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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9월 6일 베이징 시내 곳곳에서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와 꽃을 든 하객들을 볼 수 있었다.
ⓒ 김대오
지난 9월 6일은 올해 들어 중국에서 가장 많은 결혼식이 치러진 하루였다. 사스(SARS)로 봄에 예정됐던 결혼식이 가을로 미뤄진 원인도 있고 중국이 좋아하는 숫자 ‘9와 6’이 모인 날에다가 음력으로도 8월 10일(둘 다 짝수로 신랑 신부 쌍쌍의 합일을 상징하는 숫자)이어서 소위 길일(吉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이징완바오(北京晩報)에 따르면 이날 텬안먼(天安門) 광장 옆의 인민대회당에서는 사스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의사, 간호사, 경찰, 기자 등 50여명의 유공자들의 결혼식이 열렸고 베이징에서만 이날 3천여쌍의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국에서의 결혼은 22세 이상의 성인 남자와 20세 이상의 성인 여성이 신체 검진서와 미혼증명서를 자신들이 다니는 직장에 제시하여 비준을 받고 이를 자신의 호구(戶口) 관할지에 제출하면서 결혼을 신청하면 결혼증명서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는 10월부터 시행되는 ‘혼인등기조례’에서는 직장의 비준제를 폐지하기로 함에 따라 결혼 절차가 크게 간편해질 전망이다.

결혼증명서 절차가 끝나면 신혼부부는 택일을 하고 친지와 지인들을 불러 결혼식을 치른다. 예식장이나 식당에서 간단한 결혼 의식을 치르고 우리나라의 결혼피로연과 비슷한 풍경으로 축하연을 베풀어 준비한 음식, 술, 담배, 사탕 등을 나누어 먹으며 축하의 뜻을 전한다.

결혼의 ‘혼(婚)’ 자는 옛날에 계집 녀(女) 변이 없는 저물 ‘혼(昏)’ 자를 썼다. 그것은 아내를 황혼에 맞이했기 때문이다. 민속학적으로 인류 원초의 혼인 방식은 약탈혼이어서 신랑이 친구들을 데리고 신부 감을 빼앗아왔다. 황혼 때 땅거미가 지면 신부 감을 빼앗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으므로 저녁 ‘혼(昏)자’를 쓰다가 후에 계집 女변을 더하여 오늘날과 같이 혼인할 ‘혼(婚)자’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 결혼증명서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이것이 없으면 남녀가 여관에서 함께 투숙할 수 없다.
ⓒ 김대오
영어에서처럼 중국어에서도 “김부인(金太太)!” 하면 부인의 성이 김이 아니고 남편의 성이 김임을 말한다. 이는 ‘혼(婚)’이라는 것이 여자(女)의 성씨(氏)를 바꾸는 날(日)이라는 의미의 각 세 글자가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어쨌든 과거 중국에서 남자가 여자를 훔쳐온다는 약탈혼의 개념이 현대로 오면서 ‘신부를 산다’는 매매혼의 개념으로 바뀌어 지금도 중국의 결혼풍습에 상당부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중국 남자들은 결혼비용 중 거의 대부분을 부담하고 있으며 비싼 주택 임대료와 결혼식 비용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

보통 도시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 10만위엔 정도(우리 돈 1500만원에 해당)의 결혼식 비용이 드는데 이는 중국 젊은이들의 50개월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다. 10만위엔의 결혼비용을 쓴 신혼부부의 경우 가전제품구입에 3만위엔, 실내장식에 2만위엔, 가구구입에 8천위엔, 연회비에 3만위엔 정도를 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국이 정책적으로 만혼을 장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30세 성인 남자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많은 결혼비용을 벌어서 결혼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자연히 부모들의 부담이 늘어나고 빚을 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결혼남녀의 20% 정도가 평균 1, 2만위엔 정도의 혼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한 신혼부부의 웨딩포토 사진이다. 웨딩포토는 최근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고 있다.
ⓒ 김대오
`50년대에는 영웅과, 60년대에는 빈농과, 70년대는 군인과, 80년대는 학력과 결혼하고, 90년대에는 히말라야산으로 시집을 간다' 라는 이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중국인의 결혼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50년대에는 당 조직의 소개에 따라 항일영웅이나 전쟁, 건국영웅들과의 결혼이 추앙을 받았고, 6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인 농민과 노동자 출신이 환영을 받았다.

70년대에는 안정적인 군인들이 인기가 있었고, 80년대에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학력이 높은 지식인들이 매력적인 신랑감으로 뽑혔다. 90년대에 이후에는 특정 직업이나 출신을 막론하고 그야말로 히말라야산처럼 높은 고소득, 고학력, 고지위의 신랑감이 환영받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중국인의 결혼관도 변화해 왔지만 중국의 결혼은 유교적인 전통의 영향으로 아직도 허례허식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최근에는 과도한 결혼비용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급속한 경제성장 이후 씀씀이가 커진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점점 대형화, 서구화되고 결혼문화도 결혼사진 앨범제작, 신혼여행, 호텔피로연 등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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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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