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로 신선한 충격을 주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22] 저자의 '나이브한 통일전선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돼

등록 2024.04.27 09:43수정 2024.04.27 09:43
0
원고료로 응원
a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15일 저녁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1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및 만찬'에서 '6.15 10주년 역사적 의미와 한반도 미래'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강만길은 1987년부터 2년 동안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을 맡았다.

평소 자료에 늘 목말랐던 터여서 도서관장이라는 자리는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국내외 정세는 급변했다. 1988년 2월에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자리에 취임하면서 군사정권이 민간정부의 모양새로 탈바꿈하고,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는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그해 9월에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1989년 1월에 우리나라가 동구 공산권 국가인 헝가리와 첫 수교를 맺고,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독일이 통일국가 수립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1990년 2월에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 간의 민족 대교류를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9월에 남북 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으며, 같은 달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동구권 공산국가들과 차례로 수교하고, 소련이 붕괴되고,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등 한반도와 국제질서에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만길이 기대하고 주장했던 사안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에 담았던 글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강만길은 사학계의 중심이 되어 갔다. 그동안 폭넓고 다양한 학문적인 성과와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할 말을 하면서 상아탑 밖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1988년 9월에 <사회와 사상>(한길사)이 창간되면서 특집으로 강만길과 경제학자 박현채의 대담을 비중있게 실었다. '80년대의 민족운동사적 의미: 새로운 민족운동의 사상적 구도를 말한다'라는 주제였다. 강만길은 '1980년대의 의미와 분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광주사태'로 불리던 시절에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80년대라는 것도 8·15 이후 역사진행의 과정이요 결과입니다. 이 80년대를 가져오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10·26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다음에 12·12의 반전이 있었고 다시 그것을 확정시킨 5·17의 역작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또 하나의 돌파구로 되는 것이 광주민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10·26으로부터 광주민중항쟁까지의 과정은 결국 80년대 후반기의 오늘이 있게 한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10·26은 그 이전에 있었던 부마사태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항쟁의 역작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민중적인 역량을 좌절시켜 버린 사건이었고 그 결과 12·12, 5·17의 역작용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12·12 사건과 5·17의 역작용으로 반역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광주민중항쟁은 대단히 높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광주항쟁은 우리의 민중운동사 내지 민주화운동에 하나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직 학문적인 연구가 뒤따르지 않은 상황이어서 피상적으로만 보더라도 8·15 이후의 우리 민중운동사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민중 측의 자위체제를 갖춘 저항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무장저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광역권 전체가 하나의 저항주체로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중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석 1)
그는 1991년 진보성향의 월간지 <사회평론>의 발행인이 되었다. 진보적인 지식인 400여 명이 뜻을 모아 창간한 잡지였다. 얼마 뒤에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과 합병했으나 재정난 등으로 1998년 11월 통권 107호로 막을 내렸다.

그즈음에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화평사)이 출간됐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30년대 초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중 독립운동가들의 통일전선을 이루고자 시도한 단체였다.

1932년 11월에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의 대표가 상하이에 모여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체로 먼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이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35년 7월에 조직을 단일화하고자 기존 정당을 자진 해산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인 김규식, 조소앙, 양기탁, 유동열, 최동오 등도 여기에 참여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정강정책으로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에게 분배, 독점기업의 국유화, 남녀평등, 의무교육 등을 내세우는 등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이 때문에 해방 이래 남한에서는 좌파 정당으로 인식되고, 심지어 이 단체를 연구하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김원봉·김규식 등 중심의 민족해방운동 정당으로서 민족혁명당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78년 <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이란 논문을 쓸 때부터였고, 이 정당의 활동과 노선을 중심으로 그 전모를 밝혀 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1982년 앞 논문의 개작이라 할 수 있을 <독립운동과정의 민주국가건설론>을 썼을 때였다.

그 후 무려 10년이나 걸려 이제 겨우 책을 내놓게 되었지만, 사실 나로서는 그동안 다른 책들을 쓸 때와 달리 가능한 한 시간을 아껴 '민족혁명당'이란 하나의 주제에 매달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해 온 셈이다. 다시 말하면 1980년대를 살면서 민족혁명당이란 독립운동 정당에 대해 그만큼 매력과 의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다. (주석 2)
이 책은 출간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가 2003년 6월에 <1930년대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과 <우사 김규식의 민족해방운동> 등이 추가된 증보판(역사비평사)이 출간되었고, 2018년에 '강만길 저작집 07'(창비)로 다시 출간되었다. 변은진 교수는 '해제' <'분단극복 사론'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실천적·실증적 성과>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책의 출판은 당대 역사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책이 출판되고 최초로 나온 서평에서는 "저자의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구상은 매우 유니크한 것이고, 현실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저자의 '나이브한 통일전선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 초점은 저자의 통일전선론은 상층 지도자들만의 연합전선적 성격이 강하여 헤게모니 즉 주도성의 관점을 배제한 통일전선이라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이것이 지향하는 국가건설론의 전망 역시 애매해진다는 것이었다.


주석
1> 한길사 편집부, <사회와 사상>, 1988년 9월 창간호, 한길사, 1988, 39~40쪽.
2> 강만길, <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화평사, 1991, 1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강만길평전 #강만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2. 2 "어버이날 오지 말라고 해야..." 삼중고 시달리는 농민
  3. 3 "김건희 특검하면, 반나절 만에 다 까발려질 것"
  4. 4 '아디다스 신발 2700원'?... 이거 사기입니다
  5. 5 네이버, 결국 일본에 항복할 운명인가... "한국정부 정말 한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