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가르쳐 준 단편소설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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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주(charm10)등록 2024.01.15 10:12
<스포일러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백치는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계용묵의 소설 속 주인공은 백치이다. 본명은 '확실'이지만 언어장애가 있어서 말을 하면 '아다다' 소리만이 연거푸 나와 ' 아다다'라고 불렸다. 나름 양반집 딸이지만 이런 장애가 있어 시집을 못 가 어머니는 늘 구박을 일삼다가 결국 지참금을 두둑이 주며 시댁을 먹여 살리는 조건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입에 풀칠하기 조차 힘들어 늘 싸움만 일삼던 시댁에서는 처음엔 아다다를 극진히 여기고 사랑해 주었지만 어느새 형편이 좋아지고 여유로워지자 언어장애가 있는 아다다가 못마땅해 학대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다다는 시집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왔다.

소박맞은 아다다가 마음을 뉘일 곳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수롱이밖에 없었다. 수롱은 삼십이 넘은 총각으로 아다다는 수롱이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다고 믿었다. 수롱이 입장에서는 아다다를 꾀어 결혼하면 돈으로 여자를 사지 않아도 되니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수롱이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전 결혼생활의 트라우마로 돈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아다다가 수롱이의 돈을 물에 모두 버리자 화가 난 수롱이는 결국 분노가 폭발해 아다다의 중앙을 발로 연거푸 차고 데굴데굴 굴러간 아다다는 바닷물속에 잠기어 영원히 생을 마감한다.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름 고육지책을 마련했던 아다다의 노력이 오히려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자신을 죽인 것이다. 이런 비극도 있을 수 없겠다 싶다. 

이 소설은 1935년 발표된 소설이다. 계용묵 작가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멋진 인물들보다 뒤편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부당한 일들 당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보지 못하는 가엾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많이 내세웠다. 아다다고 마찬가지 인물인데 이 소설 속 아다다는 누구보다 순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 비극적으로 들린다. 아다다는 이전의 경험으로 돈이 모든 불행의 원흉이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수룡이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버리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 행동이 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편 된 사람으로서 그런 이유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다는 건, 과연 자신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룡이에게 아다다는 그저 자신을 결혼에서 구제해 줄,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집안을 일으켜 줄 돈줄로 봤던 첫 번째 남편과 다를 바가 없다. 두 결혼생활 모두 사랑이 없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고자 했다고 한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에는 하나같이 결점투성이에 못난 사람들 투성이다. 자신의 딸이 장애가 있다고 구박만 일삼는 어머니, 가문을 더럽힌다고 박대하는 아버지, 재산이 불어나자 학대하고 다른 여자를 들인 첫 번째 남편, 처음엔 아다다 편을 들자 역시 집안이 여유로워지자 아다다를 쫓아낸 시아버지, 그리고 사랑인 척 꾀어냈지만 돈을 잃자마자 분노하여 아다다를 죽인 두 번째 남편, 수룡이. 이 소설이 1935년작임에도 그리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오늘날의 현실 세태를 아주 잘 반영해서가 아닐까? 사랑보다 조건이, 물질적 여유가 더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이 소설 속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쉽게 되풀이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비록 아다다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지만, 수룡이가 아다다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돈은 다시 모으면 된다고 말했으면 어쩌면 둘은 아다다의 바람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일구어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려면 애초에 수룡이가 돈 그러니깐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사람이었어야 가능한 일일 테지만 말이다. 

세태가 이러한 건 물론 사회구조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경쟁에서 낙오되면 여차 없이 짓밟히고 갖은 고생과 경멸과 조롱을 겪어야 하니깐. 그렇지만 내가 생각할 때 아무리 경멸과 무시와 조롱을 당해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에는 비할바가 못 될 것 같다. 누군가를 학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조롱과 멸시, 무시가 무슨 소용일까.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이 있는데... 물론 나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안전망이 되어줄 포근한 안식처와 물질적 여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없어졌다고 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한다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만약 모든 남자가 그런 속성을 지녔다면 너무 무서울 것 같다. 그건 아니겠지... 나는 작가가 물질주의행태를 비판한 것이라 믿고 싶다.

내가 읽었던 만화책 중에 <하늘과 바다사이>는 이 소설과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남자와 까막눈인 여자의 사랑 이야기인데 학대받던 여자가 교사인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됐지만 전쟁 중 징집된 남자는 전쟁터에서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여자는 평생 그 남자만을 그리워하며 사는 내용이다. 순수한 남녀가 시대적 비극에 결국 사랑마저 찢이겨져 너무 가슴 아프고 애절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하게 만드는 유혹과 압력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전쟁, 지진 피해 등 세계는 혼란한 정세 속에 있다. 지금은 이웃나라의 일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겠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고귀함을 잃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아다다의 어머니였다면 장애아를 낳았다고 구박하고 한탄할 게 아니라 교육서를 찾아보며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 같다. 청각과 시각장애를 지녔음에도 훌륭한 위인이 된 헬렌켈러도 있고, 미숙아로 태어난 평범했던 아들을 천재로 키워낸 칼비테도 있다. 무지하고 무자비한 부모 밑에서 여러 사람들의 학대만 받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아다다의 인생이 너무 기구하고 가엾다.      

사람들은 마음에 여유가 없을수록 야박해지고 날카로워지기 쉽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돈을 욕망하고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가 묻고자 했던 메시지처럼, 과연 그게 꼭 행복과 관련이 있는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물론 최저생계조차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이들의 아사나 고독사가 뉴스를 장식할 때도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더 갖지 못한 욕심,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자괴감일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아다다처럼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로 함부로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느꼈다. 실패한 결혼보다는 독신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성숙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 진심으로 함께하고 싶을 때, 그때서야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https://brunch.co.kr/@lizzie0220/674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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