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만에 대학로를 찾은 날!

환갑인 남편과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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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숙(theka6)등록 2023.05.31 17:32
  2023에서 1987을 빼면... 36년 만에 대학로를 찾은 날,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와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그저 뛰었다. 둔탁한 발걸음과 어리버리한 시선을 모아 공연장을 찾으려 애썼다. 멀쩡한 길이지만 나에게는 도무지 미로 같아 쉽지 않은 길을 땀범벅이 된 채 달려야 했다.

 공연 시작 10초 전에 아슬아슬 착석하여 가뿐 숨을 몰아쉬니 옆에 앉은 남편이 화장실을 다녀오지 못했음을 상기시킨다. 지하철 탑승 때부터 화장실을 찾았으니 우리 둘 다 급한 상황이나 '지연입장은 불가'하다는 무대 안내 표지가 빨간 경고등처럼 새겨졌기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무대의 막이 오르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훌륭했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수준급이었으며 공연장의 분위기도 최고였다. 이 멋진 공연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면, 옥죄어오는 화장실의 불편함 없이, 허겁지겁 산만한 입장 없이 감상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극적으로 관람에 성공한 공연! 10초 전에 앉았다.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무대 사진,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와 춤이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의 수준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멋진 배우님들, 파이팅! ⓒ 한현숙

 
 이 모든 것이 다 시간계산의 착오 때문이었다. 아니 우리의, 남편과 나의 잦은 실수와 갈수록 떨어지는 민감성 때문으로... 결국 나이 듦으로 인한 결과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인천 집에서 3시간 전에 출발해야 여유롭게 공연 관람을 시작할 수 있다고 어림잡아 놓고는, 정작 12시가 아닌 1시에 출발하다니... 3시 공연을 놓칠 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사람이 잘못 생각을 하면, 옆 사람이 잡아줬어야 하는데 둘 다 같은 생각으로 함께 실수를 하다니... 분명 같이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토요일 오후, 대학로에서의 연극 관람! 흔치 않은 일을 접한 것은 막내의 일정 변경 때문이었다. 대학생인 막내에게 오늘 공연을 볼 수 없는 사정이 생기자 휴지조각이 될 티켓을 누구보다 아까워한 사람은 정작 나였다. 함께 공연을 보기로 한 막내의 친구 티켓까지 감당하며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갑자기 남편과 함께! 모처럼 데이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곧 다가올 결혼기념일을 의미 있게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으로 선뜻 인천 집을 나섰던 것이다.

 공연 관람 후, 시간에 쫓겨 혼쭐이 난 후에야 대학로 거리를 발걸음 가볍게 둘러볼 수 있었다. 낯선 듯, 익숙한 듯한 거리...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변함없는 청춘의 거리! 젊은이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우리는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길거리 액세서리를 구경하며 예전으로 돌아간 듯 철없이 배회해 보았다.
 

서울 연극제 알림 36년 만에 찾은 대학로, 젊음의 거리에서 설레며 추억에 젖었다. ⓒ 한현숙

 
 30여 년 전, 추억 속에 존재하는 우리만의 특별한 소극장을 찾아 그 건재함을 확인하고 괜스레 뿌듯했으며, 인터넷 지도 따라 겨우 도착한 그 유명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꽤나 뻘쭘했다.

 중년의 부부가 다정하게 대학로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오랜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인천이 아닌 서울에서 버스킹을 감상하며, 한가로이 공원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 얼마나 괜찮아 보이는 흐뭇한 일인가!

 그러나 내 마음은 아까부터 어색하고 찜찜했다. 젊은이들과 섞여 버스킹 공연에 환호성을 지르고, 여느 연인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시선을 떨구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살짝 움츠러든 느낌마저 들었다. 단지 낯선 동네여서 그런 것일까? 젊은이들로만 가득했던 공연장의 열기 때문이었을까?
 
 젤라또를 주문하며 키오스크 앞에서 허둥대던 모습, 왜 메뉴에 그 젤라또가 없는지 당연하게 문의하지 못한 모습, 사지도 않을 좌판대 앞에서 서성거리던 모습은 참 난데없었다.
 

키오스크 앞에서 남편과 어렵게 주문한 젤라또 아이스크림 돈이 있어도 구매가 어려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길거리 음식을 먹을 때 늘상 자식들과 함께 있었음을 깨달았다. ⓒ 한현숙

 
 자녀가 성인이 될 만큼의 나이를 먹은 중년으로, 자가용으로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으로, 인천에 거주하는 남편과 나는... 참 갇힌 생활을 한 듯하다.
(가끔이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지하철 안의 사람들 모습을 통해 세상이 변해감을 확인해야 했다. 지하철 노선표를 검색하며 환승구간을 직접 찾아봐야 했다. 지갑을 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식당이나 카페에서의 주문을 전적으로 아이들이나 후배에게 맡기지 말아야 했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사는 곳에만 갇혀 있지 말고 생활의 반경을 넓여야 했다.)... 그랬다면 이 어색함을 조금 줄일 수 있었을까?

 아이들도 허둥댈 수 있는 키오스크 앞에서, 나이 때문이라고 지레 주눅 들지 말아야 하는데, 참 쉽지 않다. 볼품없는 몸매와 무너진 턱선 앞에서 자신감은 점점 옅어진다. 젊을 때는 웃어넘겼을 실수들이 기억력 감퇴 때문이라 생각하니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단톡방을 헛갈려 메시지를 잘못 올리는 일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공원 벤치에 앉아 같이 늙어가는 남편의 얼굴을 쳐다본다. 함께 고민할 수 있고, 같이 공감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하다. 이심전심으로 매장에서의 허둥댐과 실수를 서로 끄덕여 준다.

 아이들과 비둘기와 젊은이들과... 마로니에 공원은 활기로 가득 차다. 생기발랄한 어여쁜 얼굴들이 밝은 에너지를 쏟아 내고 건물과 건물, 나무와 나무 사이마다 위로와 위안의 글귀들이 즐비하다. 내 마음을 아는 듯한 문장(잘하고 있어, 혼자가 아니야 등)들이 빛을 발한다.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말, 생각에 잠긴다. ⓒ 한현숙

 
 오늘 여기 참 잘 왔다. 막내의 대타로 엉겁결에 본 공연이지만... 참 잘했다. 익숙한 곳만 선호하지 말고, 중년의 또래들만 만나지 말고, 몸이 편한 곳만 찾지 말고, 자식들을 대동하려 하지 말고... 낯설고 서툰 것에 움츠려들지 말고 큰소리 내 보자.

 그것이 사람이든, 기계든, 신문물이든, 장소든 가리지 말고 용기 내 가까이해 보자. 중년의 삶을, 그 이후의 삶까지 흥미롭게 기대해 보자. 가는 세월 야속하지만, 우리에겐 인생의 노하우, 짬바가 있지 않은가! 나이를 먹어 가며 쌓아 온 내공과 경험의 힘을 믿어 보자. 내 인생길, 지금이 가장 젊을 테니...

 오늘처럼 환하고 밝은 곳으로 자주 나오자! 나의 세대에 갇혀있지 말고 고루한 것들을 없애보자. 나이에 겁먹지 말고 스스로 토닥이며 힘내자!  으하하하! 호기롭게 인천행 지하철로 향한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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