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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에 배석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30] 남북 정상은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간 회담을 진행했다

등록 2024.05.05 09:38수정 2024.05.0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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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15일 저녁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1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및 만찬'에서 '6.15 10주년 역사적 의미와 한반도 미래'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김대중 정부는 분단 이래 가장 적극적으로 대북 화해와 평화교류 정책을 폈다. 강만길은 1998년에 정부의 통일고문회의 고문을 맡았는데, 이는 노무현 정부 때까지 이어졌다. 이 자리는 정부의 통일정책에 자문하는 역할이다. 그는 통일고문회의에 참여하면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의 상임의장에 선출되어 2000년 10월까지 활동했다.

그가 민화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하던 2000년 4월 10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중대 뉴스가 발표되었다.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소식이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에 남북한 당국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고 나서 28년 만의 일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의 정상이 아닌 대리인이 만나 논의했으나 이번에는 남북한 정상이 만나 회담을 한다는 초특급 뉴스였다.

2000년 6월 13일 10시 반경, 김대중 대통령은 공군 1호기를 타고 서울공항을 이륙했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약 1시간. 우리 국민은 평양과 서울이 가깝고도 먼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순안공항 활주로에는 빨간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활주로 중앙에는 북한군 의장대가 정렬한 채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기다렸다. 환영 나온 한복차림의 여자들이 꽃술을 흔들면서 뜨겁게 환호했다.

김정일이 그날 공항 환영식장에 직접 나온 것은 사전에 양측이 '조율'하지 않은 '돌발 사건'이었다. 김정일도 김대중의 방북을 그만큼 비중 있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를 환영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김대중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김정일이 반갑게 맞았다. 두 손을 맞잡고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북한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날 공항에는 북조선의 최고 수뇌부가 대부분 환영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대중은 미리 준비해 간 성명서를 천천히 읽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녘 동포의 뜻에 따라 민족의 평화 협력과 통일에 앞장서고자 평양에 왔습니다. (…) 남녘 동포가 이번 회담에 거는 기대만큼이나 북녘 동포 여러분의 기대 또한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꿈만 같던 남북 정상 간의 만남이 이루어진 만큼 지금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갈 것입니다. (…)"


환영 행사가 끝나고 김대중은 김정일과 의전용 승용차에 올라 평양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향했다. 김정일은 승용차의 상석을 양보하는 등 김대중을 깍듯이 예우했다. 연도에는 꽃술을 흔들며 60만 평양시민들이 길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었다. 숙소로 이동하는 1시간여 동안 김대중과 김정일은 차 안에서 환영인파에 일일이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이때 강만길은 남쪽 민화협 대표로 수행원이 되어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두 정상의 뒤를 따라 이동하면서 느낀 소회를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북 두 정상이 같은 자동차에 타고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뒤를 따라서 우리가 탄 차가 지나가는 연도에는 뒷날 60만 명이었다고 들은 평양시민들이 곱게 차려입고 나와서 손에 손에 꽃술을 들고 열렬히 환호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앞을 지날 때 많은 대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같은 현장에서 평양시민들의 환호 대상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한정된 것인지, 김대중 대통령과 남쪽 일행도 포함되었는지, 아니면 '우리 민족끼리'의 행사라서 양쪽 모두가 대상이었는지, 호사가나 일부 언론들처럼 따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길거리에 늘어서서 환영하는 시민들 중에서도 특히 고운 우리 옷으로 차려입은 나이 든 부인네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환호하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민족 분단 52년 만에 남북 두 정상이 정답게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가고, 남북 참가자들이 탄 차들이 뒤따르는 이 역사적 행렬을 환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상이 굳이 어느 쪽이거나 누구라고 한정하려 한다면, 너무나 몰인정하지 않은가……. (주석 1)

강만길은 북쪽 민화협 김영대 회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만나, 향후 민간의 남북교류를 진행하기로 논의했다. 그는 정부 차원의 교류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는 민간기구가 그 난국을 해결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북 정상은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간 회담을 진행했다. 마지막 날에 두 정상은 그 결과를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담아 발표했다. 강만길은 남북정상회담 자리에도 배석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현장에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역사학자로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무겁게 느꼈다고 술회했다.

이 엄청난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한 남북의 약 50~60명 인사 중 역사학 전공자는 나 혼자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듦으로써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두 번 다시 겪기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면서도 이 감격스러운 현장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역사학 전공자로서의 일종의 의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야말로 민족의 평화통일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요 그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통일은 전쟁통일론과 흡수통일론이 슬기롭게 극복된 진정한 의미의 평화통일과 대등통일을 이룰 방법으로서의 '협상통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1948년에 김구와 김규식 두 분이 평화적으로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만난을 무릅쓰고 평양에 갔던 남북협상의 재생이요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주석 2)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333~334쪽.
2> 위의 책, 33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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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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