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침략 당연하다' 혐한의 논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혐한의 세계 47] 도래문화와 한일관계

등록 2023.06.17 18:06수정 2023.06.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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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인이란 고대 중국,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이주해온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다. 때로는 동남아시아, 페르시아까지도 범위를 넓게 잡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지역보다 조선에서 건너온 이들을 대상으로, 그 자손까지 포함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귀화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도래인으로 널리 쓰인다. 귀화인보다 도래인으로 부르게 된 사정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에서 도래인은 주로 3세기 이후 건너가게 되는데 이 때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가 정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귀화인으로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비해 7~8세기 일본이라고 국가명이 쓰이게 된 이후 귀화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특히 국가 정체를 강조하는 메이지시대 이후 조선과 중국 등 외국으로부터 입국하여 일본에 정착한 이들을 귀화인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다.

현대 일본인을 유전학적 특징으로 보면 크게 조몬인(縄文人)과 도래인(渡来人)으로 구별하여 볼 수 있다. 게놈 분석으로 조사한 결과, 큐슈와 동북지방에는 조몬인 유전자적 특징이 뚜렷한 데 비해, 인구가 많고 일본 중심부인 긴끼지역과 시코쿠에는 우리와 같은 유전적 특징을 가진 도래인의 분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래인과 도래문화

중국과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은 선진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 7~8세기 일본에서 상층 지도부에는 도래인이 3할 이상을 차지한다.
일본 역사에서 율령국가 시대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을 뜻하는데,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정변 등을 이유로 도래인은 일본에 들어오게 되는데, 도래인은 문자, 기술 등에서 앞서있기 때문에, 관료, 전문 기술자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나당연합에 의해 백제가 패한 후, 많은 백제인이 일본에 유입되어, 당시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한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도래인이란 일본으로 흘러들어온 이방인을 뜻하는데, 도래인은 일본사회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원래 외국인이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도래문화라는 뜻은 받아들이는 측이 중심이 되어 이방인의 문화를 수용한다는 의미다. 일본 내에서 섬을 이동해 삶의 터전을 바뀌었다는 국내 이동의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중국이나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의미로만 쓰였다.

원래 외국에서 어떠한 지위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느냐는 일본사회에서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일본 역사에서 도래인이란 선진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달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도래인은 이방인이라는 타자로 인식되어 왔지만, 동시에 일본에 뿌리내리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구성원을 말한다. 도래인은 가지고 있었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쳤으며, 도래문화를 전했지만 일본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일본의 3집단(본토 일본인, 류큐인, 아이누)과 한국인을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 데이터의 분석에 의한 결과에 의하면, 본토 일본인은 일본의 원주민의 후손으로 생각되는 아이누나 류큐인과 어느 정도 유전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지만, 본토 일본인에 있어서의 유전자 대부분은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이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의 도래인에게서 유래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2005년 발표된 유전체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중일 민족 가운데, 한국인과 중국인과는 유전적 차이가 8.4%, 일본인과는 5.9%, 중국인과 일본인 간에는 8.6%로 나타나고 있어, 상대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유전인자의 차이가 작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유전적으로도 가까운 이웃 나라와 서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일본사에서는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고 있다. 일본을 정복한 자신이라면 중국 대륙까지도 목표로 해도 가능하지 않을까는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을 원정할테니 길을 안내하라고 대마도를 통해 요구한 가도입명(假途入明)이 조선 침략의 구실이 된다. 임진왜란 318년 전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큐슈를 침공한 사실을 기억하여 장기적인 방위태세를 위한 포석이었기에, 중국까지도 포함시켰다고 강조한다. 그 외로 무사들에게 토지배분, 해외무역에서의 유리한 조건 등을 제시한 것도 침략의 동기로 들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는 임진왜란을 통해 상대국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고, 오랫동안 서로 경계하게 된다. 일본사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배경을 두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는 동시에 이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하려는 두가지 줄기가 이어져 왔다. 기자의 경험으로는 전자의 경우는 드물었다고 기억된다.

일본 측의 자료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5~6만 조선인 포로가 비자발적인 의지로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포로를 통해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유학에 접할 수 있었고, 도자기 기술 등을 받아들인 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상 서전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고니시의 평양성 점령과 가토군의 함경도 침공에 대해 도요토미의 도량이 컸기 때문이라며 칭송하고 있다. 물론 해전에서는 패했고 여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을 전승 속의 삼한정벌과 그 후 조선식민지 지배와 같이 일본이 조선을 역사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여 온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으로 연결시키며 변질시키고 있다. 삼한정벌과 관련해, 일본사에서 한반도 신라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다르게 과장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차치하더라도 한반도를 침략했다는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를 미화시키려는 역사는 한반도와 좋은 관계를 맺기 어려운 한계가 되고 있다.

오래된 113년 전 한일병합, 431년 전 임진왜란을 들추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어받아야 할 과거인가 아니면 이를 교훈으로 삼아 피하여 할 역사인가를 구분하려 하기 위함이다. 침략의 역사를 미화한다는 것은 이를 계승하여 반복할 가능성이 그 만큼 커진다는 의미로 우리의 안전보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혐한의식이 생성되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혐한 #한일관계 #한일병합 #도래문화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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