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수 읽기,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등록 2023.12.23 15:09수정 2023.12.2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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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 그새 내년 예산요구서 내는 때가 돌아왔다. 예산요구서를 들여다볼 때마다 도대체 얼마인지 헛갈린다. 더구나 단위를 '천원'이라고 해놓고 '1,274,337'처럼 써놓으면 나 같은 어리보기는 단번에 읽어내지 못하고 허둥대기 일쑤다.

일상에서 보면 버릇처럼 세 자리마다 반점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계산프로그램에서 서식으로 정해놓은 까닭에 프로그램에서 저절로 그렇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깟 일로 무어 그리 투덜대냐고 나무라겠지만, 3,000,000,000,000 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에서 숫자를 곧바로 읽어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만 그런가 몰라도 얼마인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일일이 끝자리 수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하고 숫자를 읽는다. 나는 반점따윈 무시하고 '1,2∕74,33∕7천'이나 '1,2∕30,15∕1000'처럼 빗금을 그은 뒤에 빗금 자리에 조, 억, 만 같은 셈씨를 넣어 읽는다. 그래서 말인데, 세 자리마다 반점을 친 숫자를 날마다 보는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을까.

말이 났으니,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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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교과서 일부. 우리 아이들은 만보다 큰 수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준다. ⓒ 아이스크림출판사

초등학교 아이들은 4학년 때 큰 수 읽기를 배운다. 만(10000)보다 큰 수는 네 자리씩 끊어 읽는다고 배운다. 일, 십, 백, 천까지만 읽을 줄 알면 그다음부터는 거저 먹기다. 우리 말 셈씨는 '만, 억, 조, 경, 해, 자 양... 불가사의, 무량대수'처럼 단위가 넘어갈 때마다 0이 네 개씩 붙는다. 

그런데 신문방송은 두말할 것도 없고 공식 문서에 쓰는 숫자들을 보면 세 자리마다 반점을 친 데가 많고, 곧잘 단위를 '천'이라고 해놓아서 학교에서 배운 것과 일상이 어긋나게 해놓았다. <행정효율과 협업촉진에 관한 규정 시행 규칙> 제2조(공문서 작성의 방법) 제②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문서에 금액을 표시할 때에는 「행정업무의 운영 및 혁신에 관한 규정」(이하 "영"이라 한다) 제7조제4항에 따라 아라비아 숫자로 쓰되, 숫자 다음에 괄호를 하고 다음과 같이 한글로 적어야 한다.
(예시) 금113,560원(금일십일만삼천오백육십원)

<행정업무규정>은 "행정업무의 간소화·표준화·과학화 및 정보화를 도모하고 행정업무 혁신을 통하여 행정의 효율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숫자를 저렇게 적으면 오히려 읽기를 방해해서 효율을 떨어뜨린다. 이것저것 다 떠나 세 자리마다 반점을 치면 누가 좋을까. 말하나 마나 영어 쓰는 사람들이다. 영어는 세 자리마다 셈씨(사우전드-밀리언-빌리언-트릴리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재미삼아 다음 숫자를 한번 읽어 보시라.

1,234,567,890,123

단숨에 쉽게 읽히는가. 모르긴 해도 열에 아홉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집어가면서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하면서 맨 앞자리가 1조임을 알아낸 뒤에 거꾸로 읽어내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그닥 어렵지 않다. 반점 친 자리에 사우전드(thousand), 밀리언(milion), 빌리언(billion), 트릴리언(Trillion)을 넣어 "1트릴리언 234빌리언 567밀리언 890사우전드 123"처럼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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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식 숫자 읽기와 우리 식 숫자 읽기 ⓒ 이무완


그림에서 보듯, 큰수를 쉽게 읽자면 우리는 네 자리마다 반점을 쳐야 한다.  '1,2345,6789,0123'처럼 잘라주어야 '1조 2345억 6789만 1234'처럼 단숨에 읽을 수 있다. 그러니 <행정업무규정>에 나온 보기부터 엉터리다. 반점을 왜 치는가. 숫자를 쉽게 읽는 수단인데, 그게 오히려 걸림돌이 되니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을까. 더욱이 교실에서는 네 자리씩 끊어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교실 밖에서는 세 자리마다 반점 친 숫자를 읽으라고 해서 배움을 쓸모 없게 한다.  
#큰수 #영어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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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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