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작지만 강한 나라 '고려', 우리에게 물려준 유전자는..."

[인터뷰] <박시백의 고려사> 완간한 박시백 화백

등록 2024.04.18 15:48수정 2024.04.18 17:40
2
원고료로 응원
a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총 5권)을 펴낸 박시백 화백. 4월 17일 오후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사옥에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 휴머니스트 제공

 
"작지만 강한 나라". 역사만화가 박시백(60) 화백은 500년 역사를 지닌 고려의 정체성을 이 한마디로 설명했다. 'KOREA'의 기원이 된 고려에 대해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평가다. "끝없는 외침 속에서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고려라는 나라를 (500년 동안) 지켜낸 걸 보면, 정말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게 고려시대로 가서 살라고 하면 정말 어느 때로 가야 될까,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국란이 많았다. 외침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려라는 나라로 500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힘이 고려의 정체성 같다. 19세기 말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우리나라 현대사도 고려 때 못지않게 힘들었던 시기다. 그런 어려운 시기를 다 이겨내고 이렇게 멋진 나라를 만든 그런 힘과 유전자가 고려가 (후대에) 물려준 유산이 아닐까 싶다."


지난 17일 오후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시백 화백은 '강소국가' 고려가 후대에 물려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에 대해 '고난 극복 DNA'라고 설명했다. '작지만 강한 나라' 고려의 500년 역사를 정사(正史)에 기초해 작업한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총 5권)가 지난 3월 완간됐다. 지난 200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이 출간된 지 21년만에 조선 500년사와 고려 500년사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1000년의 왕조사를 '박시백 표' 역사만화로 완성했다.

"그동안 고려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두 가지 장벽이 있었다. 첫째는 주로 조선의 관점에서 고려를 봐왔다는 것이다. 멸망 이전에 고려가 어떤 사회였고, 조선과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줬는지에 대한 조망이 취약했다. 둘째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핵심 무대가 지금의 북한 지역이다. 이런 탓에 고려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거나 폄하하는 환경도 있었다. 정사를 기초로 한 이 책은 고려사를 재인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표는 <박시백의 고려사> 출간 의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박 화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역사서인 <고려사>(총 139권 75책)와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고려사절요>(35권 35책)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가 "(<박시백의 고려사>는) 고려의 정치사이기도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대한 소개서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박시백 화백이 '정사(正史)'를 고집하는 이유
 
a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총 5권)을 펴낸 박시백 화백. 4월 17일 오후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사옥에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 휴머니스트 제공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시대사를 알려면 우선 정사(正史)에 기반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사를 그리면서 느낀 것인데, 그렇게 많은 조선사 책들에 정사와 야사(野史)가 혼재되어 있어 같은 사건도 다르게 설명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걸 보면서 우선 정사에 기반해 역사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그 해석 등에 있어서 야사나 개인문집을 참고하는 게 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고려사만 해도 대중적으로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아서 우선 정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 화백은 <휴머니스트>와의 작가 인터뷰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나 <박시백의 고려사>를 그리면서 특별히 정사만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답했다. 그런 면에서 박 화백에게는 '21세기 사관(史官)'이라는 애칭이 어울린다. 


조선시대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꼽았던 박 화백에게 고려시대에는 어떤 인물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까. 왕으로는 태조 왕건을 꼽았다. 

"다른 데 가서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그때마다 느낌이 달라 다른 이름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왕으로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그릇이 큰 리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왕건은 시대의 요구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러한 시대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전략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도 굉장히 잘 꿰고 있었던 지도자다. 분열됐던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참 걸맞는 인물이었다."

이어 박 화백은 왕이 아닌 인물로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양규 장군과 정몽주를 꼽았다. 그들이 고려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양규 장군이 고려라는 나라의 특징을 잘 보여준 인물이 아닌가 싶다. 충분하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적들이) 적당하게 도망가게 내버려둬도 됐을텐데 굳이 추격전을 벌여 모든 걸 걸고 싸우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양규 같은) 인물들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종종 등장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랬을까, 상당히 궁금했고 매력적이었다.

정몽주도 인상 깊었다. 고려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성계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성계 측에 라인을 대고 있었을텐데, 정몽주는 이성계가 갖고 있는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또 자신이 갖고 있는 강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이성계를 코너에 몰아 성공 직전까지 갔다. 그때 이방원의 결단이 없었다면, (정몽주가) 성공했을 것이다.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에너지의 힘을 다 보여준 최고의 정치가가 아니었나 싶다."


"왕건, 양규, 정몽주가 인상적... 김부식 재평가 받아야"
 
a

2022년 3월 1권을 펴낸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총 5권)가 2024년 3월 완간됐다. ⓒ 휴머니스트 제공

 
박 화백은 김부식은 재평가를 받아야 할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신채호가 묘청을 높이 평가하고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폄하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시켰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기록과 합리적 판단을 중시했고, 고려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현실주의자였다"면서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왕이나 신료들이 보기에 답답함을 느꼈을 정도로 군사와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부식은 정치가로서나 학자로서 탁월하고 훌륭한 인물"이라는 게 박 화백의 평가다.

<박시백의 고려사>는 실증에 기반한 개연성으로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게 궁예의 안대를 벗긴 것이다. TV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했던 안대를 찬 궁예(김영철 분)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데다, 철원군에서 제작한 영정에서도 궁예는 안대를 찬 모습이었다. 왜 박 화백은 궁예의 안대를 벗겼을까?

"궁예 캐릭터는 <태조 왕건>에서 '안대 찬' 배우 김영철 선생님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다. 안대 찬 캐릭터로 그냥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어렸을 때 주변에 한쪽 눈을 실명한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대부분 안대를 하지 않고 생활을 했고, 굉장히 흉한 모습도 아니었다. 궁예도 어렸을 때 실명했기 때문에 (안대를 차지 않고) 그렇게 생활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박 화백이 궁예의 안대를 벗긴 이유는 '궁예가 안대를 찼다'는 기록이 없어서였다. 그는 비슷한 시대 중국 역사까지 찾아봤지만, 궁예가 안대를 찾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철저히 사료에 기반하되, 인물이나 사실 묘사에서는 개연성 있는 추론을 덧붙인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임금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a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총 5권)을 펴낸 박시백 화백. ⓒ 휴머니스트 제공


'고려와 조선의 임금들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물음에 박 화백은 '세자 교육의 차이'로 설명했다. 유교 정치가 나라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았던 조선시대에서는 세자가 어렸을 때부터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고려는 그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충렬왕, 충선왕도 자질은 굉장히 빼어났다. 충선왕 같은 경우에는 당대 원나라 최고의 학자들과 토론할 수 있을 정도의 굉장히 높은 식견을 갖췄고,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여줬다. 그런데 원나라에 오래 머물고, 후계와 관련해서 엉뚱한 짓을 해서 임금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고려에는 그런 평가를 받은 임금들이 여럿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연산군 정도를 제외하면 낙제점을 받지는 않는다. 조선은 왕이 된 이후에도 신하들과의 경연 등을 통해 안정적인 교육을 이어나갔다."

같은 500년의 역사인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 <박시백의 고려사>는 5권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박 화백은 "<고려사> 1, 2권은 기록이 부실해 그 이상으로 늘리기 어려웠고, 각 권마다 시기를 배분하다보니 5권이 적당하다고 봤다. 조금 더 늘릴까 고민했지만, 애초의 구상대로 진행했다"면서 독자들만큼이나 본인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다만, 이 책을 고려사에 대한 입문용이자 안내서로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조선과 고려의 1000년사를 정사에 기초한 대중 역사만화로 펴낸 박 화백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총 7권)도 펴냈다.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으로서, 대중이 왜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고, 고려사나 조선사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시기 시기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자신의 권력이나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나머지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한 후손들의 냉정한 평가 혹은 재평가가 계속 이어져나가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사만화를 계속 그릴 것"이라는 박 화백은 다음 작품의 주제는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다룰 계획이라고 한다. 그가 그려낼 우리나라 현대사의 풍경은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 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박시백 #박시백의고려사 #박시백의조선왕조실록 #휴머니스트 #역사만화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4. 4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