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함께 평화 공존 역사탐방 3 장준하 묘소 참배

60여년전 사상계 독자 시절이 떠올라 더욱 숙연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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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ksuntae)등록 2023.05.05 12:25
김원봉과 함께 평화 공존 역사탐방 3 장준하 묘소 참배
 
오두산 통일전망대 입구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중준하 공원>이 있다.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88번지><현충시설 등록번호 15-1-33호>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소공원으로 조상 되어 있는데, 특이한 모양의 묘소가 있다. 이름하여 '돌베개'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 때문에 일반 대중들도 모양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돌베개는 선생이 항일트쟁을 벌이던 1944년 부터 1945년 까지의 기록을 담은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서 일본과 전쟁을 벌일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5용사중의 한 분이시다. 억울하게 여의도에 오기 전에 일본이 항복을 해버려서 실행하지 못해 억울해 하셨던 일이었다.
고교시절이었던 1960년 처음으로 사상계라는 잡지에 매료 되어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밥지을 쌀을 조금씩 따로 남겨서 팔아 책을 살 정도로 사상계에 미쳐 있었다. 학교 도서관의 진임을 맡아서 매일 책들과 시름을 하여야 하는 차지이지만, 틈만 나면 사상계를 펼쳐 놓고 있었던 날들이었다. 졸업을 하고 초등교사 발령이 나지 않아서 집에서 기다리면서 농군으로 집안일을 돕기도 하고 남의집 품팔이도 하여서 매월 몰래 감추어 두고 나에게만 주는 사상계를 사기 위해 읍내까지 다녀야 하였다. 

묘소에서 올린 묵념 참석이누언 전체가 장준하 선생께 묵념을 올리며 통일정신을 이어받자고 다짐했다. ⓒ 김선태

 
1964년 발령을 받고 고흥반도의 끝자락 학교에서 근무하면서도 읍내 서점에 신청을 하여 몰래 책을 베달 받곤 하였다. 독자란에 가명으로 투고를 하여서 두 번이나 실리기도 하였던 기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1960년 이후로 내가 존경하는 분 중 한분이신 장준하 선생의 묘소에는 10여년 전에 파주 출판단지에서 전자출판 강습을 받고 있던 중에 장준하 선생 몇 주기 추모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강습을 배 먹고 택시를 불러 타고 달려 와서 추모식에 참석을 했었던 기억도 새롭다.
장준하 선생의 일생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출생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의주군 출생 - 1975년 8월 17일 대한민국 경기도 포천에서 별세.)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다. 종교는 장로회이다. 

묘소에 걸린 현수막 묘소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 김선태

 
주요 이력
본관은 안동으로,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1944년 1월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나 그해 7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중국 쓰촨성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한국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3],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내 국방위에서 활동하였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 선고에 대해 2013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 도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가명으론 김신철(金信鐵)을 썼으며,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이다.
1944년 1월 20일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평양주둔 제30사단 치중대에서 치중병으로 복무하였다. 2월 17일 중지나 주둔 일본군 제65사단 치중대(센(専) 7991부대)에 배속 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하였다. 

장준하 묘소의 돌베개 묘지 봉분이 없고 이렇게 돌베개로 모시고 있다 ⓒ 김선태

 
1944년 7월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쉬저우 시내에서 일본군을 탈영, 중국 팔로군에서 김준엽, 노능서 등 역시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 함께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까지 걸어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고 걸어서 갔다. 탈영하면서 수배를 피해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충칭까지 향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성경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며,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선조들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들이 되자고 다짐했다. 후일 그의 자서전 돌베개는 이때 떠올린 야곱의 돌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탈영후 만난 김준엽과 평생 우정을 나눈다. 군입대 전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재학중이었다. 그들은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최기일은 이 둘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최기일은 김준엽과 신의주고보와 게이오기주쿠 대학 동창이었고, 장준하와는 삭주군 대관동에서 어린시절부터 같이 살아온 고향친구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학병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학병에 응하되 곧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한다'는 방침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김준엽이 탈영을 했고,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탈영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시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중략)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 김준엽 회고록, <장정> 1권, 249쪽"
윤보선 대통령이 5·16을 추인하면서 5월 20일 장면 내각은 총사퇴를 하였고, 제2공화국 붕괴 이후 장준하는 주로 언론활동에 종사하였다. 군정 초기에 장준하는 군사정변을 지지하였다.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뒤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강원용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그 뒤 조선일보 출신 언론인 부완혁에게 사상계를 넘겼으나, 그 후에 부완혁과 갈등하게 되었다. 1962년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사상계(思想界)는 1953년 4월에 장준하가 문교부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이다. 창간호 3,000부가 발간과 동시에 매진되는 등 식자층으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끌었고, 남북통일 문제 및 노동자 문제 등 당시로써는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쉬운 논쟁에서부터 시, 소설 등의 문학작품까지 폭넓은 분야의 글을 실었다. 하지만 주필 장준하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의 부패, 친일, 언론탄압 의혹을 비판하면서 경영난에 시달렸고,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부완혁에게 주필직을 이양하고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1970년 5월의 205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되었다.
비가 추적거리는 장준하 공원에서 잠시; 궁원을 둘러 본 후에 묘소로 올라가서 전원이 빙 둘러서서 묵념으로 선생을 추모한 다음에 장준하 선생의 친필에 새겨진 돌비석을 보고 읽은 다음에 모두 함께 이글을 외우는 시간도 가졌다. 우리 역사에 남을 분이 포천에서 의문사로 시신조차 유족에게 인계 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김수황 추기경이 묘소를 마련하여 묻었으나, 1992년 폭우로 묘지가 씻겨 내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재매장을 하는 과정에서 의문사의 문제가 풀리게 되었다.
시신을 재 입관하기 위해 간을 열었을 때 선생의 머리뼈에는 망치로 때린 듯한 구멍아 나 있는 것이 확인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당시에는 추락사, 약물중독사 등의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둔기로 머리를 때려 사망한 것으로 확인이 된 것이다. 바로 5.16 이후 서로 갈등을 빚어 온 박정희 일단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 시신을 여기 이렇게 고이 잠들게 모시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2002년 무렵에 나는 파주 용미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피주 타임스에 장곡리에 있는 [장준하 선생 말씀비를 임진각으로 옳겨 세울 것을 건의 하였었다. 이 비가 서 있는 곳이 두 개의 방호벽 사이의 작은 공간 그것도 한 쪽 구석에 위치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었다.
이런 인영들을 생각하며 존경하던 장준하 선생의 묘소에 머리 숙여 묵념을 올리게 되어서 기뻤다.
 
2023.04.30.14:58'<2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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