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법고전 산책
이은영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민주주의를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그 뜻부터 짚고 넘어간다. 내셔널리즘, 캐피털리즘, 코뮤니즘 등 이즘(ism)으로 끝나는 다른 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영어로 'Democracy'라 쓰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제도를 뜻한다. 우리가 추구하거나 도달해야 하는 신념이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제도는 하나의 형식이며 우리 생활을 규정한다. 이는 계속해서 변하기에, 변화의 필요와 주체가 매우 중요하다. 공화정에서만 성립 가능하고 깨어있는 시민사회 속에서만 운영가능한 제도가 민주주의다.
그래서 5, 6학년 학생들에게 공화정이 탄생하기까지 인류가 겪은 다른 제도-왕정이나 귀족정-를 먼저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독재를 다룬다. 다른 제도와 비교했을 때 학생들이 훨씬 이해가 빠르고 기억도 잘 했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지키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민주시민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에. 현직 교사인 내가 주변 동료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첫 번째 이유다. 일종의 지식강매상인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많은 오개념을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인민'이란 단어다. 지금이야 이 말을 들으면 바로 북한을 떠올리지만, 사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등장하는 말이다. 1948년 남과 북이 갈라져 각기 정부를 세운 뒤 북한이 쓰는 이 말을 대신하여 등장한 말이 바로 '국민'이다.
그렇지만 링컨의 그 유명한 연설에 등장하는 'People'은 어떻게 해석해도 결코 '국민'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를 작가는 루소-몽테스키외-로크의 입을 빌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사람이 먼저고 국가는 나중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을 '국민'이란 단어가 시나브로 잠식하고 있다.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힘은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와 관련한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가장 공감가는 부분이 바로 법률의 명료함을 강조한 4장이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법조문과 판결문을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고, 판결문을 공개하는 법률선진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다음 오개념은 '자유'다. 맨 첫장 루소의 사회계약론부터 마지막 칸트의 영구평화론까지 등장하는 이 단어는 깐부가 있었다. 바로 '평등'이다. 루소는 법의 목적이 바로 자유와 평등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을 때 만민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심지어 평등없이는 자유도 없다고 강조한다.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이 말을 왜곡해 끊임없이 퍼뜨리는 세력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다.
마지막 오개념은 '법치'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위정자가 법을 지켜 정치하라는 뜻이다. 백성들, 시민들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예로부터 권력을 잡은 사람은 본인의 욕심대로 그것을 휘두르고 싶어했기에 이를 제약하는 목적으로 법을 만든 것이다.
내가 지식강매상이 된 마지막 이유는 이 책이 즐거움과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새로운 것을 깨치는 즐거움은 인간의 본능이다. 초-중-고에서 교과서로만 배웠던 민주주의나 사회구조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읽는 이가 잠시라도 지루해 할까 봐 곳곳에 농담과 영화가 등장한다. 진실의 방을 좋아하는 <범죄도시>.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실화를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 여성선거권을 호소하며 경마대회에 뛰어들어 목숨을 읽은 에밀리 데이비슨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 영국의 여성투쟁사를 그린 <서프러제트>. 종교의 자유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수 있는, 17세기 일본의 천주교 박해를 다룬 영화 <사일런스> 등.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사건과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스스로를 평민이 아닌 노비라 주장하는 다물사리의 사연, 미국 버클리 대학생 2명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강의실에 들어간 까닭, 단두대가 인도주의적 형벌이 된 이유, 삼청교육대나 촛불혁명, 통진당 해산, 김근태 고문, 부림사건 등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준 사건들도 나온다.
유명한 사상가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볼테르는 왜 루소에게 맹비난을 퍼부었는지, 원조 강남좌파격인 몽테스키외는 왜 판사를 추첨제로 해야 한다 주장했는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왜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말이 지금 대한민국에 어떤 형식과 방식으로 남아있는지도 볼 수 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 쉽게 다듬고 살을 붙여 전달해주는 저자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느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활동은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이해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이해는 찬성의 시작이다." 한 번의 산책으로 이렇게 많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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