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받들지도 떠받들리지도 않는

요즘 자꾸 들춰보게 되는 책, <김지은입니다>

검토 완료

김화숙(dream40)등록 2020.07.21 15:46
김지은 씨 보세요! 
 
 
김지은 씨!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최근 두어 주 더욱 떠오르는 이름이라, 가만히, 불러봅니다. 먼저 미투를 결정하신 용기, 그로 인해 겪은 모든 어려움과 인내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여전히 힘들게 싸우며 일상을 회복해 가고 있겠지요. 연대하는 마음으로 <김지은입니다>두 달 전 읽었는데, 요즘 계속 들춰보며 생각하고 있어요. 짧은 글로나마 깊은 지지의 맘을 보내고 싶었어요. 얼굴과 얼굴로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 책 내 주셔서 감사해요. 혼자 읽고 말 수 없는 귀한 책이죠. 너무 수고하셨고요. 우선 저는 가족과 함께 읽었습니다. 남편과 20대인 세 아이들이 다 읽고 토론하고 글도 쓰고요. 그리고 책모임 사람들과, 단체 회원들과도 읽고 토론하고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안산 시민단체들이 연대로 '김지은 읽기'를 챌린지로 이어 읽기도 했죠. 상상해 보세요. <김지은입니다>로 이어지고 있는 따뜻한 띠를요. 손과 손이 김지은 씨와 이어지고 있는 거 보이죠?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김지은입니다>는 후세에도 길이길이 읽힐 책이 될 거예요. 가부장적 질서, 남성 중심적인 이 사회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있을 거니까요. 비정상적으로 떠받들려지는 남성 권력, 그리고 그 아래 노예처럼 착취당하면서도 그를 떠받드는 여성의 지위. 비단 도지사 수행비서만의 일일까요? 노동자 김지은이 그 문제적 구조를 잘 드러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 피해자 중에 나는 가장 빨리 도망쳐 나온 사람이 되었다."라고 고백하셨죠? 웅크린 채 숨 못 쉬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시는지! 제 가슴이 뛰어요. 김지은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으로 저도 또 고백합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184쪽) 아시죠?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있어요. 중년 부부와 20대 세 청년으로 구성된 10개의 손도 따뜻하게 이어져 있어요.
 
  

안산시민단체가 6월에 했던 김지은읽기 챌린지 웹자보 ⓒ 김화숙

   


 
구두와 만물트럭
 

  
구두, 순장조, 보조 기억 장치, 기쁨조, 암묵적 제물, 만물트럭, 24시간 착신 전화기, 조배죽, 거울, 그림자, 노, 예스, 세뇌, 무기력, 침묵, 경직, 비밀유지, 위력, 거절...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난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낱말들입니다. 도지사 수행비서 업무란 게 이런 낱말로 정리되더군요. 저는 92-98쪽에 표로 나온 '도지사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이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바둑판같은 81개의 작은 사각형들 안에 깨알같은 업부 봐요.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잡다한 디테일. 그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다 맡을 수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지만 일의 내용이란 게 너무 뜨악한 게 많더군요. '보조 기억 장치' 맞더군요.
 

 
긴 매뉴얼 중, 일상 수행 매뉴얼에서 공관 업무 리스트를 예로 볼게요. "지사님 기상 및 조찬 확인 후 서재에서 서류 챙기고, 구두 확인" 별 유쾌한 내용도 아닌 업무 얘길 제가 또 언급하네요. 무슨 유치원 아이도 아니고 기상과 조찬도 확인해요? 제 눈에 박힌 단어는 '구두'였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업무란 게 그냥 읽어 넘길 수가 없었어요.
  
 
제일 처음 인계받은 내용은 지사가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도록 어떤 위치에 어느 정도 각도로 놓아야 하는지였다. 지사가 공관에서 나가서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수행비서의 업무라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김지은입니다> 88쪽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더군요. 어린 아기도 아니고 거동 불편한 노인도 아닌 사지 멀쩡한 성인 남자를 위해, 수행비서가 구두를 챙겨? 허리가 부실해서 도무지 구부릴 수 없는 몸이었나요? 조선 나리님들처럼 긴 도포자락에 갓을 쓰고 에헴, 하고 거드름 피우는 건가요? 도지사 수행비서는 몸종? 하녀? 유비쿼터스 로봇? 댓돌 앞에서 조아리고 섰다가 신발 수발드는 종이 필요했나요?
 
 
 

<김지은입니다> 책 98-99쪽 ⓒ 김화숙

 

자꾸 구두가 떠올라서 글을 쓰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위에서 열거한 저 낯선 단어들 있잖아요. 구두만 생각하면 싹 다 명쾌하게 이해됐어요. 한 꾸러미로 꿰이더군요. 아마도 도지사를 수행비서 매뉴얼이란 게, 안희정 때 만들어진 건 아니겠죠. 대대로 해오던 관행이 그랬겠죠. 그러나! '민주주의 도지사'라면, 그런 거 불편해하고, 하지 말라 말렸어야 맞겠죠. 노동자 김지은은 노동권도 인권도 없는 종들처럼 사신 거 맞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만물트럭'이 대수며 '24시간 착신 전화기'가 대수인가요? 업무가 그렇다니 업무일 뿐이겠죠. 개인 소지품은 각자 휴대해도 수행비서에겐 늘 물건이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만물트럭 김지은 씨한텐 안희정 짐 말고 자기 화장품 하나 없었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안희정은 '슈트발'이나 신경 쓰며 빈손으로 으스대며 다녔겠죠.
 
 
안희정은 '슈트발'이 안 산다고 절대 양복에 물건을 넣지 않았다. 휴대폰도, 담배도, 라이터도, 명함도, 신분증도, 휴지도, 펜도, 안경닦이까지 모두 수행비서가 가지고 다녀야 했다. 손으로 부르면 달려가 원하는 걸 전달해야 했다. 나는 만물트럭이었다. 사람들이 내 주머니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걸 보면 놀라워했다. 가방은 슈퍼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화장품 콤팩트도 없었다.
 227쪽
 
 
  
네, 볼수록 김지은은 사람으로 일한 게 아니었어요. 기분이 있고 존엄이 있는 노동권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경직된 조직 속에 충성경쟁하는 '그들' 사이에서 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학습된 무기력 맞죠. 밤낮없이 부르면 달려나가 대리운전에 빵과 커피에. 부인과 자식들의 사적인 볼일 시중드는 종. 오직 예스만 말할 수 있는 로봇이었고, 그의 거울이자 그림자였죠. 그의 심기만 살피는 기쁨조, 종국엔 함께 죽을 순장조요 암묵적 제물, 맞았어요.
 

 
 
추앙받는 종교인처럼

 
  
피고인은 본인이 가진 권세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피고인 주변의 모두가 피고인의 말에 반문하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피고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진행해서 피고인 앞에 대령해 놓았습니다. 피고인은 그러한 떠받들어짐을 오랜 시간 경험하여 조직 내에서 제왕적 리더로, 추앙받는 종교인처럼 살아왔습니다. 345쪽
 
 
 
무릎을 치며 읽은 대목입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말을 해주셨거든요. 민주주의 도지사,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 미투를 지지하는 정치인. 그런 멋진 대외 이미지와 너무나 상반된 안희정의 실상. 특히나 떠받들어짐, 제왕적 리더, 추앙받는 종교인. 어쩜 김지은 씨는 이토록 적확한 언어를 골랐을까요? (글을 너무 잘 쓰신 거 다시 한번 칭찬하고 싶어요. 함께 읽고 토론한 사람들도 입을 모아 칭찬했어요. 후속 책 기다릴게요.)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
 
그가 어떤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며 했다는 말 좀 보세요. 그만큼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네요. 국제 행사였던 한 토론회 참가 일정을 바로 전날 취소한 이유도, 패널들이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죠. 그는 스스로 저 높은 데로 떠받들려져 살고 있음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냈군요.
 
 
특별하게 떠받들려진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감히 민주주의를 하겠다니! 형용모순 아닌가요? 어쩌면 태어나서부터 아들이라고 떠받들려지고, 남자라고, 심지어 민주화운동한다고, 남편이라고, 감옥생활까지 떠받들려졌겠죠. 제왕적 리더십으로 민주주의를 하겠다니! 수행비서 따위는 저 아래 막대해도 되는 무지렁이니까. 미투 지지 선언하고, 또 성폭행하고, 그런 이상한 나라의 떠받들린 인간이었던 겁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고요.
 
 
지난 2주간 박원순 시장 뉴스 때문에 이 모순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아직 다 알 수 없어서 마음이 잘 정리되진 않아요. 김지은 씨도 복잡하시겠죠. 분명한 건 안희정의 경우가 결코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해요. 안희정 한 사람 '악마화'로 다룰 문제가 아니죠. 워낙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자였다. 그게 결론일 수 없다는 겁니다. 제왕적 리더, 떠받들려진 지도자, 추앙받는 종교인. 이런 남성들이 아직도 큰소리치는 세상 아닌가요?
 
  
저는 지사님이랑 합의를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지사님은 제 상사이시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사이입니다.
저랑 지사님은 동등한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33쪽
 
 
  
바로 이겁니다. 김지은 씨가 2년 전 방송에 처음 나와서 했던 그 말을 생각합니다. 도지사가 뭐라고. 도민이 뽑아서 위임해 준 권력인데.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안희정 이전에도 수많은 안희정이 있었잖아요. 위력에 의한 성폭력, 미투 때문에 안희정이 특별해 보일 뿐이죠. 안희정 이후에도 여전히 안희정들이 설치는 게 보이잖아요. 이런 괴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상사, 이런 사회를 계속 방치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얼 해야 하죠?

  

<김지은입니다> 책 표지 ⓒ 김화숙

 

 
 
떠받들지도 떠받들리지도 않는
 

  
제왕적, 떠받들려진, 추앙받는 종교인. 이 단어들 때문에 저는 자꾸 마음이 아픕니다. 순간순간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것들이죠. 도지사 수행비서 아닌 제 삶의 경험도 어쩜 이리 닮은 꼴일까요. 꼭 성폭행이 아니라도 같은 일인 거 다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 삶에 만난 수많은 남성 리더들에서 안희정을 봐요. 그들의 심기 건드리지 않고 떠받들며 사는 여자들이 보이고요. 공사 불문, 어디에나 있는 익숙한 권력구조인걸요. 저는 불행하게도, 은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추앙받는 종교인과 그렇게 되려 하는 남자들까지 많이 만났을 뿐이고요.
 
 
더 솔직히 고백할게요. 저의 삶도 실은 남자를 떠받들도록 길러졌더군요. 아들이라고, 아버지라고, 남편이라고, 시아버지라고, 조직의 리더라고, 저는 힘 가진 남자들을 떠받들어야 했어요. 유형무형, 드러나게 안 드러나게, 말로 행동으로, 그들의 심기를 먼저 헤아리고 늘 떠받들어야 평화가 유지되었죠. 반면, 여자로서 저는, 늘 남자보단 아래 있도록 요구받았고요. 보수적인 기독교회에서 늘 '순종'을 요구받았죠. "남편을 순종하는 아내"로 결혼 서약도 했더랬고요.
 
 
제 남편은 작은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저희가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한 게 5년이 돼 가네요. 역사를 흔히 BC와 AD로 나누잖아요? 저는 거침없이 페미니즘 이전과 이후로 제 삶을 나누게 됐어요. 페미니즘을 알고 보니 예수 정신이었어요. 진정 휴머니즘이고 인간 해방 이야기였고요. 제 삶의 모든 영역에, 가정에 교회에, 폭풍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죠.(얘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우리 만나면 혁명적인 재미난 얘기 해드릴게요.ㅋㅋㅋ)
 

 어떤 사람도 떠받들지도 떠받들리지도 않는 평등 세상이 저희가 꿈꾸는 하나님나라예요.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저와 남편이 토론했다고 했죠? 어떤 새로운 통찰이나 실천이 있었을까요? 하나만 예로 들면요. 교회에 매주 일요일 설교단에 물 한 컵씩 준비해 주는 손길이 있었어요. 설교하는 목사 위한 물이죠. 자기 마실 물 목사 스스로 준비하자. 그렇게 바꿨습니다. 익숙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기, 떠받들림도 떠받들기도 경계하며 사는 작은 실천이었어요.
 
 
김지은 씨! 끝으로 너무너무 칭찬하고 싶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힘든 과정 견뎌오신 거 정말 고맙습니다!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용기가 돼 주었어요!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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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피해자 중에 나는 가장 빨리 도망쳐 나온 사람이 되었다. 
웅크린 채 숨 못 쉬고 있는 피해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114-115쪽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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