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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라는 이름의 폭력, '막달레나 세탁소'는 살아있다

[서평]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등록 2024.03.22 16:16수정 2024.03.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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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 다산책방

 
어떤 위대한 것은 사소하게 취급된다. 자연의 섭리로 포장되어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타인에게 대가 없이 음식과 쉴 곳을 내어 주고 기대게 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마음이 아니다. 이런 마음을 높은 층위의 돌봄이라 부르든, 연대감이라 부르든 말이다.

지난해 <맡겨진 아이>로 화제가 되었던 클레어 키건의 새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타자화하지 않은 연민이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거룩한 메시지와 달리 이 이야기가 끌어온 배경은 자못 공포스럽다. 1985년쯤 아일랜드의 한 도시의 "강 건너 언덕 위에 있는 위풍당당한 건물"인 수녀원이 그 온상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할 수녀원에서 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래전 일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아일랜드 말고도 세계 각지의 수녀회는 매춘부나 미혼모 등 소위 '타락한 여성'을 교화하기 위해 작업실과 세탁소를 운영한 적이 있다. 이중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는 심대한 인권침해로 악명 높았다.

매춘부나 미혼모가 된 것이 여자들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여자들은 이 곳에 감금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평생 노역과 학대에 시달리다 죽었다. 한 '막달레나 세탁소'에서는 1925년~1961년까지 796명 아이들이 정화조에 묻혔을 정도다. 모두가 공범이 되어 쉬쉬하던 비밀은 결국 차후에 새어 나와서 범죄가 밝혀졌고, 1996년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

여자를 가두고 노역시키는 폭력은 비단 아일랜드에서만 벌어진 범죄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 못지않은 엄청난 폭력이 있었다.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윤락녀' 등 '요보호여자'를 보호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20~30곳에 여성수용시설이 설립되어 최대 1만 3천 명이 수용되어 인권침해를 겪었다.

통제와 단속과 처벌... 한국에도 그런 역사가 있다


말이 좋아 '보호'이고 '선도'이지, 실상은 통제와 단속과 처벌의 연속이었다. 1995년 용인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창문의 쇠창살과 안으로 걸린 출입문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들 37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다.

이 외에도 '몽키하우스'로 불리던 동두천 낙검자 수용소는 성병 검진증이 없는 기지촌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 감금하고 페니실린을 투여해 적지 않은 여자들이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김훈의 소설 <저만치 혼자서>는 낙검자 수용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기지촌 여자들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했던 수녀의 이야기다.

미군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 끊어낼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수녀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타락한 여자'로 죄악시했을 것이다. 여성 인권침해와 미소지니의 예는 수도 없이 들 수 있지만 짧은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아일랜드건 한국이건 세계 어느 곳에서건 여자들의 몸은 쉽게 던져지고 훼손되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여성 신체 훼손의 역사를 배경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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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24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와 시민들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야산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현장에 모여 피해자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 유성호

 
주인공 펄롱은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는 기독교 신자다. 알뜰한 아내와 다섯 딸아이가 있고, 석탄과 장작 등 땔감을 공급하는 일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장이다. 그는 수녀원에도 석탄을 공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일로 수녀원의 참상을 알게 된다.

비밀을 알게 되면서 펄롱은 마음이 어수선하다. 석탄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그 소녀가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일 수도, 그 소녀가 빼앗긴 고작 14주 된 아기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크리스마스에 정작 예수의 삶을 대리해야 할 수녀원이 예수를 반역하고 있었다.

펄롱은 마침내 자신이 마주하는 오늘의 안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자각한다. 가사도우미였던 16살 어머니가 미혼모로 임신했지만, 주인이었던 미스지 윌슨은 어머니를 내치거나 수녀원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보살폈다. 그가 없었다면 어머니는 평생 강제 노역과 학대에 시달리다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새겼다.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준 미시즈 윌슨의 호혜적 돌봄은, 펄롱에게 '이젠 네 차례'라고 알려온다. 석탄 창고에 갇혀 학대당하는 소녀를 모른척하지 말라고 한다. 도시 전체가 수녀원과 '한통속'인 작은 지역에서 큰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분명 펄롱은 소신을 행함으로써 적지 않은 재정적 불이익과 지인들의 따돌림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펄롱이 자신의 또 다른 어머니인 학대당하는 소녀를, 그의 아내가 무참히 내뱉은 말처럼 "세상에는 사고 치는 여자들이 있"고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외면했다면, 평생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고 살아갔을 것이다. 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안위를 위해 양심을 외면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내 가족의 안위만 챙기는 가족이기주의는 사회적 돌봄을 나누는 연대감을 희미하게 하지만 흐릿함을 밝히려는 노력도 있다.

사회적 돌 봄이 불가능하지 않은 경우를 요즘 지역에서 목격하고 있다. 더러운 오염원이라도 되는 양 모두 외면하는 곳에,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공존하는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사회적 돌봄이나 호혜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기계적인 정치적 올바름만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일과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돌보는 것은 양립 불가하지 않다.

'탈(脫) 성매매만이 갱생'이라는 관료화된 구원론으로 각박한 삶의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낼 수 있을까. 지역의 성매매 집결지를 무조건 폐쇄해야 한다는 강경 일변도의 시정에 앞장서는 수녀를 목도하면서, 하느님이 진정 당신의 옆에 서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한 손에 보라색 풍선을 들고 집결지를 누비며 여자들의 삶을 구경하고 모욕하는 것이 구원의 길일 수 없다.

매춘을 그저 단죄하기 앞서, 여자들이 이곳에 흘러들어오게 만든 가정폭력과 성폭력,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남성의 70%밖에 받지 못하고 비정규직은 여성이 대부분이고 아픈 몸은 경쟁력 상실로 내쳐지는 불평등한 노동 시장, 대물림하는 가족 자본을 따라잡을 수 없는 계급 양극화, 'K장녀'나 '영케어로'로 호명되는 고정된 돌봄 젠더화 등을 모두 하느님의 재판정에 세워야 하지 않는가.  

성매매로 아픈 가족을 돌보고 아이를 양육하며 생계를 잇는 여자들의 삶, 그걸 '죄 많은 여자'라 쉽게 단죄할 수 있는 자만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지라고 예수가 말하지 않았던가.

매춘부와 미혼모 등을 잔혹하게 부리고 죽였던 '막달레나 세탁소'는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문을 닫았을까. 아니다. 세탁소는 이후 반성매매 단체로 문패를 바꿔 달고 성매매 여성들을 억압하고 낙인찍었다고 알려져있다. 보라색 풍선을 들고 집결지를 쏘아보던 그 수녀도 이런 곳을 세우려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부정의가 신의 이름으로, 여성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름을 바꾼 '막달레나 세탁소'가 부활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은이), 홍한별 (옮긴이),
다산책방, 2023


#이처럼사소한것들 #클레어키건 #막달레나세탁소 #미소지니 #용인경기여자기술학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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