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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이 최고"라는 당신, 이건 몰랐을 겁니다

취향은 충돌하는 법... 가족 구성원의 소통과 배려가 전제돼 있는 집밥

등록 2022.07.02 12:23수정 2022.07.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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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예찬>을 쓴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말했다. 본디 안전한 사랑이란 없다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본디 불안정하기에 두 사람의 교류란 늘 불확실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매개로 성장할지 헤어질지는 그 불확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하느냐에 있다. 그 불확실이란 대개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충격은 작지 않다. 때로는 이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든 게 괜찮은 사람이지만 가끔 '일해라 절해라', '괴좌번호' 같은 맞춤법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내온다고 생각해보자. 음, 쉽지 않다. 서로의 식성도 그중 하나겠다. 그 차이 또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아내는 내장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면 왜 살을 두고 기어이 내장을 먹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연애를 하는 8년 동안 딱 나와 두 번 곱창을 먹었고, 기억하건대 그마저도 (두 번 다 통틀어) 딱 세 점만 먹었다. 닭고기는 늘 껍질을 떼서 먹고, 다리와 날개 대신 닭가슴살만 집어먹는다. 그리고 생 오이를 과자처럼 먹는다. 

나는 그 반대다. 곱창에 생마늘을 한입에 싸서 먹는 걸 즐기고 닭은 다리와 날개만 먹는다(덕분에 치킨 가지고 싸울 일은 없다). 그리고 오이는 쳐다만 봐도 기겁한다. 그럼 생각해보자. 내가 요리를 전담하는 입장이라면 누구의 입맛에 맞춰야 하는지.  

집밥의 필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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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껍질을 안 떼고 무심코 요리한 닭볶음탕. 미안하다. 오늘은 그냥 먹자. ⓒ 박종원

 
사실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동거인이나 기혼자는 필연적으로 식구들의 입맛을 우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콩나물 머리를 떼고 국을 끓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집밥은 1인 가정의 요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혼자 산다면 자신의 입맛에만 맞추면 된다. 

하지만 당신이 이미 결혼했거나 동거인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근데 매일 자신의 입맛대로만 밥을 차린다면? 싸우자는 얘기이거나 이미 싸운 상태일지 모른다. 이미 결혼생활이 단절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배우자를 향한 지속적인 강요나 폭력일 가능성도 있다. 결국 동거인과 함께 먹는 집밥이란 그 자체로 소통과 배려가 전제돼 있다. 구성원이 먹어주지 않는 집밥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결국 이렇든 저렇든 양보는 필수다. 장조림을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로 만든다거나, 닭다리살 스테이크를 닭가슴살로 바꾸는 식으로. 생각보다 어렵다. 나와 상대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니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나의 욕망 역시 구성원들의 식성만큼이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배우자이지 아내의 전속 요리사는 아니니까. 내가 만든 음식은 곧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기도 해야 한다. 제3의 결과물이 나올지언정 두 사람의 욕망이 한 곳에서 만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건 집밥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얼마나 양보해 왔을까 

그 지점에서 생각할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며칠간 먹을 돼지고기 장조림을 만들고 있던 때였다. 문득 엄마와 아내의 식성이 많이 겹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나는 이제껏 내 입맛에 맞는 밥만 먹어왔잖아? 그렇다면 엄마도 식구들 때문에 양보하며 요리를 한 적이 있던 걸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짐작 가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식구들에게 삼겹살을 잔뜩 구워주고 정작 자신은 몇 젓가락 들지 않는다거나, 소시지 야채볶음을 해놓고 그쪽으로는 시선도 잘 두지 않았던 모습들. 애초에 내가 아니었다면 만들 필요가 없는 메뉴들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가 엄마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나를 향한 양보였을까. 어쩌면 엄마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바라 왔던 건 아니었을까?    

가장 형태의 깊은 공감이란 결국 체험을 기초로 한다. 평생 일해본 적 없는 이가 먹고사는 일의 애달픔을 알지 못하듯이 밥을 차리는 일 또한 그러하리라. 오늘 지은 저녁밥에 식구들을 향한 배려와 양보가 깔려 있다는 사실은 직접 밥상을 차려보지 않고는 모른다. 내가 자라온 내내 소시지 야채볶음이 반찬으로 나오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결국 공통의 경험만이 타인과의 괴리를 좁힐 수 있다. 알랭 바디우가 말한 서로의 '불확실'은 그 지점에서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게 아닐까.      

당연히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늘 성공할 수는 없다. 가끔 내가 먹고 싶다는 욕망이 배려를 앞설 때도 생긴다. 무심코 닭껍질을 떼지 않은 채 닭볶음탕을 해버린 오늘처럼. 그래도 먹는 입장에서는 원하는 스타일의 식사가 아니라고 서운해하지는 말자. 그날은 만드는 사람의 취향이 조금 더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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