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괜찮게 살아내는 법

단순하게, 하지만 절실하게

등록 2020.10.21 10:53수정 2020.10.2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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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그저 그곳에 있듯이 우리도 그렇게 존재하면 된다. 춘천의 깊은 숲속에서 만난 풍경을 담았습니다. ⓒ 김혜경

 
요 근래 책을 이것저것 너무 많이 샀나 보다. 우리 집에 새롭게 입성하며 내게 온 녀석들이 집안 곳곳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 친구들에게도 제자리를 찾아줘야 할 것 같아서 서가 정리를 했다. 평생 욕심낸 거라곤 책밖에 없는데 나의 그 소중한 책들은 독일에서 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든 벗들의 부재로 인한 헛헛함을 요즘 다시 채워가는 중이다. 


서가 맨 아래 칸에서 발견한 공책 한 권. 내 독일어 작문노트다. 독일에서 어학원 다닐 때 매일 독일어로 쓴 일기였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께 따로 내가 한 작문을 수정해달라고 제출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정말 정성들여 코멘트를 써주셨던 그 독일어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해진다. 오랜만에 추억이 나에게 소환되는 순간이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창밖 가을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누가 볼세라 재빨리 닦아내도 소용이 없다. 그때 내 손에 전해진 온기. 눈을 떠보니 내 앞좌석 백발의 독일 할머니가 몸을 뒤로 돌리고 내 손을 잡고 계셨다. 무언의 위로를 건네는 그 따뜻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애써 꾹꾹 눌렀던 설움이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손을 잡힌 채로 그렇게 한참을 더 숨죽여 울었다. 

버스가 종점인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겨우 진정된 나는 할머니를 향해 힘겹게 웃어드렸다. 할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우리는 같이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덕분에 이제 괜찮아졌노라고. 그때 보았다. 할머니 뺨 위로 흐르던 눈물을. 당황하신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시고는 발걸음을 재촉하셨드랬다. 

그날이 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 시간 너머 할머니의 그 따스했던 눈빛이 또다시 나를 울린다. 연락처라도 여쭤봤어야 했다. 뒤쫓아 갔어야 했다. 나도 그런 어른이고 싶다. 이 고단한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언제라도 손 내밀 수 있는 그런 마음 넉넉한 사람이고 싶다. 

내 앞에 빛은 안 보이고 어둠의 터널이 계속될 것만 같던 그때는 내 생이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살아가야 할 의미가 사라졌다고 믿었고 존재의 이유도 무로 변해버렸으므로. 


아니더라. 애초에 우리 삶에 주어진 특별한 존재 이유 같은 건 없더라. 자연이 이유를 알아서 존재하는 게 아니듯 우리도 그저 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더라. 

그리고 내 존재의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부여하면 되는 것이더라. 

시인 릴케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대지가 사계절에 돌아감에 동의하면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공간 속에 푹 파묻혀서 하늘의 별들이 편안하게 위치하는 그 숱한 인력의 그물 속에 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저 존재하면 되는 거라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으로 교육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우리의 일상적 삶은 하루가 멀다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조금은 억울한 감정들의 반복이다. 문득문득 이 모든 것들이 감당하기 너무 버거워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다. 그럴 땐 한 번씩 절망해도 된다. 그렇게 힘겹게 일과를 마치고 축 쳐진 어깨로 돌아와도 된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 하루 고생한 자신을 위해 밥을 짓자. 고기 반찬이 없으면 어떠랴. 보글보글 된장찌개와 고봉밥 한 공기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따뜻한 밥 한 끼 뚝딱 비우고 나면 스멀스멀 찾아드는 나른함 뒤에 얼굴을 빼꼼 내미는 작은 만족감... 그거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매 순간 삶의 어떤 의미를 찾아 너무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자. 그 의미는 내가 찾으려 한다고 찾아지는 게 절대 아닌 것 같다. 그저 하루하루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희망이 사라진 곳에도 스스로 소박한 이유를 부여하며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자는 거다. 단순하게, 하지만 절실하게 그렇게 말이다. 
덧붙이는 글 매일 쏟아지는 답답한 정치권 얘기로부터 잠시만이라도 쉬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늘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자고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존재의 이유 #단순하게 #절실하게 #따뜻한 밥 한 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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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늘 의미있는 것 같진 않지만, 삶은 의외로 참 멋지다. 멍청이들의 희망말고는 늘 희박했다고 하는 그 희망을 부여잡고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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