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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명 넘게 죽은 죽음의 광산,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100km 떨어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들

등록 2020.09.26 11:50수정 2020.09.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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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민간인들이 대량 불법학살된 경북 경산시의 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 오마이뉴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먼저 인사부터 꾸벅했다. 이어서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건 왜 물어?"라고 하신다. "예, 보도연맹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리려구요"하면 그제서야 "그때 하도대리에서 많이 죽었지. 그 상황을 잘 알려면 남우현이를 찾아가 봐"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지난 2008년 충북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에 사는 남우현(1926년생) 선생의 집을 찾았다.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는 물한리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돌면 하도대리 본동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에서 쭈욱 살았다는 남우현옹을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 찾아간 날은 그가 들에 나가 만나지 못했다. 이틀 후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황간향교에 갔단다. "아이구, 뵙기 힘드네요" 하니, 할머니가 "보리똥하고 앵두 좀 따먹고 가" 한다. '에이, 보리똥으로 배나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많이 따먹고 있는데 남우현옹이 왔다.

"어쩐 일이래요?" "예. 6.25 때 마을역사를 알려구요"하니 전쟁 나기 전 '청년방위대'에 근무했던 일부터 입이 열렸다. "상촌국민학교에서 약 40~50명이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영동읍에 신무기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20명을 차출하더라구."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그렇게 영동읍으로 간 20명 청년방위대원 중 하도대리 청년 9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고 했다. 기존에는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 약 300명이 1950년 7월 20일 영동읍 어서실과 석쟁이재, 그리고 상촌면 고자리에서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 중 일부가 영동역에서 100km나 떨어진 코발트광산에 끌려가 죽었다니... 남우현옹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7, 8월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일부 등 최소 1800명에서 최대 3500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6.25가 일어나자 영동군 상촌면 청년방위대원이었던 남우현은 피난길에 나섰다가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을 목격하게 됐다. 아래는 남우현옹의 말이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영동에는 다음날인 7월 21일 소개령이 내려졌어. 아내와 노부모를 남겨놓은 채 마을 청년 11명이 피난증을 가지고 피난을 갔어. (영동군) 매곡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에는 경북 김천 가서 잤지.

그러다가 경북 경산을 가게 됐는데, 아는 사람 연고로 코발트광산의 여관에 묵게 됐어. 하루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지에무씨(GMC)에 사람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달려 가더라고. 트럭 네 귀퉁이에는 한사람씩 앉아있고 말여. 식당에 한 시간을 앉아 있는 동안 여러 대가 지나가더라고.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그러는겨. 나중에는 노인도 실려 있더라고. 근데 그때는 트럭에 실린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


피학살자가 국가유공자로 둔갑

남우현은 자기가 본 사람들이 보도연맹원들이고, 자신의 고향인 영동군 청년방위대에 있는 보도연맹원들도 끼어 있었다는 걸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 영동군 청년방위대원들이 있다는 겨. 그래서 마을 친구들도 볼 겸 갔지. 마침 정문 초소에 친구가 있더라고. 그런데 경산국민학교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이후에 남우현은 청년방위대 장교 박홍기를 만났다. 박홍기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을 이렇게 전했다. 

"경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청년방위대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장부책을 놓고 하는 말이 '보도연맹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눈감고 손들어' 하대.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나가니까 교실로 데리고 갔어. 그리고 나서는 모두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처형했지. 내가 내막을 알았더라면 동네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해서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에서만 꽃다운 청년 9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승길(본동), 남칠현(본동), 남호현(본동), 이병덕(본동), 남응현(본동), 송정호(신기), 남승만(신기), 김창은(신기), 남종(소계)이다.

그런데 후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원 청년 9명 전부 국가유공자로 둔갑한 것이다. 상촌면 하도대리에 세워진 '마을자랑비'에는 그들이 국가유공자로 기록돼있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다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통해 국가로부터 정당한 배·보상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들은 국가유공자로 잘못 알려졌다.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에 세워진 마을자랑비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불법학살된 사람들의 이름이 국가유공자로 들어가 있다. ⓒ 박만순

 
한국전쟁 초기 국군은 많은 장비와 무기를 한강 이북지역에 남겨 놓은 채 무질서한 철수작전을 펼쳤다. 전쟁 이전 시기 국군의 총병력은 9만8000명이었으나 7월 1일 육군본부가 수원에 위치했을 때 전사·포로·행방불명 또는 낙오로 인해 지휘가 가능한 군인은 약 4만4000여 명에 불과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이렇게 병력 손실이 컸던 것은 무질서한 퇴각으로 많은 군인들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수시로 이루어진 가두 모집, 현지 부대장에 의한 지역별 모집, 그리고 청년방위대원이나 학도병 모집 등을 통해 병력을 보충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중순 전국의 청년방위대원들이 전선의 총알받이로 소집되었다. 대원들에게 솔직히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청년방위대 장교들은 "1주일간 군사교육을 받고 지역으로 돌아가면 기간병이나 조교를 시켜준다"고 현혹했다.

100km 떨어진 코발트광산으로
 

영동군 용화면 청년방위대원들을 인솔한 강태석 ⓒ 박만순

 
6.25가 일어나고 얼마 후 충북 영동군 용화면에는 65명의 청년방위대원이 소집되었다. 그들은 영동에서 약 1주일간 훈련을 받고 남쪽으로 이동을 준비했다. 이동책임자는 당시 미혼이었던 강태석(1926년생) 소대장(용화면 조동리·안정리)이었다.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북 경산을 향해 출발한 때가 1950년 7월 20일 밤 10시경이었다. 날이 샐 무렵 대구를 지났고 후에 경산중앙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청년방위대원들은 낮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2~3일 후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 빼내, 6중대를 새롭게 만들고는 강당에 모두 집어넣었다. 사람들 머리는 죄다 빡빡 깎인 채였다. 강당에는 한 100여 명이 있었는데 용화면 사람은 22명이었다.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6중대를 따로 뺄 때 강태석 소대장은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청방교육대 정보과로 가 "왜 따로 놓느냐"고 물으니 육군중령은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로 구금되었던 이들은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갔다. 얼마 후 방위장교한테 물으니 "헌병들이 와서 보도연맹원들을 엮어 코발트광산으로 갔다"고 했다.

2008년 8월 5일. 충북 영동군청 소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마련한 '한국전쟁기 영동군 피해실태조사 지역설명회'가 열린 자리였다. 영동군 부군수와 11개 읍·면 관계자,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과 향토사학자, 그리고 유가족 60명이 모였다.

이날 설명회 맨 마지막에 강태석이 소개되었고 충북 청주에서 온 노구의 강태석이 입을 열었다. 그는 "58년 전 제가 인솔한 용화면 청년방위대원 중 22명의 보도연맹원들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죽은 것에 할 말이 없습니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22명이 죽은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양 죄스러워했다. 

필자도 2008년 당시 '영동군 피해실태조사반' 현지 책임자가 되어, 영동군내 401개 자연마을을 다니며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국민보도연맹원 88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되었음을 확인했다.

죽음의 광산에서 살아난 이규성과 정관택  

경산 코발트광산 수직굴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쏴, 굴 아래로 떨어진 사람 중에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가동리 정관택(1931년생)과 학산면 서산리 이규성(1919년생. 학산면 서산리)이 그 주인공이다. 정관택은 약 30여 년 전에 사망했고, 이규성은 2019년에 사망했다.

이규성 증언에 의하면, 6.25 발발 후 영동읍에서 훈련을 받던 청년방위대원들은 고역을 치러야 했다. 1주일 훈련을 받는 동안 밤이 되면 보도연맹원들을 분류해 집단매질을 가한 것이다. 현재 영동농협 맞은편 자리인 5신병 교육연대 사무실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이규성도 이때 심한 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영동군에서 훈련을 받다가 경북 경산으로 와 코발트광산에 끌려온 이규성은 양손이 묶였다. 이윽고 군인들이 보도연맹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발사"라는 소리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다행히 이규성은 총에 맞지 않았고 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규성의 옷은 피칠갑이 되었고 개울 흙탕물에서 옷을 빨았지만, 핏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정관택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영동군 양강면 청년방위대원으로 6.25 직후에 영동읍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산중앙국민학교에 도착했다. 다음은 정관택의 처 최동순(1934년생)의 증언이다.

"어디 국민학교로 붙들어 가더라는 겨. 글로 가 가지고 막 차에다 싣더니, 어느 굴 있는데 가더니, 막 고랑에 팍 들어가면 쏴서 죽이고 쏴서 죽이고. 우리 집 양반이 제일 마지막에 섰었데. 마지막이라서 끈이 없더라고. 그래 손을 붙들으라고 해 가지고. 쏘는데 그냥 구덩이 푹 꺼진데 쑤셔 박힌 겨. 한참 있으니까 굴로다가 따발총을 막 갈겨 대더래. 그래서 거기서 둘이 살아서 나온 겨."

위령비에는 영동군사람 6명만이 기록

6.25 직후 충북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국민보도연맹원 88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되었다. 물론 88명이라는 숫자가 100% 정확하지는 않다. 강태석은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약 100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어쨌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용역사업으로 실시한 영동군 내 401개 자연마을 조사에서 88명의 피해자가 나왔다. 하지만 이 숫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문'에 반영되지 않았다.
 

코발트광산 앞에 세워진 위령비에 새겨진 영동군 학살 피해자 6명의 이름 ⓒ 박만순

 
결국 2016년 코발트광산 앞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영동군 보도연맹원 6명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강원형, 박규분, 이갑문, 이금용, 이재춘, 정유섭'이 그들이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유가족들이 신청한 피해자들만 진실규명 결정되었다. 약 80여 명이 누락된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0년 전 대한민국 정부는 영동군 청년방위대원 중 국민보도연맹원들을 100km 떨어진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했다. 그런 치밀함으로 잠재적 위험분자(?)라고 인식한 보도연맹원들을 부산이나 거제도로 피난시키거나 격리·수용했더라면 억울한 죽음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또 국가는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라도 파헤치는 것이 자신의 의무가 아닐까. 그런데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위 사실을 인지하고도 불법 학살된 80여명의 원혼을 진실규명하지 않았다. 금년 12월에 출범할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미완의 과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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