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9 13:06최종 업데이트 23.03.0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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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조국 지음)을 읽은 다양한 독자들이 '15권의 고전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편집자말]
새해를 맞이하였어요. 그러나 마냥 새 희망을 노래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20대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정부의 인사참사, 안보참사, 이태원참사, 최근 들어서는 UAE 외교참사까지 국민감정이 멀쩡하기를 기대하기엔 이미 임계점을 지난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마음 추스르기 위한 방편이 책읽기였고 그래서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었습니다.

468쪽에 달하는 이 책은 서양의 법고전을 요약한 데다 시의 적절한 작가의 해석까지 덧붙여져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술술 잘 읽혔고 흥미롭기까지 했답니다. 루소를 필두로 몽테스키외, 존 로크, 체사레 베카리아, 토마스 페인, 밀, 예링, 플라톤, 소로, 소포클레스, 칸트를 끝으로 마무리를 하셨더라고요.


언젠가 시우(時雨)라는 한 시인의 이름을 만났을 때처럼 이 책 또한 저에게는 때맞춰 내려주는 '비의 향연'과 같았답니다. 아마도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고전이 빛을 발하는 것은 적어도 인간사회의 중심에 악(惡)의 축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한 측면에서 <조국의 법고전 산책>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떠난 고전 산책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은영
 
이제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산책길을 따라 나서 보아야겠어요. 그런데 첫걸음을 떼자마자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담론으로 등장하여 살짝 주눅들 뻔도 하였지요. 게다가 '정치참여는 의무'라고 하는 짧지만 긴 여운의 말씀에 얼굴마저 화끈거렸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백을 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에 관한 한 무작정 혐오 섞인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총체적 무지함을 봉쇄하려 들었거든요. 다행히 지난 대선이 계기가 되어 '정치전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긴 하였지만요.

하여 적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 중 한 대목을 옮겨 볼까 합니다. '의사의 큰 모자 밑보다는 법률가의 법복 아래서 얼마나 더 많은 피해를 냈는지, 의학으로 죽은 사람 수보다 법률로 파멸당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더 많은지는 가늠하기 꽤 힘든 일일 거야'라는 대목을 읽으면서는 "그려, 그려" 하며 중얼거렸지요. 자칫 기분이 가라앉을 뻔도 하였지만 아마도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강남좌파'였던 것 같다는 저자의 유머에 금세 동화가 되고 말았네요.

철학자이자 의사이기도 한 존 로크는 실정법 이전에 자연법이 우선한다는 개념을 강조하였지요. 특히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는 홉스의 성향에 반하여 로크는 절대군주제가 '자연상태'보다도 더 못할 수 있다며 절대자에 대한 불복종의 필요성도 강조를 했더라고요.

한편 몽테스키외가 쓴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읽고 프랑스 계몽주의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하는 근대형법의 아버지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에서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압제자가 내 주장을 접한다면 그건 내가 두려워해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압제자는 독서의 취향을 갖고 있지 않기에 내가 걱정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통렬한 에스프리였습니다.

두리번거리다보니 어느새 토마스 페인의 구역에까지 오게 되었네요. 페인은 영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다고 하지요. 1776년 미국에서 출간한 <상식>이라는 책은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독립선언'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이미 '빈민이나 실패한 상인, 신혼부부 그리고 신생아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해야한다'고 주장을 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복지포퓰리즘'이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진보적인 서민정책에 대해서 저 또한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도 되었지요.
 
토마스 페인, <조국의 법고전 산책> 속 이미지오마이북
 
페인은 또 이런 귀한 말씀을 남겼더군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헌법과 국가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의 빈민은 행복하고 그들에게 무지와 불행이 없으며 감옥에 죄수가 없고 거리에는 거지가 없으며 노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세금이 과중하지 않으며 우리는 세계의 행복과 친구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세계가 우리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렇다.' 너무나 멋진 세상, 따뜻한 사회,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던가요. 부디 페인이 꿈꾸었던 세상이 몽상이 아니었기를, 힘들지만 꿋꿋하게 믿어볼 겁니다.

한결 넉넉해진 마음으로 예링의 서재 가까이 다가가 보았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날을 세운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한편 예링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러시아 황태자가 예링을 칭송하기를 '법학의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라고 했다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 감동적인 비유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드디어 산책을 마쳤습니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된 걸음이었지요. 그런데 뭔가 좀 헛헛한 기분이 들어 다시, 이번엔 뒷짐을 지고 두리번거리며 걸어보았답니다. 그러다 <캄비세스 왕의 심판>이란 그림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부패한 판사 '시삼네스'의 살가죽을 벗기도록 판결을 한 상황에서 그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해놓은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지요. 법을 해석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가 저지른 불법행위는 다른 어떤 일반인들보다도 더 엄격하게 처벌되어야 한다는 신랄한 의지의 발로였겠지요.

지금의 정치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 못내 씁쓸했지요. 상상을 해봅니다. 용산을 비롯한 대검찰청 및 산하기관 어디쯤 권력자들이 드나들며 볼 수밖에 없는 그 위치에 이 <캄비세스 왕의 심판>을 걸어둔 풍경을 말이지요. 검찰의 '고장 난 저울' 대신에 말입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유유히 걸어봅니다. 어느새 플라톤의 글 마당에 당도하였고 그분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조우하게 되었지요. 다만 움찔했던 것은 오직 소크라테스의 전언으로만 알았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씀이 오랫동안 잘못 해석이 된 채로 대중에게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소크라테스의 운명이 결정될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에 대해 저자는 숙의민주주의의 필요성과 대중민주주의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라고 표명하셨더라고요. 진정 합리적인 민주주의의 정립과 실천은 어려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시민 불복종'은 신성한 의무

이제 아름다운 숲길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까지 왔으니까요. 안티고네는 고대 희곡의 주인공으로서 비록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문헌상 확인되는 최초의 '시민불복종자'라 하더라고요.

그녀는 반역자로 죽음을 맞게 된 오빠의 시체 처분을 두고 '인간의 법'보다는 '신의 법'을 따른다는 의지로 왕의 명령에 불복종을 하게 되었고 <시민불복종>,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노예제를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저항권을 실천하였지요.

이처럼 시민불복종은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의식'이 근간에 깔려있음을 알 수가 있었어요. 간디 역시도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다. 국가가 무법적이거나 부패해졌을 때 시민 불복종은 신성한 의무가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같은 맥락으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극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 거기에 충성하길 거부하고 저항하는 권리' 즉 저항권에 대한 정의를 여러 번 곱새기면서 내 안에 솟구치는 혁명적 거친 숨결들에 집중하고 또 집중을 해 봅니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칸트에까지 왔습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거론했지만 저의 경우는 회의감부터 먼저 들더라고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인간은 인간을 벗어난 인간일 수 없기에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존재할 것이며 그중 한 부분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평화라고 단연코 생각하거든요.

마침 저자께서는 미얀마 사태에서 보아온 것처럼 국제관계 역시 힘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며 단호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상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나브로 선지자들의 빛나는 정신 세계를 고취해보았네요. '굴종으로 얻은 평화 대신 위험한 자유를 택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분투와 희생 덕분에 우리의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그 덕에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라는 저자의 말로 저의 모든 소회를 대신하려 합니다.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고전이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고전'을, 더구나 '법고전'을 보다 친절하고 흥미롭게 풀어주신 저자에게 고맙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의 조국이고 우리가 주인입니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은이), 오마이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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