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항아리에서 여덟 달의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김장 김치.
ⓒ 최성수
요즘 보리소골에는 '홀딱 벗고' 새가 한창이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녀석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쉴 틈도 없이 "홀딱 벗고, 홀딱 벗고"하며 울어 제친다.

누가 붙인 이름인지, 정말 그 이름을 듣고 나니 그 새가 그렇게 우는 것 같다. 원래 이름은 검은 등 뻐꾸기라는데, 본 이름보다 '홀딱 벗고'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새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이제 발그레하게 익어가는 앵두와 개울가에 절로 자란 산뽕나무의 오디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남은 김장 김치를 다 퍼야겠다는 생각에 아내를 부른다.

아내는 어느새 김치 통을 올망졸망 가져다 놓고, 김장 김치 꺼낼 채비를 마치고 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확 군둥내가 풍긴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군둥내를 몸 안으로 가득 들이마신다. 지난 가을부터 항아리 속에서 제 몸을 삭혀 온 김장 김치가 곰삭을 대로 곰삭아 유월 땡볕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배추김치를 꺼내 찢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감동을 하고, 섞박지 무를 꺼내 베어 물고 또 감탄을 한다. 그것들 속에는 작년 여름내 햇살과 바람과 빗줄기에 제 몸을 단련시켜낸 여린 배추와 무의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올망졸망 꺼내 담아놓은 김장 김치. 입에 절로 침이 고인다.
ⓒ 최성수
농약 한 번 치지 않고 길러, 절반은 벌레가 먹고, 절반만 남은 배추로 김장을 하면서, 아내와 나는 이런 김장 김치도 맛이 제대로 들까 하는 쓸데 없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제 몫의 값어치는 지니고 있는 법인가 보다. 하도 벌레 먹은 구멍이 촘촘히 나 있어 우리가 망사 배추라고 이름 붙인 그 배추가 곰삭아 이렇게 그윽한 맛을 내니 말이다.

작년 10월 중순에 담근 김장 김치니 벌써 여덟 달이 된 셈이다. 이곳 강원도 산간지역은 일찍 겨울이 닥쳐 시월 중순이면 김장을 담그곤 한다. 그렇게 담근 김장 김치를 마지막 푸는 것이 유월, 반년도 넘게 항아리 속에서 숨을 쉬며 곰삭은 김장 김치를 꺼내며, 아내는 무엇을 해 먹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김장 김치는 뭐니 뭐니 해도 숯불에 구워 돼지고기 싸 먹는 게 제격이지."

내 말에 아내는 또 다른 의견을 낸다.

"무슨 소리. 역시 김장 김치는 꽁치나 고등어와 함께 졸여 먹어야 제 맛이지요."

그 말을 들은 우리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든다.

"아냐, 김장 김치는 김치찌개에 넣어 먹어야 돼."

늘 제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는 녀석이라, 김장 김치를 보더니 역시 김치찌개 생각이 났나보다.

▲ 곱게 담아 내온 김장 김치. 무엇을 해 먹을까?
ⓒ 최성수
"당신 제자들 온다는데 잘 됐네요. 마당에서 돼지고기에 김장 김치도 같이 구워 먹으면 좋겠네요."
"아, 거 좋지."

나는 수북이 쌓인 김장 김치를 보며, 제자들과 함께 돼지고기에 싸서 소주 안주로 한 잔 할 생각에 입맛을 다신다.

주말, 제자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보리소골에 찾아왔다. 내가 가르칠 때는 그저 아직 귀밑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느새 자라 세상에서 한 몫을 하며, 이렇게 선생 집에 찾아오기까지 하니, 감개가 무량하기 정말 그지없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께 배울 때는요, 선생님이 굉장히 나이 많으신 분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선생님이 저희를 가르치실 때가 지금의 저희 나이보다도 더 젊으셨을 때네요."

은행에 다니는 영훈이가 익살맞게 웃으며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맞아, 그때는 왜 선생님이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셨지?"
"지금 우리가 너무 가볍게 사는 건 아닌지 몰라."

신문사에 다니는 제형이와 영훈이가 맞장구를 치며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제형이는 곱상한 얼굴에 귀공자 타입의, 그러나 제 속으로는 세상의 가치와 의미를 곱씹고 곱씹어 생활의 밑거름으로 삼는 올곧은 친구다.

▲ 숯불에 구워 먹는 김장 김치. 지난 해의 바람과 햇살도 함께 구워 먹는다.
ⓒ 최성수
"하운아, 너 이 할아버지 선생님 기억 하지?"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찾아온 정원이가 나를 가리키며 한 마디 하자, 하운이가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아빠의 선생님이었으니 나를 할아버지 선생님이라 하고, 제자의 딸이니 손녀뻘이라 그런 말이 맞기는 하겠지만, 아이의 눈에는 아직 내가 할아버지로 보이지는 않나보다.

정원이는 선생인 내 전공과 같은 한문을 공부하더니 지금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일을 해서 내 체면을 세워주는 제자다. 딸내미도 어찌나 순하고 곱게 키우고 있는지, 그들 부부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다 환해지는 것 같다.

우경이는 나와 같이 옥수수밭을 순식간에 매 치운다. 고등학생 시절 구로공단 지역에서 자취를 하던 봉화 촌놈인 우경이는 글 쓰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늘 나의 관심권 안에 있었다. 아직도 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좋은 글을 써보겠다는 꿈을 잊지 않고 있는 제자다.

해가 뉘엿할 무렵, 제자들과 우리 식구는 마당가에 평상을 놓고, 묵은 김장 김치와 돼지고기를 구워 싸먹으며 오래 전의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 김장 김치와 꽁치의 만남. 환상의 콤비다.
ⓒ 최성수
내가 저희들을 가르칠 때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잘도 기억해 내고, 졸업 후 어느 핸가 우리 집에 세배 차 왔다가 함께 몇 차에 걸쳐 술을 마셨던 이야기도 잊지 않고 화제에 올랐다.

내가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된 1990년대의 어느 해, 그때 대학생이던 이 제자들이 스승의 날 무렵 나를 불러냈다. 올해는 저희들이 꼭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 말에, 대학생이 무슨 저녁 대접이냐며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녀석들은 굳이 나를 끌고 가 저녁을 샀다. 아마도 해직교사인 내 생활의 궁핍을 저희들이 지레 짐작하고 그런 것이리라.

▲ 김장 김치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찌개.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놓고 끓인 김치찌개에는 밥 한 그릇 뚝딱은 식은 죽 먹기.
ⓒ 최성수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저녁밥과 술로 거나해진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적선동의 길가에서였던 것 같다. 아이들은 갑자기 나를 둘러싸더니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다른 때는 듣기 가장 쑥스럽던 그 노래가 그날따라 왜 그리 가슴 뭉클해지게 만들던지, 나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빗물에 내 눈물을 가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이 제자들과 참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내가 이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 1988년이니 몇 해만 있으면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이십 년이 되어 간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초반, 나의 청춘의 시절부터 이 제자들은 내 삶의 일부분처럼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세월동안 제자들은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의 자리를 잡아 또 제 나름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고, 몇몇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 김치 전도 좋은 김장 김치로 만든 요리. 막걸리 한잔이 제격?
ⓒ 최성수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의 걸음걸음을 이 제자들은 자신의 길인 양 지켜보고 걸어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또 두려운 일인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처럼 솟아오르는 보리소골에서, 나는 묵은 김장 김치를 안주 삼아 술을 나누어 마시며, 정말 이 제자들과 만난 지 스무 해가 될 때쯤에 기억할 만한 자리를 만들어 모두를 불러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 제자들과의 즐거운 한 때. 김장김치처럼 우리 사이도 곰삭을대로 곰삭은 사이인지 모른다.
ⓒ 최성수
여덟 달 된 김장 김치가 풍겨내는 곰삭고 군둥내 나는 그 맛이 다른 어떤 맛보다도 깊이 있고 정이 가듯이, 어쩌면 이 제자들과 나의 관계야말로 이제는 곰삭을 대로 곰삭은 여덟 달쯤 묵은 김장김치 같은 것은 아닐까?

돼지고기와 김장 김치, 혹은 김장김치와 함께 쪄낸 고등어나 꽁치와 같은 관계, 서로가 서로를 더 깊이 있게 하고 맛깔 나게 하는 관계를 하나쯤 가지고 있는 내 삶도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새삼 이 제자들을 보며 느끼게 된다.

보리소골의 밤이 깊다. 오늘따라 별은 유난히 초롱초롱하다. 보리소골의 밤이 깊고 별이 초롱초롱한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이 더 그런 것은 기억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또 김장김치에 젓가락을 가져다 댄다.

지난 가을부터 겨울, 봄의 세 계절들을 포기 속마다 감춰 갈무리 해 낸 김장 김치의 맛, 그 맛이야말로 제자들과 내가 함께 숨쉬며 살아온 세월의 맛일 지도 모른다.

김치말이 밥 만드는 법

▲ 김장 김치를 김 대신 사용해 만든 김장 김치 말이 밥. 새콤하고 고소하며, 입 안 가득 군둥내가 그만이다.

1.김장김치를 물에 깨끗이 씻은 후 꼭 짜둔다.
2.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소금, 참기름, 깨소금을 넣어 버무려 둔다.
3.김발 위에 씻어 놓은 김치를 잘 펴놓고 그 위에 버무린 밥을 깔아서 만다.

4.칼로 썰어 맛있게 먹는다.
5.새콤하고 짭쪼롬하며 입안에 가득 괴는 군둥내를 입 안 가득 느끼며 먹으면 좋다. / 김선정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