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을 찾아 떠난 함양 남계서원과 개평마을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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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수(ccourt)등록 2022.07.18 14:07
이른 여름 휴가로 친척형과 함께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을 다녀왔다. 우리는 우선 남계서원을 둘러보았다. 1552년 세워진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의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한 장소이다. 정여창은 조선시대 초기의 인물이다. 일두(一蠹)의 뜻은 한 마리의 좀벌레라는 뜻이다. 정여창이 스스로를 낮추고자, 겸손의 표현으로 호를 일두로 지었다고 한다. 정여창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며, 한훤당 김굉필의 벗이다. 정여창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에 연류 되어, 함경도로 유배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은 이후에도, 갑자사화 당시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그러나 중정반정이후 정여창은 복권되며, 1610년 우리나라 학자 중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제향 된다. 남계사원은 개암 강익과 동계 정온도 함께 제향 되고 있다.
 

남계서원 풍영루 ⓒ 여경수

 
남계서원의 정문의 이름은 풍영루(風詠樓)이다. 풍영루는 공부하던 이들이 나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누각이다. 풍영루에 올라서면, 남강의 강바람을 쇨 수 있다. 풍영루를 지나면 공부하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유생들의 거처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래라고 불리는 양정재와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로 불리는 보인재가 있다. 남계서원의 강당인 명성당(明誠堂)이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당 뒤에는 사당이 만들어져 있다. 남계서원의 사당 내부에는 정여창의 영정이 걸려있다. 이와 같이 남계서원은 휴식과 학습 그리고 제례의 공간들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남계서원 사당 ⓒ 여경수

 
우리는 남계서원 근처에 있는 개평마을을 찾아갔다. 지곡면사무소를 지나니, 한옥들로 이루어진 개평마을이 나타났다.
 

일두고택 사랑채 ⓒ 여경수

 
개평마을의 한옥 중에는 일두 정여창의 고택으로 알려진 일두고택이 가장 크다. 지금의 일두고택은 조선 후기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일두고택의 대문을 들어서니, 너른 마당을 내려다보는 사랑채가 있었다. 일두고택의 안채 안쪽에는 정여창을 기리는 가묘가 있다. 가묘 옆에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창고가 가묘보다 아래에 있다. 물질보다는는 정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가 건축구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평마을 돌담길 ⓒ 여경수

 
개평마을은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선비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돌담길과 냇가를 따라 골목길을 둘러보며 옛 정취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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