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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제도와 운영방략 제시한 '경세유표'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51회] 나라의 실정을 샅샅이 밝히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등록 2020.10.20 17:26수정 2020.10.2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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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산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더불어 다산의 '일표이서' 중 하나이다. ⓒ 김병현

 
역사상의 천재들은 선천적인 우수성에 나름의 소명의식이 있었기에 범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다.

정약용은 이땅에서 태어난 지식인 관리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채 유배된 신세이지만, 나라의 앞날을 위해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았다. 그것은 글 쓰는 일이었다.

"나는 임술년(1802) 봄부터 곧바로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여 붓과 벼루만을 곁에 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았다. 그래서 왼쪽 어깨가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의 지경에 이르고, 시력이 나빠져서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두 아들에게 부치노라」)

유배 초기에 쓴 책은 『상례사전』과 『주역사전』이다. 모든 저술이 없어지더라도 이 두 책만은 남아 있기를 바랐다는 바로 그 책이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집중적으로 많은 책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일표이서(一表二書)라는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그리고 『흠흠신서(欽欽新書)』의 대작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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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석탑에 새겨진 정약용의 저서 표지들. 오른쪽 사진은 <목민심서> 및 <경세유표> 부분을 가까이서 찍은 것. 다산유적지에 있다. ⓒ 김종성

 
『경세유표』의 '경세'란 국가 제도의 골격을 세워 운영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경영한다는 뜻이며, '유표'는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께 올리는 마지막 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유배자라는 어찌하기 어려운 자기의 처지에서 그와 같은 책의 이름을 지을 때의 심경이 어땠을까.

『경세유표』는 1810년에 지은 것으로 관제에 관한 고금의 실례와 정치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개혁에 관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며, 국가정책의 모든 면을 망라하는, 32권 1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원제는 『방례초본(邦禮草本)』이었는데 『경세유표』로 바뀌면서 대폭 수정하였다. 내용은 어느 것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나라의 실정을 샅샅이 밝히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을 소개한다.

조선의 법은 고려 때의 구법(舊法)을 따른 것이 많았는데, 세종 때에 와서 조금 줄이고 보탠 것이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하였다. 군영을 여러 번 증설하여 나라의 경비가 탕진되고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공평하지 못했다. 재물이 생산되는 근원은 힘껏 막고 재물이 소비되는 구멍은 마음대로 뚫었다.

이리하여 오직 관서(官署)를 혁파하고 인원을 줄이는 것을 구급(救急)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익이 되는 것이 '되'나 '말' 만큼이라면 손해되는 것은 산더미 같았다.

관직이 정비되지 않아서 올바른 선비에게는 녹(錄)이 없고, 탐욕의 풍습이 크게 일어나서 백성이 시달림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어느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충신과 지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을 것인가. (주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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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동상 책을 읽고 있는 다산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평생에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 박태상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정약용이 그때 쫓겨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서, 이와 같은 경세의 철학을 '유표'가 아닌 국정개혁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면 국치로 가는 비극을 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정약용은 뒷날 「자찬묘지명」에서 『경세유표』가 어떤 책인가를 설명한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官制)ㆍ군현제(郡縣制)ㆍ전제(田制)ㆍ부역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제(科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 가능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생각(新我之舊邦)'에서 저술한 책이다.

『경세유표』는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의(草衣)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우(道友)로 있었다. 다산이 유배지로부터 고향에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인 이청(李晴)과 그리고 친한 승려 초의(草衣)에게 맡겨져 비밀리에 보관하여 전포하게끔 의뢰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全文)은 도중에 유실되고 그 일부는 대원군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남상교ㆍ 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일파에게 전해졌다.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ㆍ윤세현ㆍ김병태ㆍ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ㆍ김도일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ㆍ김개남 일파의 수중에 들어가 그들이 이용하였다. 전쟁 후 관군은 정다산의 비결이 전녹두 일파의 비적을 선동하였다고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ㆍ백련사ㆍ대둔사 등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주석 5)


일찍이 호남의 민란발생을 우려했던 정약용은 그런 낌새를 지켜보면서 『경세유표』를 지었고, 실제로 이 저서는 뒷날 전봉준ㆍ김개남 등 동학혁명 지도자들의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다.

사실 당시에 있어서 다산실학은 특히 호남 일대의 뜻있는 농촌지식인들 사이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 같다. 기정진ㆍ이기ㆍ황현 등의 호남 명사들이 다산실학의 일정한 추종자였던 것도 그 영향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

특히 반계(磻溪)와 다산의 개혁사상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토지개혁안으로서의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집필했던 이기(李沂)가 기병(起兵) 중의 전봉준을 찾아가 거사에 함께 가담할 것을 제의한 것도 다산실학의 영향권에 있을 수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농민운동을 전개하면서, 토지문제의 해결방안을 다산실학에서 구한다는 것은 매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주석 6)


주석
4> 윤동환, 앞의 책, 373~374쪽.
5>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460~461쪽, 국립출판사, 1955.
6> 김영호, 「다산학 연구서설 - 다산실학에 대한 연구성과와 그 문제점」.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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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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