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기념관<?통일의집>을 찾아서?

통일운동을 햐오신 문익환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 만든 통일의 집에서 그 자취를 돌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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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ksuntae)등록 2023.03.18 11:37
#문익환기념관< #통일의집>을 찾아서 
문익환기념관<통일의 집>에 도착하여서 여기저기 미리 사진을 좀 찍어 두고 구경을 하였다. 선생의 손때가 묻은 성경책이며 좀체 보기 어려운 젊은 시절의 사진들과 수형생활에서 풀려나면서 입고 나오신 수형복 등을 전시하여 두었고, 집안 곳곳에서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저절로 선구자의 삶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저절로 묻어나고 숙연하여졌다. 
이 통일의 집은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행사가 열린 1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 문 목사의 가옥 '통일의 집'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안내자료를 받아들고 있다. 문 목사의 유품 2만5천여 점이 남아있는 '통일의 집'은 90년대 초반 모습을 복원해 민주와 통일을 위한 전시 교육 공간으로 꾸몄다.
주소 :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251-38
T : 02-902-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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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집 벽에 그려진 문익환 목사 초상 집의 담장벽에 문익환 목사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 김선태

 
문익환 목사님은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30] 소속의 목사, 한신대학교 [31] 교수, 성서학자[32], 남북통일 운동가, 시인[33], 작사가[34]. 문재린 목사-김신묵 사모의 아들이며, 배우 출신 정치인 문성근의 아버지이다.
부인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박용길 장로이며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35]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늦은 나이에 운동권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첫 사회 활동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거치고 한신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현재 1994년 창립한 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잠시 돌아보며 참관을 한 것들은
조금 늦게 도착한 경기도 지역화원이 도착을 하자 기념관 해설사님이 이 기념관이 조성된 사연부터 기념관의 구성, 그리고 주요 전시물에 대한 해설과 관람 안내를 해주었다. 이번 관람에서 새로운 전시물이 하나 있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옥중에서 쓰신 친필 액자이었다. 평생 붓글씨를 쓰시지 않는 분이신데, 간수가 하두 사정을 하여서 처음으로 붓을 들어서 쓰신, 아니 남기신 붓글씨 액자인데 며칠 전에 이곳에 기증을 하여 주셔서 전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매월 발행하는 신문 형태의 소식지 2023년 2월호에는 [늦봄에게 이런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인간적인 문익환>을 조명하는 내용이었다. 부인에게 써보낸 서신이며 부인의 면사포를 쓰시고 찍은 익살스런 사진, 윤동주와 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의 어린시절이야기 등이 실려 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본연의 업무인 목사 겸 신학 교수로 활동했으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처음투옥된 이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1994년 77세로 사망할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진보주의의 개신교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표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서울대교구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전주교구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사건은 위의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건. 이 사건은 이어지는 전대협의 임수경 방북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다. 실제 당시 김일성과의 합의 내용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남북공동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그가 활동한 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북한이 대남 공작용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범민련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2011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수감에서 풀려나오면 입스셨던 수의 수감에서 풀려나오면 입스셨던 수의도 전시 되어 있다 ⓒ 김선태

 
무단방북 
1989년 3월 27일 북한을 무단으로 방문하여 3월 29일에 김일성을 만났고 합의서까지 체결했다는 점 때문에 우익들에게는 종북 목회자라며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허가 없이 불법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 목사가 북한 체제를 옹호하거나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바람직한 것이라 여겼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문 목사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북한 체제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때문에 문 목사가 본인이 만든 범민련이 해당 항목에서 보듯 북한에 무비판적으로 끌려 다니기만 하는 경향을 보이자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 운동 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무단 방북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을 당시에 쓴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 것을 보면 문 목사는 분명히 북한의 체제도 사회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으며 남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체제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평등을 자유에 이르기까지 추구하고 남한은 자유를 평등에 이르기까지 추구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모두가 온전히 실현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문 목사의 통일관이었다.[48] 그리고 문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주체사상'에 대해 무조건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말싸움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걸 다 들어줬다.[49] 또 문익환 목사가 주체사상은 수령이 아닌 인민을 위한 주체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김일성은 그냥 넘어갔다.
문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서 몇 가지에 '합의'한 것은 맞지만, 이 합의는 엄연히 1991년의 남북 기본 합의서와 2000년의 6.15 공동선언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으로서,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내용은 단 0.00001%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김정일은 본인의 미출판된 회고록에서 김일성과 문익환의 면담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마치 문익환이 북한 주도의 통일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서술해놓고 있다. 정작 북한에서는 문 목사가 1993년 출소 이후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 운동 단체를 조직하려고 하자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통일일꾼으로 거듭나신 문익환 목사님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신분이며 과감히 방북을 추진하여서 김일성과 면담하여서 그 이후 남북 합의를 이루어가는 오솔길을 열었던 분으로 자신이 사시던 작은 집을
기념관으로 꾸며 많은 민족의식을 가진 국민과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일러주고 있는 기념관이다.
 
참고자료
문익환 목사 일대기 "난 통일을 보았네"
https://www.youtube.com/watch?v=_-Pi0jUrGSg
20236.03.04.15:36'<1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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