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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위로 걷는 12km 노둣길 섬티아고

[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31] 기점·소악도

등록 2024.03.22 16:51수정 2024.03.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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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신안 천사섬의 섬티아고는 시작부터 끝까지 바다와 섬, 갯벌을 바라보며 걷는 둘레길이다.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을 잇는 12km 둘레길에는 밀물 때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노둣길도 있다. 기점·소악도의 5개 노둣길을 연결하면 1980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노둣길이다.

노둣길은 예부터 섬 주민들이 섬과 섬사이의 갯벌에 돌을 쌓아 만든 징검다리다.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해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지만 도로 높이가 낮아 밀물 때는 길이 잠긴다. 아슬아슬하게 썰물 때를 놓치면 물속에 들어간 노둣길이 다시 드러나기까지 서너 시간 기다려야 한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아름다운 갯벌을 가로지르는 이 길은 전라남도가 2018년 벌인 '가고싶은 섬' 사업을 통해 새롭게 탄생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800km)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섬티아고라 불린다. 순례길을 3~4시간 걷다 보면 기도실 같은 작은 예배당 12개를 만난다. 예수의 열두 제자에 숫자를 맞추었다. 

람사르 습지를 도는 둘레길

순례길에서 만나는 예배당 열두 개는 국내외에서 이름 높은 공공건축 및 설치미술 작가들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강영민, 김강, 박영균, 손민아 작가가 참여했다. 해외에서는 장미셀 후비오, 파코, 브루노 프루네, 아르민딕스, SP38 등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작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불교 쪽에서 국가 예산으로 특정 종교의 기념물을 12곳이나 짓는 것은 '특정종교 편향'이라는 이의를 제기했다. 헌법 20조 2항에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예수의 열두 제자들 이름 대신에 건강의 집(베드로) 소원의 집(야고보) 등으로 개명했다. 원래 명칭도 '12사도 순례길'이었으나 '섬티아고'로 바뀌었다.

기점·소악도는 섬 주민의 80%가 기독교인. 한국 최초의 여성 순교자 문준경(1891~1950) 전도사가 나룻배에 몸을 싣고 일년간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도록 전도를 한 지역이다. 문 전도사의 그 고무신을 다 모아 놓았으면 백 켤레가 넘었을 것이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순례자들만을 위한 길은 아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생물권 보존지역이자 람사르 습지로 이어지는 섬과 갯벌을 걷다 보면 마음이 고단한 사람들에게는 사색과 치유의 나그넷길이 될 수 있다.

섬티아고는 하루에 주파하는 마라톤 코스도 아니다. 쉬엄쉬엄 걷다가 중간에 대기점도 노둣길민박이나 병풍도같은 데서 하룻밤 묵어간다면 추억 거리가 될 것이다. 노약자들은 한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하고 승용차 투어를 하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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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건강의 집(베드로) ⓒ 황호택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내리면 처음 만나는 예배당이 1번 건강의 집(베드로). 건물 외벽은 하얗고 지붕은 코발트 블루여서 지중해 연안의 산토리니 풍 건물을 옮겨온 듯하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으나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보면서 뉘우친 수제자. 네로 황제 때 체포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가톨릭의 초대 교황이다.

예배당이 해가 뜨는 정동(正東)을 향하고 있다. 섬의 등대 역할도 한다. 대기점도에 여객선 터미널이 없어서 내부는 대합실처럼 꾸몄다. 종탑의 키가 작아 순례자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종을 치고 순례길을 시작한다. 건강의 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12km 순례를 마치고 건강해지라는 축원의 뜻이 담겨 있다.

2번 생각하는 집(안드레아)은 북촌마을 동산에 있다. 하늘색 돔은 대기점도에서 많이 재배하는 양파를 형상화했다. 예배당 앞에는 고양이 조형물을 설치했다. 1990년대 들쥐들이 번성해 피해가 커지자 고양이를 들여왔고, 고양이를 보호하기 위해 섬에서 개를 내보내 대기점도는 고양이 나라가 됐다.

안드레아는 세례 요한의 제자, 안드레아가 형인 베드로를 예수에게 소개했는데 제자 서열에서 베드로는 1번이고, 안드레아는 2번이다.

다리 건설 NO, 섬다운 맛 살리는 병풍도

생각하는 집 앞으로 병풍도로 들어가는 노둣길이 나 있다. 조선 인조 때부터 대기점도와 병풍도에 해주 오(吳)씨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노둣길 앞에 해주(海州) 오씨 세거비(世居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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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생각하는 집(안드레아) ⓒ 황호택

   
병풍도의 맨드라미 정원에는 12사도상과 천사의 상이 있다. 10월에 맞춰 여행을 가면 병풍도에서 맨드라미 축제를 구경할 수 있다. 섬의 이름이 유래한 병풍바위도 장관이다. 병풍도는 맨드라미 색깔에 맞추어 가옥의 지붕을 빨간색으로 통일했다. 섬별로 지붕에 변화를 주는 신안군의 컬러 마케팅이다.

병풍도 주민들은 군에서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하는데도 "섬다운 맛이 사라진다"며 반대한다. "노두가 끊겨 커플들이 섬에서 1박을 해야 숙식비도 쓰고 저출산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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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 절벽이 파도와 북서 계절풍에 침식, 풍화돼 병풍 모양이 됐다. ⓒ 신안군

 
3번은 그리움의 집(야고보). 숲속의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작품. 실내에는 신라 성덕왕신종에 들어 있는 비천상(飛天像)이 부조됐다. 밖의 뒷벽에는 분홍색의 십자가를 음각했다.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이 앞에는 신주단지를 모셔놓고 뒤에는 십자가를 숨겨두어 탄압을 피했던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흐르는 길을 내려가면 연꽃이 가득한 못이 불교 분위기를 낸다. 그리움의 집은 종교간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4번은 생명 평화의 집(요한). 요한은 예수가 못 박혀 죽는 모습을 보았고 부활을 목도했다. 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영적인 통찰력으로 예수의 생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내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도 들었다.

박영균 작가는 동네 할아버지가 희사한 땅에 4번 예배당을 지었다. 작가는 예배당에서 창을 통해 할머니의 무덤이 보이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예배당에 오면 나무토막에 무릎을 꿇고 할머니 묘소를 향해 기도를 드린다. 예배당 앞에는 염소상이 서 있는데 할아버지가 키우던 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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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생명평화의 집(요한) ⓒ 황호택

  
5번 행복의 집(필립보)은 소기점도에서 소악도로 들어가는 노둣길 초입에 있다. 예배당이 너른 갯벌을 바라보고 있어 출항하기 위해 바다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배의 모습 같다. 프랑스 작가들이 고향의 붉은 벽돌과 섬에서 채취한 자갈을 사용해 행복의 집을 건축했다.

섬사람들이 쓰던 돌절구로 둥근 창문을 조성했다. 하늘로 솟은 첨탑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조각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붙였다. 실내에 들어가면 목선(木船)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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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집(필립보) ⓒ 신안군

 
필립보는 예수 제자 중에서 교육도 받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필립보는 5천 명 군중에게 음식을 먹이려는 예수에게 "저마다 조금씩 받아먹게 하자면 2백 데나리온(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돈) 어치의 빵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한 푼의 데나리온도 들이지 않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군중의 음식을 해결했다.

6번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은 물 위의 유리집이다. 소기점도 연못 위에 스테인드 글라스로 지었다. 연못이 깊어서 유일하게 들어갈 수 없는 예배당이다. 안에는 물결 모양의 마루가 놓여 있다. 밤에는 태양광으로 불을 밝혀 근동의 날벌레들이 집결한다.

바르톨로메오는 성경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는 제자다. 인도 쪽으로 가서 순교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열심히 살았으나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다 지켜보고 있었다.

7번 인연의 집(토마스)은 파도가 치는 듯한 지붕 선이 인상적이다. 왼쪽 벽면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돋을새김(부조) 되어 있다.

토마스는 '의심 많은 토마(공동번역 성경 표기)'라고 불리지만 긍정적으로 '질문 많은 토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터뷰의 기본이 팩트 확인을 위한 질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하고 예수의 몸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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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기쁨의 집(마태오) ⓒ 황호택

 
8번 기쁨의 집(마태오)은 황금빛 돔 장식이 이슬람 사원을 닮았다. 만조(滿潮) 때는 노둣길이 사라지고 황금 돔 예배당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된다. 실제로 물때를 잊고 4시간 동안 갇혀 있다 풀려난 순례자들도 있다.

마태오는 유태인들에게 식민세력인 로마제국의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稅吏)였다. 유대인들은 세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세리를 그만두었다.

이슬람 사원 같은 기쁨의 집
 

8번까지 순례를 마치면 가까운 곳에 있는 소악교회를 들러야 한다. 임병진 목사와 신도들이 자갈밭을 잔디밭과 꽃밭으로 가꾸었다. 섬에 있는 교회 중 가장 예쁜 교회일 것이다. 임 목사는 방송사 PD 출신으로 삶의 길에서 좌절했으나 개심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교회 화장실에는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두 행 짜리 시가 쓰여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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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소악교회. 문준경 전도사를 알리는 표석 위에 문 전도사의 고무신과 보따리가 올려져 있다. ⓒ 황호택

  
교회 앞에는 '섬마을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기념비가 서 있다. 문 전도사는 병풍도와 기점·소악도 등 21개 섬을 나룻배를 타고 다니며 신앙을 전파했다. 1950년 10월 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는 공산당원들에게 체포돼 증도 앞바다에서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문 전도사는 17살에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 신학교에 다녔다. 이웃 증도에는 성결교단에서 2013년에 세운 기념관이 있다.

9번 소원의 집(작은 야고보)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폐자재를 활용해 지은 예배당이다. 섬 주민이 쓰다 버린 녹슨 닻으로 외벽을 장식했다. 유럽의 어촌에는 어부들이 거친 바다로 나가기 전에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소가 있는데, 작가는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물고기 모양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예배당 밖으로 물이 빠진 갯벌이 보인다.

10번 칭찬의 집(유다 타대오)은 소악도와 진섬을 연결하는 노둣길 삼거리에 있다. 과거에는 쓰레기장이었으나 지금은 뽀족한 삼각형 지붕이 네 개 있는 하얀 집으로 변신해 순례객들을 맞는다. 한 건물이 네 개의 지붕을 갖고 있고 지붕의 모양이 각기 다르다.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르지만 서로 칭찬하면 하나가 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양성의 인정이다. 타대오는 작은 야고보의 친형이다. 어린 시절 예수와 한 동네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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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 사랑의 집(시몬). ⓒ 황호택

  
11번 사랑의 집(시몬)은 연인들이 낙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포토 존이다. 건물 꼭대기에는 '조는 하트' 캐릭터가 올라가 있다. 조는 하트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상징한다. 조개 껍데기 부조가 여러 곳에 설치돼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사랑도 아픔을 이겨내야 결실을 거둔다는 의미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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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지혜의집(가룟유다). ⓒ 신안군

 
12번 지혜의 집(가룟 유다)은 사랑의 집에서 오솔길로 한참 걸어가야 나오는 딴섬에 있다. 아름다운 무인도는 하루에 두 번 밀물이 들어오면 길이 끊긴다.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했을 때 가룟 유다는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그래놓고 가룟유다는 은전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겼다. 유다여 가룟유다여, 배신의 아이콘이여. 그는 예수를 배신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기적인 욕망에 끌려가다 파멸에 이른 유다에게서 순례자들은 역설적으로 삶의 지혜를 배울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병희, 《12사도와 떠나는 섬티아고 순례길》, 학지사비즈, 2024
임병진, 《문준경에게 인생의 길을 묻다》 사랑마루, 2015
정원영, 《영원한 전도자 하나님의 사람 문준경》, CESI 한국전도학연구소, 2019
#신안천사섬 #섬티아고 #12사도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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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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