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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전철환 전 한은 총재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온 나라가 외환 위기 수습에 겨를이 없던 98년 9월. 정부는 부족한 재원 확보를 위해 14조원이나 되는 국채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발행 계획은 세웠지만 이 채권을 누구한테 어떻게 팔아야 할지는 막막한 상태였다. 다급한 김에 정부는 우선 한국은행이 채권을 인수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미봉책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국채 인수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전 총재는 그때 취임한 지 불과 5개월 된 새내기 총재였다. 국채 인수를 거부하는 그의 소신은 역대 그 어느 한은 총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제 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 총재는 정부관계자들에게 "유통 시장을 통해 국채를 발행할 경우 국가의 이자 부담도 훨씬 줄이게 된다"며 한은의 인수가 아닌 유통시장 발행을 강력 권장했다. 마침내 그의 권고대로 정부는 국채를 시장을 통해 발행키로 해 그해 9월 9일 14조원의 3년 만기 국고채가 연 11.6%의 낙찰금리로 발행됐다. 우리나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채권 시장이 문을 연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최고의 우량금융자산으로 변모한 국고채는 현재 4.2~4.3%대의 금리에 거래되고 있다. 현재 국채 발행 잔액이 180조원에 이르는 것을 감안할 때 국가 채무에 대한 이자 부담만 해도 매년 13조원이나 절감이 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채권 시장이 주식, 외환과 함께 3대 금융시장으로 급성장하면서 각종 금융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오로지 전철환 총재의 "안 한다면 안 하는" 소신이 일궈낸 값진 결과다. 채권 시장이 출범하기 전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에 활성화된 채권 시장이 형성될 경우 유전 10개를 개발한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갖게 될 것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또 총선을 불과 두달 앞둔 2000년 2월 금리 인상을 단행해 통화 정책에 관한한 정치적 이해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님을 과시했다.

재야학자 출신의 한은 총재이면서도 그는 금리 인하 시점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돌아선 2001년 7월에는 금리 인하를 관철하기 위한 '무제한 회의'를 진행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는 공무원 출신의 금융통화위원들이 격렬하게 금리 인하를 반대하는 드문 풍경을 낳기도 했지만 전 총재의 무제한 공세에 설득되고 말았다. 또 그해 9월 미국 테러 사태 직후에는 사상 최대폭인 0.5%포인트의 금리 인하를 단행해 우리 경제에 외부 충격을 조기에 차단했다.

전철환 총재의 재임 기간 중, 한국은행은 지불준비금이나 관리하던 구시대 중앙은행에서 금융 시장의 관리자로 화려하게 변신했고 그는 당당하게 역대 최고 총재의 명예를 누리게 됐다. 의연한 몸가짐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던 그는 2002년 4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지만 몇달 후 정부의 삼고초려를 받고 공적자금관리위원장으로 돌아왔다. 정부로서는 은행 합병 등 예민하기 이를데 없는 문제에 그가 아니면 이해 당사자를 설득해 낼 인물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몸가짐에 관한한 전 총재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한은 총재로 임명되자 그는 주저없이 충남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학교측에서는 소속 교수가 당국 기관장이 될 경우 학교 명예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어 교수직 유지를 희망했지만 그는 "한은 총재 퇴임후 교수 정년도 얼마남지 않는다"며 바로 퇴직했다.

총재가 된 바로 그 순간에는 두 아들을 불러 주식 투자 내역을 상세히 캐묻고는 자신의 한은 총재 퇴임 때까지 일체 사고 팔지 말 것을 명령했다. 뒷날 이 두 아들은 모두 한국은행 직원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결혼식을 치렀다. 2001년에는 한은 임원진의 급여 재조정 때는 총재 연봉만 제자리에 묶어 둬 후임자인 박승 현 총재가 한때 '박봉'에 시달리는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

농부의 편지에 눈물을 흘리던 재야학자이면서 홍수에 떠내려간 자신의 프라이드 자가용을 걱정하는 중앙은행 총재였던 전철환 교수가 지난 17일 밤 우리 곁을 떠났다. 무수한 가르침과 유전10개짜리 금융시장을 남겨 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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