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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자 <한겨레신문>에 "북한이 대남 비방 라디오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을 다음달 1일부터 중단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다른 신문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고 있는데, 사실 <구국의 소리> 방송 중단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아주 큽니다.

왜냐하면 ‘구국의 소리’ 방송 중단은 ‘북한이 공식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대남적화전략'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3호 청사 직속 기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해주에 송신소가 있는 곳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이제까지 이 방송을 남한 내의 자체적인 혁명 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이 운영하는 방송이라고 선전해 왔습니다.

원래 남조선해방민주민족연맹방송이라는 이름으로 방송하다가 1970년에는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으로, 다시 1985년 8월 8일에 현재의 이름인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통일전략은 공화국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노동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노동당 규약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 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의 완수"를 조선노동당의 당면목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을 조선노동당의 최종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북한은 이 노동당 규약을 유지하고 있는데, 국내의 보수층은 ‘북한의 노동당 규약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국가보안법 폐지는 불가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구국의 소리> 방송과 <한국민족민주전선>이 <노동당 규약>에 명기된 북한 대남전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북한은 노동당 규약을 기본 근거로 하면서 구체적인 통일전략으로는 "先 남조선혁명, 後 조국통일" 이라는 정책기조를 견지해왔습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남한의 혁명은 남조선 인민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즉, 남한내 민족민주세력이 민족민주정권을 수립하고 그 민족민주정권과 함께 사회주의 통일국가로 간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전략입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북한은 한국민족민주전선을 북한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한국 자체의 민족민주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구국의 소리 방송도 북한의 방송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구국의 소리> 방송 스스로도 한국민족민주전선의 방송임을 자처하며 한국민족민주전선의 투쟁 목표로서 △한국정부 타도 △민족민주정권 수립 △한국 내 민주정치 실현 △자주적 민족경제건설 △민족교육의 발전 △민족문화의 발전 △국민생활 안정 등 10개항의 행동강령을 선전해 왔습니다.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 비춰보면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네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트콩은 북베트남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합니다.

미국과의 베트남 종전을 위한 파리회담에도 베트콩은 형식적이지만 북베트남 정부, 사이공 정부와 함께 당사자로서 참가했으며, 사이공정부의 몰락 이후 이뤄진 베트남의 통일도 형식적으로는 북베트남 정부와 베트콩이 수립한 베트남남부공화임시혁명정부간의 통일이었습니다.

물론 베트콩은 실체가 있는 것이었지만, 한국민족민주전선은 거의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구국의 소리 방송 중단이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국의 소리 방송과 한국민족민주전선의 존재는 북한이 "先 남조선혁명, 後 조국통일", 그리고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해방과 인민 민주주의 과업 완수"라는 대남 노선에서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이 구국의 소리 방송을 중단한 것(형식적으로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이 스스로 방송을 중단한 것)은 북한이 공식적으로 유지해오던 통일전략을 폐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 이후 실질적으로는 현 남한정부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대남혁명전략을 견지해 왔는데, 그 공식 원리에 수정을 시작한 것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이 공식적인 논리가 남북관계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체제의 정당성과 체제 통합의 핵심적인 원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원리의 변화가 갖는 의미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국의 방송 중단은 남북간의 협력과 동반의 관계가 일시적이거나 상황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롭고 안정적인 관계로 발전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노동당 규약의 개정이 이뤄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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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의 원장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LG경제연구원,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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