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투자자가 읽어 본 책, <칩워 :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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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호(cirang)등록 2023.09.05 08:29
투자자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입문했든 평생을 해 온 일이든 마찬가지다. 올해는 밀이 풍년일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이다. 4분기에는 미국 금리가 1% 오를 것이다. 이런 류의 예측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점술가나 무속인들의 영역이다. 투자자가 내다봐야 하는 미래는 특정한 이벤트나 수치가 아닌 방향성이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정도의 굉장히 불확실한 짐작이다. 부정확한데다 변수가 많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칩워만큼이나 투자도 비정한 세계다.
 
<칩워>에서 캐낸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이러하다.
 
1. 미국은 주도권을 강화할 것이다.
2. 중국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선택을 해야한다.
 
신문과 방송에 범람하는 말이라 헐값이라 하겠지만 그 속을 제대로 파 보자면 꽤나 공을 들여야 한다.
 
가끔 삼성과 하이닉스가 반도체 산업의 태양인 듯한 이야기가 떠돌지만 (책에 따르면) 실제로 반도체, 칩의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해서 미국으로 끝난다. 현재의 삼성과 하이닉스가 만들어내는 칩 역시 미국의 용인과 협조가 없다면 미래는 없다. 생사여탈권이 미국에 있다. 지나친 단정 아니냐고? 아니다. 오롯한 현실이다. 지난 수년 간 보지 않았나. 세계를 휘어잡을 듯한 삼성과 하이닉스의 중국의 반도체 공장들이 미국의 결단에 어떻게 되는지. 지금도 미국 정부가 중국내 최신 반도체 장비사용을 연장해주기만을 바라며 우리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읍소 뿐 아니던가. 실제로 2022년 산업통상자원부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반도체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율은 30%에 불과하다.
 
미국이 틀어쥔 주도권은 윌리엄 쇼클리가 반도체의 개념을 정립하는 트루먼 시대부터 바이든시대까지 부단하게 경쟁자를 물리쳐온 결과이다. 소련, 일본, 대만, 한국, 중국이 그 (칩워의) 상대들인데 그들은 철저하게 미국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스파이들이 새로운 칩을 밀수하는 것도, 수 천 년 농사를 지어온 아시아의 논밭을 갈아엎고 반도체 공장이 올라간 것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갑자기 한국으로 복사된 듯이 그 지형이 바뀐 것도 모두 미국의 뜻이다. (미국의) 적들은 때때로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자일 수는 있었으나 늘 경계의 대상이었으며 2인자의 낮은 의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분투했다. 반면 그 전쟁의 값진 전리품은 대대로 상속돼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엔비디아에 이르는 미국 기업들은 여전히 반도체 세계를 쥐고 흔들고 있다. 잊을만 하면 언론을 장식해 슈퍼을이라 불리는 ASML의 EUV(극 자외선 노광장비) 역시 미국의 허락이 없었다면 그 탄생이 가능이나 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렇듯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그 구성원인 미국 기업들 모두가 항상 승리만 했던 건 아니다. 세월을 낭비하고 자본을 태워버린 기업들도 있다. 근래에는 인텔이 그 분야에서 단연 탑이다. 차례로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칩의 선두였으며 그 만큼 혁신의 아이콘이었고 산업의 표준이었음에도 승리에 취해 근 십 년 근근히 돈은 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명성을 담보로 끌어온 대출에 불과했다. AI 반도체에서도 파운드리 산업(TSMC가 잘하는 반도체 전문 제조)에서도 인텔의 미래는 흐릿하다.
 
권불십년이라는데 미국이 주도권을 쥔 지가 80년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반격의 펀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상대들이 좀 부실했다. 통제 가능한 상대들이었달까? 하지만 이번에는 세다. 중국이다. 중국이 이전의 경쟁자들과 다른 점은 자본에 있다. 14억 내수와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끌어모은 돈의 힘.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게 이 힘을 맛보이고 곳간 문을 열어준 게 미국이다. 미국주도로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라는 싹튼 모를 너른 무논에 모내기를 해 쑥쑥 자라게 한 격이다. 그렇게 자본과 구매력이 생기면서 어느새 중국은 반도체산업에서도 미국의 턱밑을 살살 간질이는 수준에 올라섰다. 이에 대해 미국이 얼마만큼의 위기감을 느끼는지는 체감불가이나 국제질서와 자본주의 원칙 따위 따지지 않고 중국 봉쇄에 들어간 걸 보면 미국의 위기감 운운이 마냥 엄살만은 아닌 모양이다. 기실 과거 화웨이를 향한 무자비한 칼날은 전래 보기 드물게 날카롭고 깊었다. 그 여파로 5G 통신체계는 물론 휴대폰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기업이 몇 해 만에 세계시장에서 눈의 띄게 쪼그라들었다.
 
때린다고 맞고만 있을 중국이 아니다. 반도체 소재인 갈륨과 게르마늄의 수출을 통제했고 칩 제조사인 마이크론을 보안이슈로 발목을 잡았다. 최근에는 몰락한 줄만 알았던 화웨이가 중국 각지에서 비밀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는 뉴스를 전해오기도 했다. 맞고 쓰려졌지만 아직 수건을 던지지 않았고 무릎 꿇지 않았음의 항변이랄까. 게다가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공장이고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내리누르는 키를 쥐고 있다. 또, 희토류로 통칭되는 희귀 광물 생산에서 중요한 허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중국이 칩워에서 미국을 상대로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아직 많아 남아 있다. 미국도 이 난해한 상황을 알고 있다. 블링컨(국무장관), 케리(기후특사), 앨런(재무장관), 러몬도(상무장관)까지 미국의 주요 정부인사들이 쉴틈없이 중국을 방문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간의 상대들처럼 중국 역시 적이자 협력 파트너라는 아주 미묘한 위치에 서 있다.
 
반도체 생태계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과 뒤엉킨 복잡함 속에서 돌아간다. 주도권이 미국에 있다고 해도 절대권력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산업이 굴러가지 않는다. 세계 규모의 공조가 없다면 퇴보와 정체라는 난제를 상대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미국도 첨단 반도체 핵심 장비인 EUV를 미국이 아닌 네델란드 회사에서 생산하도록 했으며 칩 제조 상당부분을 대만의 TSMC에 맡기고 있다. 중국의 발목을 묶어 놓아야겠지만 그들이 미국이 설계한 반도체를 더 많이 구매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앞으로의 반도체 산업에서 다툼의 중심에 있을 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다. 누가 태양이 되고 누가 달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사실은 그게 언제 될지가 더 중요할 텐데 그것을 특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방향성은 잡아야 한다.
 
미국은 주도권을 강화할 것이다. 언제까지? 핵심기업은? 어떻게? 중국을 무릎꿇리되 넉다운되게 해서는 곤란하다. 미국은 중국의 무조건항복을 받아낼 생각이 있을까? 칩워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계획된 싸움이라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시작했어야 한다. 미국이 기다리는 건 항복이 아니라 통제일 것이다.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지키며 미국의 한 발 뒤에서 천천히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미국의 급소가 드러났다. 중국의 사정권 안에서 미국의 칩이 생산되고 있다. 툭하면 중국이 침공하겠다는 대만의 TSMC에서. 반면 미국 기업 중에 실제 칩 생산을 유의미하게 하는 기업은 인텔이 유일하다. 인텔은 지난해와 올해 대만이 아닌 유럽지역에서 생산시설 증설할 계획을 발표하며 파운드리 산업 부문을 키울 것을 예고했다. 혁신과 투자를 겁내던 그 인텔이다. 미국은 거기에도 안심치 못했는지 삼성과 TSMC에는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도록 했다. 중국의 통제가능한 발전과 공장의 증설과 이전을 통한 주도권 강화. 이것이 근미래를 보는 미국의 그림이다.
 
미국의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왔고 중국이 핑퐁하고 받아친다. 일단은 광물과 구매제한이라는 보복이었다. 보복이긴 한데 이건 신호이기도 하다. 다른 손에 쥔 카드를 흔들며 미국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이자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호출 신호. 그리고 그 호출에 화답하듯 러몬도 상무장관까지 중국을 방문했다. 모종의 협상이 이루어지겠지만 단판으로 합의에 이르기는 어렵다. 어떤 식으로든 신호롤 보내고 다시 주요인사가 찾아오고 협상하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우아하게 협상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협상테이블 옆방에서 중국은 무엇가 일을 벌이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 EUV 장비를 만들고 있을까? 미국조차도 국제협력으로 만들어낸 첨단장비를 중국 단독으로? 아니면 러시아와 둘이서? 전기차처럼 내연기관차라는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퀀텀점프하기는 불가능하다. 80년의 반도체 역사가 보여준 대로라면 그러하다. 반도체 산업은 과학과 기술의 세계이면서 오랜 숙련이 쌓여야 수율을 맞춰내는 엔지니어링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3년 현재 중국은 <칩워>가 지적하는 것처럼 레거시 공정으로 생산 가능한 전력반도체나 낸드플레시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른바 비첨단 반도체 분야다.
 
미국과 중국의 칩워는 쉽게 종전을 선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느 한 쪽의 완패를 원하는 전투가 아니므로 총력전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생을 목표로 한 요상한 다툼이랄까. 둘의 관계가 아주 좋아진다면 잠깐의 휴전 정도가 가능하겠다. 그러고는 얼마 못가 또 싸울 것이다. 왕좌는 언제가 하나였다. 트럼프와 바이든에서 봤듯이 정권의 성향과도 무관하다. 생존은 성향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어떻게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리저리 싸움의 양상이 격하게 흔들릴 것은 확실하다. 하여 무어의 법칙대로 숨돌릴 틈없이 변화하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하루하루 주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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