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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늘도 오후 세 시 무렵에 한국의 친정에 전화를 했다. 움직임이 빤한 공간인지라 신호음이 다섯 번 울렸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 짧은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친정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단 두 분이 사신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면 좋으련만 올해 여든이신 친정아버지는 이태 전부터 치매로 고생이시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응당 당신의 몫이라며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을 덜어주려 하시지만 온종일 심신이 고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있으랴….

멀리 사는 탓에 안부전화만 드릴 뿐 아무 도움도 못되는 내 처지로선 제때 통화가 되지 않을 때면 무슨 사고가 난 건 아닐까 하고 덜컥 걱정부터 되는 것이다.

“잠깐 눈을 붙였드랬다. 아버지가 간밤에 막무가내로 밖에 나가자 하셔서 밤늦게까지 아파트 단지를 서성댔더니 피곤해서… 아버지도 막 주무시길래.”

잠시라도 쉬시는 걸 방해한 것이 죄송했지만 기왕 시작한 통화라 여느 날처럼 잠시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렸다. 그야말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고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온종일 상대하다 보면 변변한 말 한마디 나눌 기회가 없는 어머니로서는 하루 한 번씩 말을 붙여오는 호주 딸내미의 목소리가 어찌 기다려지지 않으랴.

치매 환자가 있는 가정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관심과 시선이 쏠리고 있지만 사회의 실질적인 도움이나 제도적 해결 마련에 대한 모색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치매 노인 보호시설의 유무와 비용의 다과를 논하기 전에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일단 가족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일차적으로 비교적 건강한 한 쪽의 배우자가 다른 한 쪽을 돌보게 되지만 같은 노인의 처지에서 24시간 이어지는 간병에 성한 몸인들 제대로 배겨날 도리가 있을까.

부모님이 연로하신 데다 한 분이 치매까지 앓고 계시니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호주의 노인 복지와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게 될 때가 더러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흔히 표현하듯이 호주의 사회복지제도는 한 사람 , 한 사람의 일평생을 개인 여건에 맞춰 살뜰하게 보살피며 최선을 다해 뒷받침한다. 특히나 치매와 같이 환자 본인뿐 아니라 궁극에는 가족의 생계와 정서마저 황폐화시키는 기한 없는 질환에 대해서는 사회 차원의 도움과 체계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치매 간병을 위한 요양 시설과 보호 시설에 대한 예산 확보는 물론이고 치매 환자를 집에서 돌보는 경우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물적, 인적 지원을 한다. 증상이 경미하다 해도 치매 환자를 잠시라도 혼자 둘 수는 없는 일. 이럴 때 바깥 볼 일을 봐야 한다거나 잠시 쉬면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싶을 때는 지역 사회 노인 복지기관에 도우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이따금 파견 간병인에게 환자를 맡기고 친구나 친척을 만나 점심이나 차를 나누고 쇼핑도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한 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외출한 사이 도우미 덕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환자와 말끔히 정리된 집안을 대하면 새로이 용기를 얻어 간병에 따른 스트레스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치매환자 가족들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간병보조금은 전적으로 정부에서 부담한다. 호주 정부는 차기 회계연도부터 노인 인구 증가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향후 5년 동안 치매 노인 복지 명목으로 총 3억 2천만 달러를 지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책정된 예산 중에는 치매 노인 간병인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금 명분으로 1인당 1천 호주 달러(약 80만원)씩 특별 보너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간병을 받고 있는 환자 본인에 대해서도 연 6백 호주 달러(48만원)가 책정될 예정이다.

여생으로 이어지는 질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의 요긴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일시불로 지급되는 이 같은 금전 혜택은 치매환자와 그 가족들의 힘겨운 처지를 함께 보듬고 위로하기 위한 사회의 따뜻한 정성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끝날 가망이 없는 간병으로 심신이 지쳐가는 가족들의 고통을 막을 길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이럴 때 이웃과 사회가 무관심과 냉담으로 침묵한다면 치매 가족이 겪는 고통과 고립감은 더욱 커져 갈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할 삶의 과정이라면 조금이라도 덜 지치고, 덜 외롭고, 덜 궁핍하게 그 시간을 통과하도록 주위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호주에서도 예전같지 않게 복지 기반이 점점 옹색해지고 있다는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그래도 한국과 비교하면 노인 복지에 관한 한, 두 말이 필요 없는 천국이다. 아버지의 간병에 지친 친정어머니가 하루에 다만 한 시간이라도 사회의 도움으로 당신만의 휴식시간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이겠기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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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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