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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미
지영은, 어느 하늘 밑엔가는 반드시, 자기가 원하고 또한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영은 이성으로서의 흥분감 같은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기석과 결혼했다. 기석은 책을 세 권 사고도 (점원의 착오였을 텐데) 태연히 두 권 값만 지불할 수 있는 남자, 남의 감자밭에 들어가 감자를 뻔뻔스럽게 캐올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그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하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기석이 소박하고 착하기 ‘때문에’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옷을 들여보내기 위해 매일같이 서대문 형무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내 생각은 바뀌었다. 지영은 기석의 소박하고 착하다는 특성‘까지도’ 사랑하는 거다.

결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다가 남편의 허영을 보태 그녀가 연안의 여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이었다. 난리, 즉 전쟁이 시작되자 지영은 기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영을 두고 “넌 토란뿌리처럼 혼자 살아라”했던 어머니 윤 씨의 잔소리는 이때부터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한 달 전 연안으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두 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기차에 올랐던 그녀였다. 저고리의 섶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을 밀어내던 그녀였다. 연안까지 찾아온 남편을, 초상집에 들른 거지 쫓듯 급히 돌려보낸 그녀였다. 심지어 그녀는 ‘만일 내가 이북으로 납치되어 영영 가버린다면?’하는 (불행한 사태에 대한) 기대를 품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가족들과 아주 헤어져버리는 무서운 욕망을 가진 여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 속을 살아가며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모해갔다. 맹목적인 희생만 꾸역꾸역 수행하는 부인네가 아닌, 꼿꼿한 자기애에 터한 모성애를 실천하는 어머니로….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지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첫장면부터 쭉, 지영은 자기 안에 ‘자아’가 또렷하게 세워져있는 여자로 읽혔다. 아무리 입덧 중이라지만 그녀는, (충분치 않은 배급으로 날마다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던 시절에) 완두콩을 둔 쌀밥을 식구들 몰래 ‘혼자 지어 먹었다.’ 연안의 여학교 선생으로 일하러 가는 것도 돈을 벌어 가정경제에 보탬이 된다든지 하는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학무국에다 부탁을 넣어놓았다는 남편의 말에 지영은 “그럴 필요 없어요. 당분간 전 서울 안 가겠어요. 제 실력으론 서울 아이들 감당 못해요”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지영의 정신 속에는 ‘나’라는 것이 분명히 들어 앉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나’는 전쟁을 통과하며 더욱더 강인해져갔다. 희, 광, 두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점차로 커갔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지영은 그런 의미에서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었다. 자기애로 충만한, 그러기에 또한 모성애로 충만한 지영의 통곡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다.

“아무도 오지 말라! 이 땅에, 아무도 오지 말라! 이 땅에! 내 혼자 내 자식들하고 얼음을 깨어 한강의 붕어나 잡아먹고 살란다. 북극의 백곰처럼 자식들 데리고 살란다! 아무도 오지 말라! 아무도!”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북극의 백곰처럼.’ 나는 무언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듯 침을 꼴깍꼴깍, 두 번이나 삼켰다.

프롬의 <사랑의 예술>을 다시금 인용하자.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영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길을 걸어갔을까? 나는 전쟁이 자기애를 지닌 그녀를 강인한 모성애의 소유자로 키워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요인’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모두 지영이 같지 않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누구의 인생에서나 전쟁(을 포함한 ‘삶의 환경’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절반의 변인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의 요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그건, 전쟁 속에서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 자신에게 있다. <시장과 전장>에서 지영은 바로 그 ‘진리’를, 자신의 생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작가의 간결한 문체를 빌어서….

(계속)

가방 들어주는 아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고정욱 지음, 백남원 그림, 사계절(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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