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실 에어컨 송풍구가 내게 들려준 말

갈등하는 당신과 내가 연결돼야만 하는 이유

등록 2018.08.13 09:02수정 2018.08.1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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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원장실 안에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두 개의 송풍구가 있다. 베란다에 설치된 에어컨 바람이 천장형 덕트를 타고 송풍구로 나온다. 이 송풍구 가운데에 동그란 나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날개들이 접히면서 열리고 반대로 돌리면 닫히는 구조다.

2003년 지금의 치과 의원을 인수했을 때도 여름이었다. 널찍하고 바닥에는 온돌마루가 깔린 원장실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에어컨 송풍구를 열어놨는데도 시원한 바람은 나오지 않았다.

'왜 바람이 안 나오지?' 잠시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도 선풍기 바람으로 여름나기는 무난했다. 그러다 너무 덥고 지치면 시원한 물을 대야에 받아다가 원장실 책상 밑에 놓았다.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고 있으면 유유자적하니 나름 시원한 여름날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해의 여름이 지났다.

올해 여름을 맞이하는 원장실의 풍경은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르다. 폭염이 절정에 다다른 7월 24일 화요일, 원장실 안의 디지털 온도계는 31℃~32℃에서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벽걸이 선풍기는 원장님이 입은 홑겹의 수술 가운이라도 벗기고 말겠다며 연신 더운 바람을 흘려보낸다. 에어컨 실외기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약간 메스껍고 아주 어지럽고 종아리는 산행한 다음 날 찾아온 은근한 근육통처럼 결린다. 온열병 증상이다.

이날 점심으로는 근처 식당에서 막국수를 먹었다. 식사하고 온 지 2~3시간이 지났을 무렵 무릎 주변 오금 부위가 따끔거리면서 좁쌀만 한 붉은 반점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문상에 가서 음식을 먹고 장염도 잘 걸리는 편이라, 막국수를 먹고 탈이나 두드러기가 난 거로 생각했는데……알고 보니 땀띠였다.

세상에, 원장실이 땀띠가 날 정도로 더웠다. 너무 더워서 진료실 안에 있던 서큘레이터 하나를 가져다가 선풍기 맞은편에서 돌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시선이 원장실 천장 송풍구에 가 닿았다. '에어컨 서비스를 신청해야겠다. 바람이 안 나오면, 나오게 하면 되지.' 에어컨 업체 기사를 불러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만큼 폭염은 기세가 등등했다.

업체에 에어컨 수리를 의뢰한 지 7일 만에 드디어 7월 31일 화요일 아침에 기사가 도착했다. 덕트형 에어컨을 살펴보고 원장실 송풍구 나사를 풀어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어컨 바람이 지나가는 덕트가 송풍구랑 원래 연결이 안 돼 있네요!"
"예? 연결이 안 돼 있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네, 원래 인테리어 할 당시부터 연결을 안 시켰나 봐요."


기사분은 덕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덕트 자체도 아주 차갑지 않은 거로 봐서 연결해도 시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기사분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아니 황당했다.

이 병원은 15년 전 여름에 인수했던 병원이다. 따라서 인테리어 시공을 맡았던 업체의 연락처가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진료실과 대기실이 시원하지 않을 거 같아서 원장실은 일부러 연결을 안 했던 걸까? 아니면 인테리어 할 당시 여름은 지금처럼 상당히 덥지 않았던 걸까?

"그럼, 지금이라도 연결해주시면 안 되나요?"
"저희는 에어컨만 살펴드리는 거지, 이렇게 덕트를 연결하는 일은 외주업체가 따로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연락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출장비만 주시면 됩니다."


실장님에게 고객센터를 통해 송풍구 사진을 찍어서 외주업체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보내주면, 다음에 나올 때 바로 연결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 했다. 고객센터에서는 외주업체 직원이 현장에 나와봐야 수리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견적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외주업체는 8월 10일경에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매우 빨리 일정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7월 31일. 그날 나온대도 설치 여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8월 10일에 나온다던 외주업체에서 8월 1일 나왔다. 기사님 말씀이 천장 덕트와 원장실 송풍구 연결이 어렵단다. 천정으로 올라가기도 어렵다면서 그냥 벽걸이 에어컨 사서 쓰는 게 답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셨다. 그나마 출장비는 받지 않으셨다.

인터넷으로 벽걸이 에어컨을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배송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주문업체에 연락해보니 웬걸……, 배송까지는 4주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기다리실 수 없으면 취소하세요."

업체 콜센터 직원의 영혼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 상담해주는 그곳은 아주 시원하겠지. 4주면 올여름이 다 지나가겠다. 배송이 야속하다는 생각에 근처 대형전자제품 마트에 전화해보니 에어컨 물량이 없단다.

"벽걸이 어떤 제품이라도 좋으니, 바로 설치되는 제품이 없을까요?"
"에어컨을 빨리 받으실 방법이 있긴 해요. 갑자기 날이 엄청 시원해져서 에어컨을 취소하는 고객님이 나오면요."
"네에?"


다리에 땀띠 난 고객에게는 희망 고문이었다.

진료하다 말고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는 원장실 송풍구를 생각하니, 쓸쓸한 생각에 젖는다. '15년 동안이나 덕트와 분리된 채로 있었구나! 네가. 너는 덕트랑 연결돼 있어야 하는데…….'혼자 분리된 채로 있었다니. 사람이 아닌 것에 마음이 쓰였다. 많이 외로웠겠다.

사람도 가족도 서로 연결돼있어야만 하는데, 늘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아니었다. 고슴도치처럼 서로에게 가시를 겨눈 채로. 나이를 먹을수록 더 현명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오히려 내 몸의 가시는 길어지고 굵어져 사람들에게 더 심한 상처를 주었다.

최근에 나는 내 정체성을 대변하는 두 가지 말을 가족에게 들었다. 하나는 '샌님'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얌체'라는 애길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내 모습이다.

바람이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덕트에서 분리된 송풍구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머릿속 생각으로만 그칠 때가 많다. 그걸 실행할 용기는 내게는 없다. 가족들 또한 나라는 덕트에 연결되고 싶지 않은 송풍구가 되고 싶을 때가 많은 걸 알기 때문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송풍구는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덕트와 연결돼 있을 때라야 존재의 의미가 있다. 최인철 교수가 집필한 <프레임>이란 책을 읽었다.

'내가 상황이다'라는 프레임에서 보면 지금 마주한 사람과의 갈등도 그 사람 내면의 문제가 아닌 내가 만들어낸 상황에 그 사람이 반응하는 상황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만들어낸 상황으로 인해 서로 갈등을 지속한다면, 원장실 벽에 걸려 무심히 무더운 바람만 내뿜는 선풍기가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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