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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적 외교를 갈망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고 그 바람을 노 대통령이 실현해주리라 믿었던 국민들이 실망과 분노로 마음 고생이 아주 크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새로운 세기로 들어서면서 우리 국민은 오랜 기간 가졌던 열등감과 자학에서 벗어나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피땀으로 이뤄낸 경제 발전과 반독재 투쟁으로 성취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사대의 근성을 떨어내고 민족 자주를 온전히 이뤄내는 것, 세계로부터 고립을 선택한 우리의 반쪽을 끌어 안는 민족 공조와 민족 통일의 염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민의 열망은 6·15 공동선언을 접하는 국민들의 눈물에 담겨 있었고,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격정적인 함성으로 분출되었다. 오만한 제국의 횡포에 맞선 전국민적 촛불 시위에서 자주에 대한 염원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희망의 실현에 부푼 가슴은 지난 대선을 통해 한 자연인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미국에 대한 사대의 예를 절대선으로 여기는 수구 언론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 반미면 어떠냐고 자신 있게 일성을 토하는 사람, 한국 경제의 진짜 원동력인 일하는 사람들의 친구였던 사람, 정치인 노무현에 희망을 걸었다.

우리 국민들은 노무현의 그 당당한 모습을 미국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가슴에 맺힌 한(恨)을 통쾌하게 쓰려내려 주리라는 믿음에 가슴 부풀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국민의 기대와는 멀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느 대통령처럼 한미동맹을 강조했고 민족 공조의 원칙마저 져버리는 것 같았다. 더욱이 세계 여론이 경멸해 마지 않는 미 대통령 부시와의 대면에서 보인 모습이라 새롭게 자긍심을 가지려 했던 국민의 심정은 실망을 넘어 분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필자는 노 대통령은 끝끝내 희망을 열매 맺게 하기 위해 오늘의 모욕을 감수하고 있다는 믿음을 아직 가지고 있다. 허망한 기대와 희망일까. 결국에 그렇게 결론이 나더라도 아직은 희망을 버릴 시기가 아니라는 마음에서 그를 옹호하는 글을 쓴다.

노무현은 민족공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 노 대통령이 민족 공조를 포기했다는 비판은 한미 공동선언문의 해석에서 근거를 찾고 있지만, 민족 공조를 포기했다는 의혹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노 대통령의 문제 발언부터 짚어 본다.

먼저 정치범 수용소 언급에 대해 살펴 보자. 한국 정부는 지난 유엔인권위의 대북 결의안 표결에 불참했다. 이에 대해 국내에서도 상당한 비판이 있었고, 미국측은 처지를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국의 불참은 노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증폭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보다 앞서 미국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기자가 노 대통령에게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에게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념의 표현이다. 미국인들은 인권 문제에 대한 강조를 자신들이 선(善)의 대표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인권은 중요한 문제다)

이 점 때문에 노 대통령은 인권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를 미심쩍게 보는 미국 여론과 미국의 정치인들의 의혹을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범 수용소 발언이 나왔다. 그러면 왜 원고에도 없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있다. 간단히 말해 외부 세계의 문제제기로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을 공론화할 경우 정치관계를 악화시켜 문제 해결의 실마리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유엔인권위의 표결에 불참한 것도 똑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이 발언에 노 대통령의 지지계층이 실망한 이유는 민족 내부의 문제를 오만한 제국에 가서 농담처럼 이야기해서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십분 공감하는 반응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이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미 외교력의 제고에 더 큰 무게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속이 쓰린 일이지만 이 정도는 우리가 뽑은 대통령의 재량적 판단에 맡길 사안이 아닌가 한다.

사실 가장 큰 비판을 받고 있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아마도 미국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행한 북한정권 신뢰성 부정 발언인 것 같다. 국민들이 이 발언에 신랄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북한정권 신뢰성 부정은 YS 시절의 조문 파동처럼 남북한에 불신을 낳고 DJ 정부가 이뤄낸 민족화해의 빛나는 성과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방미 직전 북한은 자위권 확보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반도 비핵화 선언 준수 의무의 표기를 선언했다. 북한의 자주 노선에 부분적으로나마 공감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일정 정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핵 보유 언급 이후 열렸던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한국정부는 북한의 핵 보유 실토에 대해 형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한국 내의 대북 강경여론의 비판을 이겨내기 힘들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로서는 마냥 이해하고 받아 줄 수만은 없다는 의사 표시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대화는 하는데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서 이치에 맞지 않은 잘못된 표현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상황 논리에 따른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이 해빙 길에 이미 들어선 남북관계를 후퇴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아주 현실적이다. YS 시절 남북경협의 일선에 있었던 필자는 조문파동으로 말미암은 남북관계의 경색에 오랫동안 애간장을 때웠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북한정권 신뢰성 부정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때의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나 상당히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발언으로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정도 발언으로 적대관계가 형성된다면 북한은 정말로 신뢰할 수 없는 대화 상대다. 왜냐하면 이번 건이 아니더라도 상당기간 동안은 남북한 사이에서 이와 유사한 불쾌한 사건들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조문파동도 북한이 피해가거나 조기에 수습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북한은 북한 주민의 여론을 의식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을 상황에 변화에 맞춰 설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YS 시절의 조문파동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체제의 정비의 필요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하겠다.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유보하고 이른바 유훈 통치하에서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독려하며 김일성 없는 북한을 위해 체제를 정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행히 노 대통령의 문제 발언 이후에도 쌍방이 남북경협회의 개최를 합의했고 노 대통령의 방미 행적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재로서는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노 대통령은 문제의 인터뷰에서 대화, 교류, 지원을 계속할 방침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남북한 간 경제적, 인도적 교류는 지속될 것이다.

평화번영정책은 분명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한 것이다.

다음으로 노 대통령이 북핵문제와 남북교류를 연계하기로 한 점이 향후 민족간 자주적 교류를 가로 막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YS 시절 남북경협에 종사하던 기업인들과 대북포용정책을 지지하던 학자들이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던 것이 있다. 남북관계의 정경(政經)분리원칙이다.

변덕이 죽 끓 듯한 YS의 대북 정책은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정경분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현재 안전보장회의 차장으로 있는 이종석 박사도 그런 분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 논리를 다 가져와서 정경분리를 주장했다. 당시 필자도 그랬다.

정경 분리를 주장하며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정경 분리가 아니라 정치가 경제를 독려하고 후원하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맥락에서 보면 노 대통령이 북핵문제와 교류의 연계 원칙을 다시 제기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분명한 후퇴다.

그러나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DJ 정부의 대북 정책이다. DJ의 대북포용정책(햇볕정책-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과 그것이 낳은 6·15 남북공동선언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며 DJ가 남긴 위대한 업적이다. 향후 남북관계는 DJ가 남긴 소중한 역사적 유산을 밑거름으로 발전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DJ의 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 결과 노벨평화상이라는 영예를 우리에게 가져 다 주었다. DJ 정부는 정경분리정책을 원칙으로 삼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남북경협을 후원하고 때로는 앞서서 이끌기도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이 온 듯 했다.

그러나 DJ는 끝끝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극우세력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가 한국 민주화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크고 전 세계가 이를 인정했는데도 자신에 대한 의혹과 지지기반의 지역적 한계 때문에 그가 추구한 대북정책은 극우수구세력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 애간장 타는 일이었다.

남북한 교류 확대는 원칙의 강조보다 국민 공감대의 형성에 달려 있다. 정경분리정책을 확고한 원칙으로 했고 조건 없는 인도적인 지원을 추진했지만 정치적 곤경으로 인해 경제협력은 순탄하지 못했고 무리한 사업강행은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현대의 재무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 더욱이 이후 투명하지 못한 대북지원은 극우수구세력이 민족화해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회생의 기회마저 주고 말았다.

DJ 정부 시절 원칙도 확고했고 정책 의지도 분명했지만 극우수구세력과 언론이 다수 국민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그 원칙은 현실에서 승화 발전하지도 못했으며 대북포용정책이라는 역사적 성취마저도 정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국민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원칙은 제대로 현실로 실현될 수가 없다는 점은 DJ의 대북정책이 낳은 뼈아픈 역사적 교훈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성숙한 민주사회로 발전해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면에서도 한국은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 발전을 이룩했다. 민주주의는 다원성을 생명으로 한다. 다원성은 부정적 측면까지도 한 견해로서 존중하는 데 있다. 아직 한국 사회에는 냉전 질서에 편승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치집단이 지역감정을 양분으로 버티고 있고 상당수 국민들의 정서는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그렇지만 다원성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낡은 사고를 지녔다고 해서 민주정부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버릴 수 없으며, 그럴 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에게 보수 안정희구 계층을 포용하기 위한 보수적인 정책은 일정기간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호가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의 바다로 항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내외적으로 이른바 의혹을 해소하고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우리는 안타깝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달리 말해 남북간의 경제교류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경분리의 원칙의 재천명이 아니라 교류의 당위성과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호응을 높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자주, 화해는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평화 보장은 성명서의 문구가 아니라 정부의 외교력에 달려 있다.

노 대통령은 무력사용이 북핵문제 해결의 한 선택 사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고 했으며, 평화적 노력이 난관에 봉착할 때 무력 사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추가적 조치에 동의했다. 이에 대해 평화적 해결은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며 오히려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만을 높여 놓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의외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국은 국가 자존심을 걸고 북한과 담판을 벌이고 있다. 외교적 담판을 벌여야 하는 국가는 당연히 많은 선택을 갖고자 한다. 협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간단하고 자명한 논리 때문이다. 특히 최후의 수단으로써 무력 사용은 외교적 담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택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담판을 위해 평화적 해결을 의미하는 과감한 접근과 핵보유라는 두 가지의 선택을 취하는 것도 똑같은 논리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평범한 논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군사력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한국측의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은 선제공격을 대 테러 전쟁의 기본 수단으로 삼고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 사용 배제를 주장하여 미국 정부와 해결되지 않을 다툼을 벌이는 것보다 대미 외교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위력적인 방안이다. 추가 조치는 무력 사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이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한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에 대해 합의하지 않기는 힘들다. 그리고 합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력 사용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력사용을 결단할 시기가 언제인가가 중요하다. 이 문제는 선언문의 문구에 일방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한반도 상황 전반에 걸친 우리 정부의 외교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북핵문제의 해결 방법과 관련해서 노 대통령의 대미 외교의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어떤 문구의 삽입 유무보다는 한국의 외교력의 향상 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 문화와 한반도

5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약 3년을 생활하며 미국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 현재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을 흔히 일방주의라 일컫는다. 짧은 경험에 따른 판단이지만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미국인은 다른 사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힘든 조건 속에 산다. 미국인 중에는 세계에서 자신들만이 마일, 화씨 온도, 파운드 등의 도량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유럽에서 만난 고등교육을 받은 한 미국인이 “왜 유럽은 킬로미터와 섭씨 온도 표기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만의 잔치를 한다. 미식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야구를 광적으로 즐기며 최고 팀을 뽑는 경기를 대부분 월드시리즈라 부른다. 그들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힘이 있으면 힘으로, 기술이 있으면 기술로, 빠르면 속도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자신들이 가진 특징에 따라 자신의 방식을 개발하여 승부를 겨루는 축구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 만큼 다른 사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도 인정할 줄도 모른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인 것 같다.

이런 미국인에게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한 9·11 테러는 현실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고 그 후 일등 국민이라는 오만함은 비이성적인 분노로 바뀌었다. 9·11 이후 성조기를 자가용에 꽂고 다니는 미국인들은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는 럼스펠트가 섹스 심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미국이다.

미국의 비판적 언론이 부시를 메시아적 근본주의자라 지칭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딱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부시는 신의 명령을 받아 악(惡)의 무리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하느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했건만 부시는 자신이 선(善)과 악(惡)을 구분 짓고 신의 가호 아래 주저하거나 회의하지 않는다.

이런 미국에 북한이 핵으로 맞서고 있다. 자주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들을 철저히 세계로부터 고립해온 북한. 우리식 대로 살자는 북한이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는 최대의 군사강국에 핵으로 맞서고 있다. 이것이 현재의 한반도 상황이다.

절체 절명의 위기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한반도는 현재 피땀으로 빚어낸 정치경제적 발전을 남북 화해와 통일된 조국으로 발전시켜 갈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전쟁의 참화로 인해 역사적 단절을 경험할 것인가하는 기로에 있다. 물론 후자의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0.1 퍼센트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후자가 현실화되는 상황은 결단코 막아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지뢰밭 너머에 있는 폭탄의 뇌관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비유에 동의한다면 자주외교와 민족공조의 숭고한 가치의 명령에 따라서 지사적인 태도로 단호하게 지뢰밭을 한달음에 뛰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잡초 한 포기의 모양새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는 소심한 태도로 지뢰밭을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가.

네발로 기어가는 것이 굴욕이라면 노 대통령은 굴욕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장함에 대한 찬사에 만족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한번 던져 본다. / 유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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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의 원장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LG경제연구원,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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