그러나 마음 속은 그녀의 가슴이나 다리, 얼굴을 향하는데, 애써 내 마음을 감추려 외면하는 것이다.

내일모레면 60세인데, 아이 엄마 외에 내가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은 여성은 고백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여자 탤런트, 친구의 부인, 이웃집 여자에 이르기까지 숱하기 짝이 없다.

나는 태생이 문란한 사람인가, 변태적인가, 성도착적이지는 않은가. 나이 들어도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간인가. 죄책감은 척추보다 단단한 뼈가 되어 나의 중심의 박혀 있다. 

친교 모임이든, 비즈니스 관계이든 여자들과는 눈을 맞추지 않는 게 하나의 버릇이 돼버린지는 오래이다. 그건 분명히 위선적인 행동일진대, 나로서는 더 이상 스스로 불편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도피 방책이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여자 지인 가운데는 그런 나를 두고 "무섭다"는 말을 건낸 이도 있다. 사실 나도 내 안의 다른 내가 무섭긴 하다. 내 의사와는 전혀 딴판으로 다른 내가 행동하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성범죄에든, 그러니까 성희롱이든 성추행이든 성폭행이든 나는 눈곱 만큼의 관대함도 없는 유형에 속한다. 아들이 지금 30살이 넘었으니, 2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이 동급생 대여섯명과 함께 같은 반 여학생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돌려가며 때린 일이 있었다. 그날 사실을 파악한 그 즉시 아들을 끌고 피해 아동의 집으로 가서, 아들도 나도 그 부모와 여아에게 싹싹 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안방문을 잠그고 아들을 엎드려 뻗치게 한 뒤에 플라스틱 아이스하키 채로 아들의 엉덩이를 수없이 내리쳤다. 당시 우리 집은 4대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 어머니, 아이 엄마 등 여자 셋이 베란다쪽 창문을 두들기고 안방문을 치며 "아이 죽인다"고 울고불고 하는 등 난리가 났었다.

아들 녀석에 대한 매타작은 내가 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내 장단지를 하키 자루로 내리쳐 피가 튀고, 하키 자루가 부러지면서 끝이 났다. 아들은 옆에서 무릎을 꿇고서 울지도 않고 그 시간을 감내해냈다. 기겁한 나머지 울음이 안나왔을 수도 있었겠다.

장성한 아들에게 수 년전 그런 일을 포함한 학대에 대해, 식구들이 다 있는데서 공개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다. 무릎을 꿇고 빌겠다고도 얘기했었다. 

아버지로서 그 잔인한 학대 행위에 대해, 지금도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어떤 처분이 있다면 때를 가리지 않고 달게 받을 생각이다. 하지만 성추행은 여전히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 설령 내 자신이라도.  

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성추행 혐의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논의가 한마디로 가관이다.  적잖은 식자들이 본질을 외면한 채, 공허한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 많은 언론, 그리고 정치인들이 관음증에 바탕을 두고 정치몰이에 나서고 있다. 

예컨대, 고인을 두고 죽음으로써 책임을 끝내는 방기했다느니,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피해를 주장하는 고소인을 2차 가해한 셈이라는 식의 진단까지 내놓고 있다. '채홍사' 언급에까지 이르면 속된 말로 갈데까지 다 간 것이다.         

성범죄 문제는 많이 배우고, 전문가여야 하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꼭 좋은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범죄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정법으로만 다스릴 수 있으며, 발생을 최소화하는데 대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성범죄 피해자에게는 법적인 지원 외에 사회적으로 감싸고 상처난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게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사회가 나눠서 짊어져야 하고,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고 박시장 사건과 관련해 이 시점 진행돼야 할 일은 공명정대한 조사(수사)이다. 피해를 주장하는 고소인에게 2차 가해를 막는 한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해 응분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성범죄는 1만년도 넘는 현생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이고, 어쩌면 인류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도 완벽하게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범죄인 탓이다. 

성범죄 가해자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남자인 것은 본질이 '호르몬 범죄'라는 걸 웅변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남성이라는 영역이 우범지대이고, 동시에 거의 모든 남자들이 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취약계층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성범죄는 '네거티블리 컨트롤드'(negatively controlled) 방식으로 다스려져야 하고, 또 예방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서, 예를 들면 말 그대로 패가망신에 이르도록 해서, 그나마 이성이 본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상책이다. 

고 박시장 사건이 아니더라도 성범죄에 관한 한, 특히 언론은 사실 중심의 담백한 보도 자세를 지향해야 한다. 질펀한 성을 바닥에 깔고서도, 진지하고 중차대한 것처럼 포장하는 성범죄 보도는 뉴스 수용자들의 욕지기를 불러오고 또다른 성범죄까지도 부추길 수 있다. 

작금 주요 언론이 쏟아내는 성범죄 보도를 과거 사주들의 성범죄에 대한 통렬한 반성의 결과로 보는 독자나 시청자들은 없을 것 같다. 또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회사 간부들의 성범죄를 예방하고자 하는 결기의 소산물로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게 성범죄의 본질이다. 상업적으로 떠드는 입은 모두 다 가증스럽다. 가해자(측)는 오로지 법에 따라 처분하고, 피해자에게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마음을 얹어줘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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