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유로 나 혼자 견뎌야 했던 것들

[조울증이라고요??]집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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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ksy4237)등록 2021.05.04 17:01
가족? 그게 뭐길래

엄마의 눈물 버튼은 못다 배운 공부였다. 밑으로 다섯이나 있는 동생들의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14살부터 밭을 매고, 들로 소를 데리고 나와 풀을 뜯기고, 온갖 집안일을 했다. 엄마 손에는 연필 대신 낫이 들리는 날이 많았다. 그러니 지금 오빠랑 내가 얼마나 호강하는지 아느냐고 묻는 엄마의 입김에는 어떤 한이 서려 있었다. 그럼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 누군가를 대신해 희생했다는 것.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 그걸 몇십 년이나 감수했다는 게 왠지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엄마의 슬픔에 무심해지고 싶었다.

일 년 가깝게 백수로 지내던 어느 날. 내게 좋은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에디터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뛸 듯이 기뻤다.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할 수 있다니.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날 며칠을 붕붕 날아다니는 것처럼 지냈다. 문제는 정확히 똑같은 시기에 오빠가 운영하는 회사에 인력 문제가 생겼으니 내가 대신 경리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점이었다. (그건 명령이었다) 경리 일은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가족들과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빠 회사에 들어가기 싫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면서 살고 싶다고 외쳤고 가족들은 내 말을 묵살했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은 마음속 응어리가 되었다. 한숨이 뜨거웠다. 마치 엄마가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을 읊조릴 때 내뱉던 입김 같았다. 결국 나도 '가족이 뭐라고'의 한 장르를 견뎌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게 그렇게 고리타분하다고 했는데.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네가 좀 희생해라, 네가 좀 참고 지내라, 가족이니까 도와야지. 부모님과 오빠는 번갈아 가면서 내게 '가족'을 운운했다. 오빠를 도와야지. 네가 해봤자 뭘 한다고 그래? 넌 안될 거야, 넌 실패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오빠 회사에 가. 오빠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다. 아무도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고 내 기분을 살피지 않았다. 내가 내리려고 하는 선택은 실패자의 선택이라고 여겼고, 귀 얇은 사회초년생의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치부했다. 내가 어떤 물건의 부속품처럼 다뤄진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나는 엄마가 14살 때부터 했다는 희생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엄마마저 나한테 이래? 하고 싶은 걸 처참히 박탈당했을 때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앞장서서 내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망치기로 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꿈이 눈앞에 있는데, 허무하게 사라질 것 같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에겐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방문 밖에선 미스트롯을 보며 웃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이렇게 진창 속에 빠트려놓고 웃음이 나와? 눈이 희번덕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커터칼을 들었다. 뭐라도 그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팔등을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나갔다. 나는 나를 망치고 싶었다. 멀쩡하게 존재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픈지도 몰랐다.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긋고 또 그었다. '알아줘. 알아줘. 알아줘.' 그때는 지금 내 마음을, 지금 내 행동을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명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던 것 같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팔등이 쓰라렸다.

그다음 날에는 엄마가 태연하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잔다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고, 그 분노를 다스릴 방법은 자해뿐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끝나고 나면 이 집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벗어나야 한다. 근데 벗어날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주변 지인, 상담 선생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내게 독립을 권했다. 나도 살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들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한테 들들 볶이겠지. 애 단속을 어떻게 했으면 사라지는 줄도 모르냐고. 그럼 아빠는 우울증이 더 심해질지도 몰라. 아마 쓰러질 수도 있어. 병이라도 얻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아빠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는 거잖아. 오빠는 회사가 망하면 어떡하지. 내가 없으면 망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걱정하느라 미칠 것 같았다. 자유를 찾으려면 내 손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망쳐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마음껏 미워만 할 수도 없었다. 오빠는 내가 협조적이지 않으면 쌍욕을 하면서 화를 냈고, 다음날이면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가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우리 잘해보자고 나를 어르고 달랬다. 회사 재정 문제를 남 손에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오빠의 입장이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너무너무 필요하다면서 간절하고 절박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졌다. 어떤 면에선 나밖에 모르고, 사랑해주는 가족들인데 내가 집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죽을 만큼 괴롭고 외롭고 힘든 걸 누구보다 가족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립이라는 방법은 외면할 수 있을 때까지 외면하고 싶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고,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어쩌면 나는 긴 시간 가족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결국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는 가지 못한 채 오빠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안에 무언가를 죽여가면서 견뎠다. 가족이니까 그래야 한다는 이유로.

컴컴한 암흑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

가고 싶었던 회사를 가지 못했다는 상실감은 너무 컸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니까 부작용이 생겼다. 편의점을 갔다가 만 오천 원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쑥불쑥 화가 나서, 비상시 약을 먹어야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심장이 너무 아파서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회사에 출근한 뒤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평화로워진 집 안 풍경을 보고 무기력해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그 방법만 생각했다. 거추장스럽지 않은 방법이 없을까. 좀 더 간편한 방법이 없을까.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방법을 구체적으로 그려볼수록 안심이 됐다. 조금만 더 견디면 돼. 그날은 오늘일까. 내일일까. 한편으론 억울했다. 나는 이렇게나 엉망인데 몸은 지독히도 멀쩡하다는 것이.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지나가는 차에 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부러져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크고 분명한 것이 이렇게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아프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목소리도 잘 나오질 않았다. 밥은 먹었냐는, 어디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질문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내가 말을 안 하면 안 할수록 아빠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었다. 아빠가 큰 소리를 내면 무서웠다.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결국 한 두 마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굴욕적이었다. 그럼 아빠는 지금 제일 속상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듯 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마치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기가 느껴졌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사라지고 싶다. 죽고 싶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죽고 싶은 마음을 말할 사람이 필요했다.

누구든 붙잡고 '나 이런 생각을 했어. 나 이런 결심을 했어. 어제는 거의 죽을 뻔했어.'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헤에엑' 하면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야아, 그런 생각 하지 마'하며 말리는 것이 아니라 '어어 그랬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같은 태도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다. 그리고 내 곁에 꼭 좀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추우니까. 허전하니까. 나는 있잖아. 어차피 49:51에서 51의 확률로 살 거야.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죽진 못하겠지. 왜냐면 슬프게도 나는 겁이 많으니까. 그래도 그 무서운 마음이 비난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그래도 죽고 싶을 수 있음을 이해받으면서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자살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 꺼내기 너무 무거워서, 내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그냥 속으로 삼키고 삼키고 삼키기만 했다. 그랬더니 그 무게에 내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상담실에 가서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선생님은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상황임을 진심으로 이해해줬다. 죽는 것처럼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다른 방법을 택하면서까지 많은 것들을 견뎌야 하냐고 울면서 물을 때에는 조바심내지 않고 기다려줬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에둘러 가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갈 곳이 없으면 기꺼이 자기 집을 내어주겠다고 이야기하던 E, Y, H는 나의 은신처였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돕겠노라며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저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감정은 여전히 제자리다. 오빠 회사에 가기 죽기보다 싫어서 매일 아침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친다. 좋은 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나날이라며 한껏 날이 서 있다. 눈빛과 몸짓에서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여전히 독립할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를 탓하며, 자책한다. 조울증을 진단받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가족들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취약해져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만의 일상을 살아간다. 아빠는 평소처럼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달라고 말한다. 엄마는 손톱이 짧아서 오렌지를 까기 힘드니 대신 까달라고 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내 안에 타들어 갈 듯이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런 사소한 심부름에 응답할 여력이 없다. 가족들의 '아무렇지 않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 나는 아직 멀쩡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번 일을 계기로 원래 먹던 정신과 약이 많이 증량됐다. 아무래도 조울증은 스트레스에 취약하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약을 증량하면서까지 다닐 회사가 아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제가 대신 부모님을 만나 뵐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담 공부를 하는 J의 말을 떠올렸다. 폭력 환경 속에서 크는 미취학 아동에게는 보호 요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J는 주변 환경을 쉽게 바꿀 수 없는 내게도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요인이 필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는 게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상황이 더 악화될지 좋아질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만은 나를 보호해주는 자원 같았다. 가만가만 숨을 쉴 때마다 떠올려 보았다. 내 주변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는 자원들. 상담 선생님의 눈빛, 다양한 언어로 내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 나는 이런 감각에 빚졌구나. 오랜만에 거울 속 나를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당분간은 비록 엉망이더라도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겠다고, 작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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