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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25포스터 제작자는 왜 손모양을 반복 사용했을까' 유감

[주장] 손가락 암호 해독할 시간에 명백한 혐오를 쳐다봐야

등록 2021.05.10 16:37수정 2021.05.1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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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GS25 포스터(왼쪽)는 교체됐다 ⓒ GS25

 
경향신문의 'GS25포스터 제작자는 왜 손모양을 반복 사용했을까' 기사는 GS25에서 자사의 5월 행사를 홍보하는 포스터 속 특정 이미지에 남성비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의혹을 면밀히 파헤친다. 기사는 일부 남성들의 문제제기가 신빙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작성된 듯 보이며, GS25의 해명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남성 비하 의도'를 밝히는 일이 중요한가

기사를 통해 페미니스트 지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풀지 못한 의혹, 포스터 속 '별과 달' 그림이 어째서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읽히는지 그 연유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포스터의 배경 이미지는 별이 수놓인 밤하늘 아래의 캠핑장 사진이며 하단에 별과 초승달 그래픽 이미지가 있다. 일부 남성들은 '관악 여성주의 학회'의 이름이 '달'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 학회의 로고가 해당 그래픽 이미지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비슷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해당 기사 본문에서 '하단에 그런 문양을 넣은 건 좀 뜬금없지 않을까'라는 문장으로 이 의혹의 타당성에 무게를 실었다. 별과 달을 비롯한 만물로부터 페미니즘과 남성 혐오의 기호를 발견하려 애쓰는 분들께 진심으로 궁금하다. 편의점 광고 포스터에 서울 소재 대학교 여성주의 학회를 상징하는 기호를 넣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모든 학교와 모든 지역의 페미니즘 학회, 페미니즘 단체, 페미니즘 동아리, 페미니즘 모임의 이름과 로고를 외우고 있다고 믿어야할까?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은밀한 남성 비하 코드로 사용하기 위해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그럼 그 손가락은?" 그렇다. 손가락이 남았다. 가끔 사소한 의문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까맣게 잊게 된다. 논란이 되는 포스터 속 가장 심각한 남성 혐오로 추정되는 내용은 소시지를 집으려 하는 집게손 그림이다. 해당 손가락 제스처에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따라서 일부 남성들은 "남성 혐오 기업 GS25를 불매하겠다", "더 이상 남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집게손가락 제스처에 실제로 남성 비하의 의도가 담겨 있었는지의 진위를 파악하는 일이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그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말해주는 더 중요한 사실이 따로 있다. 한국 남성들이 분개하는 남성 혐오란 성기의 크기를 놀리는 것이며, 그마저도 (그들에 따르면) 편의점 광고 포스터 속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한국 여성들이 겪는 혐오는 그와 달리 공공연하고 투명하게 일상에 널려있다. 혐오의 내용도 '놀림거리'의 수준이 아니다. 비밀도 상징도 은유도 아닌 명백한 여성혐오로 무엇이 있는지 굳이 짚어봐야 할까?


남성들의 분노, 여성들의 분노

지난 몇 주간 우리가 접한 여성 살해 사건의 수를 우리는 차라리 모르고 싶다. 우리는 자기 집이 아닌 다른 건물의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딘가 숨어있을 불법촬영 카메라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N번방 가입자의 수는 26만 명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여성 응시자에게 성차별적 질문을 한 다수의 기업 중 하나의 이름을 한 응시자의 용감한 고발을 통해 알고 있다. 그 제약회사에 쏟아진 항의와 불매운동이 지금 문제의 편의점에 쏟아지는 그것만큼 격렬했는지 모르겠다.

일부 남성들은 혐오에 맞서기 위해 포스터 속 암호를 풀고 있다. 한국 여성들이 마주하는 혐오는 해독이 필요 없을 만큼 명백하다. 일부 남성들은 추측에 불과한 암호 해독으로 해당 기업의 사과문을 받아냈다. N번방 사건 고발은 수사기관에서 여러 번 묵과되었고, 사건의 공식적인 수사는 민간 집단의 오랜 추적 끝에 이루어졌다.

일부 남성들은 작은 성기 크기를 의미한다고 추정되는 집게손가락 제스처에 분개한다. 한국 여성들은 여자 친구들의, 여자 어린이의, 나이 많은 여성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해당 기사는 남성 네티즌들로부터 "경향신문을 다시 봤다"는 칭찬과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 단지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남성혐오자'로 낙인 찍힐까봐 문제의 집게손가락 제스처를 실수로라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될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암호해독과 그것을 심각하게 대해주는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페미니스트든 아니든 여자들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얼마 전 어느 정치 시사 토론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가운데 앉은 남성 진행자가 문제의 손가락 제스처를 해보이며 "이게 뭐라고!"하며 비웃는 와중에, 양쪽에 앉은 여성 패널 두 사람은 웃으면서 손을 가만히 두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그 손가락) 안 할 거야, 내가 하면 박제가 돼 영원히 돌아다닐 테니까." 나는 이 말을 들은 순간 안도했고 그 다음 순간 크게 절망했다. 그 손가락 제스처를 재연하는 것이 매장 당할 근거가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보복은 가능할 것이다.

이준석 국민의힘(미래통합당) 전 최고위원이 여러 사진 속에서 보여준 다양한 집게손가락 제스처는 문제 되지 않지만,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여자가 실수로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잡거나 하는 모습이 포착되면 아무런 맥락 없이 '남성의 성기 크기를 조롱하는 모습'으로 찍혀서 영원히 고통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피해망상인가 싶다가도, 포스터 속 별과 달 그림 때문에 관악 여성주의 학회가 소환된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절망은 이것이다. 실체가 없는 피해 주장으로부터 실질적 피해를 우려하며 위축되는 것은 여자들이다.

한국 남성의 기분이 훼손당했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 존재론적 열패감을 모를 것이다. 단지 평등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여자들 모두를 싸잡아 "남성의 성기 크기를 조롱하는 남성 혐오자"로 간주하며 존재해서는 안 될 해악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여성들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해당 기사, 기사에 달린 댓글이 그 사회적 분위기를 증명한다.

글을 쓴 기자는 광고 포스터에 실제로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조롱할 의도가 담겨 있었는지,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총 3천자 가량의 기사를 썼다. 그리고 이 기사는 "훗날 경영학 교과서에는 2021년 5월 일어난 'GS25 남성혐오 논란'의 교훈을 어떻게 정리할까. 궁금하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여성들은 후대의 경영학 교과서 보다 현재의 한국 사회의 진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동료 시민을 원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혐오의 암호를 해독할 시간에 보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혐오에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고 노파심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페미니스트든 아니든 한국 여성들은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
#경향신문 #GS25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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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비규환'을 쓰고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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