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서른아홉인데 다시 스무 살이 된 기분입니다

항암 후 돌아온 일상...편의점에 출근하는 지금, 행복해

등록 2023.11.28 15:23수정 2023.11.28 15:23
1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방송작가 경력 12년, 4년제 대학교 졸업까지 한 내가 편의점에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린다고 하니 선배 작가가 내게 물었다.


"너는 왜 그런 일만 찾아다녀?"

사실 이전에도 쿠팡 물류센터에서 몇 번 일을 한 경험이 있는 걸 아는 선배이기에 내게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벙쪘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는가? 나는 편의점에 출근하고 일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암 치료가 끝나고 우울증이 찾아왔다
 
a

일하는 편의점 일주일 한 번 출근이라 주로 계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 김유진

 
나는 암 환자였다. 지난 2022년 5월 발병해 올해 3월 치료가 끝났다. 완전 관해(증상이 감소한 상태)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방사선 치료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무기력과 허무함'이 몰려왔다.

암에서 살아났지만 남은 거라고는 반쪽짜리 시커멓게 타버린 왼쪽 가슴과 병든 몸 뿐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있긴 했지만 서른아홉의 나이에 돈이 필요할 때마다 부모님께 이야기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다시 방송작가 일을 시작하기는 싫었고 무서웠다. 그랬더니 다시 죽고 싶어졌다. 사실 유방암 치료가 끝나고 몇 달 뒤부터 우울한 기분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너무 신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우울한 기분이 다시 찾아온 걸까. 오히려 병이 나아서 좋은데 말이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고 아이러니하다. 항암에서 해방되면 살 것 같았는데, 해방되고 나니 감기처럼 찾아온 우울함. 정말 이 우울한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SNS에서 나와 같은 병을 앓다가 재발하고, 생을 달리한 분들을 보면 무서워졌다. 내 몸 안 어디선가 나쁜 암세포가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첫째 동생의 권유로 지난 10월 동네에 있는 정신과에 찾아갔다. 내 인생 이야기를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의사 선생님은 입원 병동이 있는 정신과에 입원을 권유하며 '진료의뢰서'를 써줬다. 엄마는 정신과 입원 전 암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 다시 가보자고 하셨고, 그곳에서 안 교수님을 만났다.

"저는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재발해서 죽은 사람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생겨요. 왜 이렇게 마음이 이중적일까요?"
"원래 사람의 마음은 다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아, 그럴 수 있는 거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이상한 감정들이 그럴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예민하고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잘 우울해졌다. 이런 나의 감정들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까. 그런데 정신과 교수님의 그럴 수 있다는 말, 사람은 다 그렇다는 말이 참 위안이 됐다.

"우울증보다 조금 심각할 수도 있는데, 검사를 진행해 보고 다음 치료를 계획해 보죠."

수십 가지의 문답지에 질문을 한 뒤 임상심리사와 약 1시간 20분간의 상담을 했다. 며칠 뒤 결과를 듣는 날, 이제는 진짜 끝난 줄만 알았던 병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병 코드는 F31.9_F32.9_F41.0

양극성 정동장애, 우울증, 기타 불안장애 모두 3가지의 정신 질환이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쳤지만 나는 더웠고 내 몸은 뜨거웠다. 이날은 서울의 한파경보가 내린 수요일(11월 7일)이었다. 약국에서 약사 선생님께 약을 받으며 한 번 되물었다.

"이 약들은 무슨 약들이죠?"
"조울증, 우울, 정신 분열을 치료해 주는 계열인데 순한 약이에요."


첫 진료 당시 처방 받았던 정신 분열을 도와준다는 아빌리파이정이 반 알 늘어있었다. 우울하지만은 않은 병. 우울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나의 병. 아마 그건 너무 힘들고 길었던 내 인생이 내내 슬프면 진짜 미쳐버릴까, 스스로 방어 기제를 만들어내 기분이 좋아지는 병이 생긴 것만 같았다.

유방암이 걸린 걸 알았을 때 그동안 감기처럼 찾아왔던 '우울감'들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유방암 투병 중에는 '우울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이 아픈 시간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다시 일어서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질환도 약을 먹으며 조절하면 문제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이 시련은 또 지나갈 것이다.

정말이지 약을 먹었더니 상태가 호전됐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행복하다
 
a

머리는 기르는 중 모두 빠졌던 머리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 아직 모자를 써야 할 정도지만. ⓒ 김유진

 
10월이 끝나갈 무렵인 일요일 밤, 침대에 가만 누워 아르바이트를 살피던 중 집 앞 편의점에서 일주일 1번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공고에 지원했다.

아직 몸과 마음이 회복지 않은 나에게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합격했다.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도 몇 년만이다. 스무 살 때 처음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배우던 그때로 돌아갔다. 서른아홉,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된 것만 같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설렜다. 지난 1년간 침대에만 누워 오롯이 핸드폰 창만 보던 내가 드디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세상 밖은 참 좋았다. 나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손님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고.

"이제 편의점이 좀 익숙해졌어요? 저번에 처음이라고 헤맸잖아."

매일 막걸리를 1병씩 3번 사러 오는 할아버지와도 친구가 됐다.

"어서 오세요."
"아이고 인사해줘서 고맙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디 사세요?"
"나 저기 바로 옆 동 살아."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주님도 너무 좋으신 분이다. 모르는 게 생길 때마다 전화를 하면 정말이지 5초도 안 돼서 전화를 받고 알려주신다.

편의점은 유통기한이 1초만 지나도 음식물을 폐기해야 하는데 폐기한 삼각김밥을 전자레인지에 20초 데워 먹는 그 맛도 꿀맛이다.

학교가 끝나고 달려와 라면을 먹는 아이들이 흘린 라면 국물을 닦고 있자니 한 아이가 말을 건다.

"제가 닦을게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편의점에 출근한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진부하지만 '파랑새는 집안의 새장에 있었다'는 옛 동화가 진리였다.
#아르바이트 #일상생활 #암투병기 #편의점알바
댓글1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낯선곳의 어색함과 이질적인 풍경을 사랑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